31화. 동성파
아포칼립스 D-10, 2029. 4. 4. 오전.
동주는 북부경찰서를 나왔다. 벌써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어제 오전, 오후 내내 은수와 함께 있었는데, 벌써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은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차라리 김태호나 최창민 중의 하나가 데리고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은수는 무사할 테니까······.
만약 이들이 아니라면?
만약 은수가 맡고 있던 사건 때문에, 보복이나 증거인멸을 위해 그녀를 납치한 것이라면? 은수의 신변이 안전할 리가 없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다.
은수가 고통받고 있을 걸 생각하니, 걱정과 불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차올랐다.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이 모든 게 그동안 은수를 잘 챙기지 못한 나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무슨 사건을 맡고 있는지,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 묻거나 대화하지 않았었다. 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정말 은수에게 너무도 소홀했던 걸 깨닫게 됐다.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그녀가 말해준 사정만 일부 알고 있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강파 기오성이 마음에 걸린다. 잔인하기 그지없는 그가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그런데 서강파가 벌인 일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께름칙한 구석이 많다. 정길수 살인사건을 무마하기 위한 짓이라고 보기엔 너무 무모하다. 수사팀장인 은수만 없앤다고 해서 사건이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두만, 진상두 실종사건으로 압수, 수색에 대대적인 대면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건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아무리 잔인하고, 즉흥적인 녀석들이라고 해도.
그런데도 실제 이들의 짓이라면, 그건 오로지 은수만 아는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은수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별한 증거가 있어, 그걸 없애야 할 급박한 사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무엇일까?
마침 천무용이 오늘 오후 기오성을 조사한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천 검사를 만나 은수 사건에 대해 협의를 해봐야겠다. 그래야 혹시 서강파가 이 일을 벌인 건지, 조금이라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때 은수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주는 휴대폰 화면에 뜬 ‘아버님’이라는 표시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 잘 계셨죠?”
“동주야, 이게 무슨 일이냐? 우리, 은수가 왜 연락이 안 되지?”
“······.”
“은채가 그러던데, 동주 네가 은수를 찾고 있다고?”
“네, 아버님.”
“혹시 어떻게 되고 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아버님, 북부서에서 팔 걷고 나섰으니까 조만간 좋은 소식 있을 겁니다. 대한민국 경찰인데요, 그것도 형사과 팀장인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요?”
“그래도, 우리 은수가 이렇게 오랫동안 휴대폰을 꺼놓을 애가 아닌데. 너무 걱정돼서······.”
“다른 일 때문에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아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우선 은수 찾는 일에만 집중하려고요.”
“고맙다, 동주야.”
“북부서 서장님이나 수사과장님 모두 은수 찾으려고 발 벗고 나섰으니까요. 금방 찾을 겁니다.”
“동주야, 미안하다. 너희 어머님 장례식에도 못 가보고.”
“아니요, 아버님! 제가 너무 죄송한 게 많아서······. 아버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동주는 울컥 설움이 올라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은수 아버지를 보며 위안을 했던 때가 많았다. 큰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여리고 힘이 없었다.
법대 학장까지 하셨으니, 은수가 하는 일이 때론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것이다.
이런 상황에 저 정도로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꾹꾹 누르고 아픔을 인내하고 있다. 그런 마음이 너무도 전해져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은수가 헤어지자고 했다고 들었다. 그래도 너희들 그렇게 나쁘게 헤어진 건 아니지?”
“네, 아버님. 저희 어제까지도 같이 남원까지 다녀왔어요. 은수랑 저, 아시잖아요? 잘 통하는 거······. 여전히 좋은 친구죠.”
“그래, 동주야 고맙다. 우리 은수 꼭 찾아줘. 면목 없는 부탁인 건 아는데, 지금 기댈 곳은 너밖에 없구나. 미안하다, 동주야!”
“아버님, 걱정하지 마십쇼. 은수 금방 돌아올 거에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꼭 은수 찾아내겠습니다.”
“그래, 나도 백방으로 노력해볼게. 고맙다, 동주야.”
* * *
광주지방검찰청 714호실.
천무용은 어제 날을 꼬박 새워가며 압수물 분석을 마쳤다.
