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남수혁
아포칼립스 D-10, 2029. 4. 4. 오전, 광주지방검찰청 714호 검사실.
“2029. 2. 24. 토요일 밤, 르네상스 호텔 7층 연회장에서 작두파 보스 진상두의 어머니 칠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죠?”
천 검사가 드디어 진상두 실종 사건에 관해 구체적으로 묻기 시작했다.
“네.”
“그날 작두파 조직원들은 술을 잔뜩 마셔 모두 취해 있었죠?”
“······.”
“연회가 거의 끝나가는 9시 무렵, 진상두는 조직원 한 명만 데리고 먼저 호텔에서 나왔죠?”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쳐들어갔을 때 그곳에 없었다는 것만 알지, 나머지는 모릅니다.”
“다시 물을게요. 작두파 조직원들이 모두 만취한 건 어떻게 알았나요?”
“우린 몰랐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아무 정보 없이 그냥 분해서 그때 쳐들어간 겁니다.”
“음······, 그냥 복수하러 쳐들어갔는데, 운 좋게 작두파 애들이 술 취해 정신이 없더라 이건가요?”
“네. 저희도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진짜 몰랐어요.”
“김필구 씨! 이런 식으로 계속 거짓말할 겁니까? 그날 작두파 친 애들 내가 직접 다 조사했어요. 그 친구들이 지운 문자나 카톡까지 다 복원했다고요. 자, 봐보세요.”
천 검사는 서랍에서 꺼낸 증거서류를 김필구에게 보여주었다. 포렌식을 통해 확보한 대포폰 문자메시지와 카톡 내용이다.
그 내용은 여러 가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동성파는 이미 며칠 전부터 작두파가 칠순 잔치 때 크게 회식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조직 간부는 물론 행동대장부터 일반 대원까지 모두 모인다는 사실까지도. 이들이 만취할 때를 기다린 후 공격을 감행하기로 모의한 내용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게다가 누군가가 현장에서 계속 르네상스 호텔에서의 상황을 일일이 대포폰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그 내용을 들은 또 다른 누군가가 다시 동성파 조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대포폰이라 문자메시지를 발송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작두파 내부에 첩자가 있었거나, 배신자가 있다. 대포폰을 가지고 르네상스 호텔에 있던 녀석이 이 사건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누군지 밝히는 게 관건이다.
당일 오후 5시, 동성파 조직원 30명은 미리 승합차에 쇠파이프와 단검을 싣고, 4인 1개 조로 각 차량에 탑승해 르네상스 호텔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저녁 7시 연회가 시작할 무렵부터 행사가 마무리되어 갈 때까지 내부에서 그 녀석이 작두파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다.
그리고 진상두가 밤 9시경 르네상스 호텔을 나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동성파 조직원들에게 출동 명령이 내려졌고, 그 직후 피바람 사건이 벌어졌다.
“자! 이런 데도 계속 거짓말할 겁니까?”
“······.”
“며칠 전부터 작두파의 움직임을 일일이 알려준 사람이 누굽니까?”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르네상스 호텔에 남아 있던 작두파 조직원들은 당신이 처리했고, 그날 자리를 뜬 진상두는 누가 처리했습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그 휴대폰들 다 조사했으니 잘 아실 것 아닙니까? 저희는 호텔에만 있었지, 진상두가 나간 것도, 어디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
“전 정말로 진상두 그놈을 혼내주러 간 건데, 얼굴도 못 봐서 오히려 억울하다고요.”
“하아! 계속 거짓말할 겁니까?”
“······!”
“다 알고 있어요, 김필구 씨! 당신이 서강파 간부 남수혁이 사람이란 거, 그리고 그날 남수혁이 여수 가기 전에 화순 너릿재 쪽으로 이동한 것도 다 알고 있다고요.”
“······!”
“그날 진상두가 타고 나간 벤츠를 찾았다고, 알아? 화순 너릿재 터널 근처에 부서진 채 버려져 있더군. 그리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한 달이 넘도록 행방불명이고. 알고 있죠?”
“그야, 나중에 들어서 안 거죠.”
“그날 남수혁 일행이 르네상스 호텔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지? 진상두가 탄 벤츠가 화순 쪽으로 가자, 뒤쫓아 갔을 테고."
“······.”
"물론 벤츠가 화순 쪽으로 넘어갈 걸 미리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다른 한 팀은 화순 넘어가는 길 중간쯤, CCTV가 없는 한적한 도로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테고. 남수혁이랑 대포폰으로 연락하면서 벤츠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던 거지."
“······.”
"저 멀리서 벤츠가 오는 걸 보고, 준비한 차로 갑자기 튀어 나가 벤츠를 부딪쳤을 테고. 그러니까 벤츠가 그렇게 망가진 거 아니야! 그리곤 뒤쫓아 온 남수혁이랑 합세해 바로 작업해 버린 거지, 맞죠?”