이번 조선호텔 압수수색에서는 동성파 조직원 몇몇이 호텔 도박장을 오가는 모습, 조선유통과 동성파가 운영하는 유흥주점이 주류 거래를 한 점 이외에는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했다.
압수수색 정보가 이미 샜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이렇게 철저히 준비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오전 9시, 광주교도소에서 이송되어 온 동성파 보스 김필구가 검사실에 출두했다.
김필구는 아직 형이 확정된 게 아니기에 미결수용 중이고, 계속 재판 중이라 변호인이 선임되어 있다. 오늘 그 변호인도 함께 참석했다.
“김필구 씨! 본인이 동성파 보스 그러니까 최고책임자인 사실을 인정합니까?”
“네, 인정합니다.”
“동성파의 조직원은 총 몇 명이죠?”
“저희는 조직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유흥주점과 노래방 하는 업주 몇 명이 모인 친목 단체일 뿐입니다.”
“아······, 그래요?”
“다른 사람들이 저희를 마치 조폭인 것처럼 불러서 그런 거지, 저희는 그냥 선량한 시민이라고요.”
“그럼, 업소 사장들이 무슨 일로 르네상스 호텔을 쳐들어갔을까요?”
“저희가 몇 년째 작두파 애들한테 당해왔거든요. 상납하지 않으면, 영업을 못 하게 괴롭혀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래서요?”
“그러던 중에 저희 애 하나가 작두파 행동대장에게 죽지만 않았지, 반병신이 된 사건이 생겼죠. 저희도 이제 더는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서, 그날 일을 치른 겁니다.”
“하아······.”
천무용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느라 애를 먹었다.
“나보고 그걸 믿어달라 말하는 겁니까, 김필구 씨! 날 어디 바보로 아는 거요?”
“······.”
천무용은 김필구 앞에 증거기록을 던져 놓는다.
“자! 시간 드릴 테니까, 천천히 읽어 봐요.”
김필구는 의아했다. 검사가 갑자기 자기 패를 다 보여주며 순순히 읽어보라고 하니,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겁부터 났다.
“이거 제, 제가 읽어도 되는 겁니까?”
천무용은 의자에서 일어나, 검사실 밖으로 향했다.
“자리 비켜 드릴 테니까 원 없이 보세요. 그거 다 보고, 우리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김필구는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보며 눈치를 살폈다. 계장과 주임도 모두 자기 일을 하느라 바쁜 모습이다. 조심스럽게 기록을 들고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경찰에서 올라온 사건 조사내용과 일지, 보고서 등이 차례로 보였다. 보통 이런 건 안 보여주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왜 나에게 이걸 보여주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진술서와 진술조서가 편철되어 있었다. 낯익은 이름들이다. 아니 이건 우리 애들인데······.
천천히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얼마나 읽었을까? 김필구의 얼굴은 이미 울그락불그락 타오르고 있었다.
조직에서 면회 왔을 땐, 밑에 애들 입단속은 확실히 시켰으니 마음 놓아도 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들었다. 그런데 웬걸?
진술서엔 하나같이 동성파는 서강파와 같다는 둥, 위장조직이라는 둥, 김필구는 남수혁의 똘마니라는 둥 낯 뜨거운 진실이 모두 까발려져 있었다. 어쩐지 기록을 던져줄 때부터 이상하다 했다.
이때 천무용이 다시 검사실로 들어왔다.
“어때요? 이래도 동성파가 서강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계속 부인할 겁니까?”
“······.”
“기오성, 남수혁 밑에서 지금 몇 년째죠?”
“······.”
“남수혁이랑은 고향 친구에다가 어린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거 다 알아요. 이번 일도 다 기오성과 남수혁이 지시한 거죠?”
“아, 아닙니다. 지, 진짜로 아니에요.”
“그래요? 좀 있다가 기오성, 남수혁이랑 같이 대질해봅시다. 그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꼭 대질까지 해야 하는 겁니까? 저하고는 관련도 없는 사람들인데······.”
김필구는 기오성 일행과 대질하는 게 두려운 눈치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오늘 제대로 답변하지 않으면, 정상참작 그런 거 꿈도 꾸지 마세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본인 앞날 좀 걱정하라고요, 네?”
“저, 전······.”
예상대로 김필구는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불안해하는 눈치다. 천무용은 이 기회에 김필구를 몰아쳐 녹다운(knock down)시킬 기세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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