“호텔에 있던 제가 어떻게 그 일을 압니까! 검사님, 너무 소설 쓰시는 거 아닙니까?”
“소설? 과연 그럴까! 내가 도로 CCTV며 톨게이트 영상까지 다 확보했는데! 남수혁이 그 시각에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여수로 이동했거든. 그 차에 진상두를 태워 갔거나, 아니면 이미 처리한 후 시체만 가지고 갔겠지.”
“저, 저는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김필구 씨! 나중에 살인죄까지 다 뒤집어쓰려고 그래! 지금 구속된 사건으론 많이 받아봐야 3년밖에 안 된다 배짱부리는 거지? 잘못 생각한 거야, 이번 건은 달라.”
김필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본인이 직접 죽이지 않았어도, 어떤 식으로든 협조한 게 드러나면 공동정범으로 똑같이 처벌받는 거 잘 알잖아?”
그때 옆에서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던 김필구의 변호인이 끼어든다.
“저희 의뢰인은 계속 진상두 건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검사님께서는 증거도 없이 그냥 추측으로만 신문하시는데, 옆에서 지켜보기 힘드네요. 계속 이런 식으로 추궁하시면, 저희도 진술거부권 행사하겠습니다.”
천 검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이다.
“수사기법 상 저희가 가지고 있는 증거를 다 보여줄 수 없어서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 저희는 이미 김필구 씨를 참고인이 아닌 살인혐의 피의자로 전환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다른 공범들 조사가 예정되어 있고요.”
“네?”
김필구의 변호인이 놀란 기색이다. 김필구 역시 변호인을 바라보며,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따지는 눈치다.
“자! 김필구 씨, 서강파 간부 남수혁과의 관계에 대해서 묻겠습니다.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죠?”
남수혁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국체전 유도 73kg급에서 우승할 정도로 일찍부터 뛰어난 기량을 뽐냈다. 2학년 때 벌써 국가대표로 발탁돼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 3위에 입상했으니, 그야말로 올림픽 때 메달을 기대할 수 있는 특급 유망주였다.
김필구는 남수혁과 장성군 황룡면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깨복쟁이 친구다. 중학교 때 광주로 전학와 줄곧 주먹 쓰는 애들과 어울리더니, 고등학교 땐 서강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조직 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필구가 오랜만에 친구 수혁을 불러, 자신이 번 돈으로 거나하게 술을 샀다. 수혁이 운동만 하느라 여자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제대로 놀지도 못하는 걸 안타깝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그날 또래 여자애들도 부르고 술도 먹이면서 한껏 흥을 냈다.
한편, 시내에서 폼 좀 잡던 작두파 소속 비슷한 또래의 애들은 평소 필구가 서강파 뒷배를 믿고 거드름을 피우고 다니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필구가 시내에서 여자애들과 있는 걸 발견하고는 먼저 시비를 걸었다. 필구는 자신의 뒷배인 서강파 선배를 운운하며 꺼지라고 했고, 화가 난 무리가 그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당하는 걸 본 수혁은 가만있을 수 없었다. 재빨리 몸을 날려 한 녀석을 업어치기로 던져 버렸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 맨 먼저 가장 센 녀석을 골라잡아 족쳐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저기 가장 덩치가 크고 힘이 세 보이는 녀석이 뒷짐을 지고 있다. 그래 저놈이다. 수혁은 그를 향해 달렸다.
날아오는 발길질을 가볍게 피한 뒤, 녀석의 얼굴에 주먹세례를 퍼부었다. 나동그라지는 녀석의 얼굴에서 핏발이 튀고 있다.
그런데 그때 수혁의 뒤쪽에 있던 녀석 하나가 옆에 있던 쇠 의자를 집어 들더니 그것으로 수혁의 머리를 세게 내리꽂으려 했다.
수혁은 뒤에서 공격하는 인기척이 있어 재빨리 몸을 틀었다. 그러나 가까이서 너무 빠르게 내려오는 바람에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그만 오른 어깨에 맞고 말았다.
다행히 정통으로 맞은 게 아니라 다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화가 난 수혁이 달려들자, 의자로 내려친 놈은 몸을 움츠리고 피하기 급급하다. 이후 수혁은 필구와 함께 상대 녀석들을 말 그대로 개박살 내버렸다.
어깨가 아파왔지만,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수혁. 그런데 며칠째 어깨가 욱신거리고 통증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갔다. 의사는 어깨 인대 파열이 심각하다며 당장 수술을 권했다.
수술하면 적어도 6개월은 재활해야 해 운동을 할 수 없다. 전국체전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와 수술이 두려웠던 수혁은 인대 파열 사실을 숨기고 계속 훈련했다.
그런데 전국체전 예선이 있었던 어느 날, 시합 도중 찢어질 듯한 어깨 통증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코치는 그제야 심각한 부상을 알아챘고, 다시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인대 파열이 심각해 수술 이후에도 재활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결국, 뒤늦게 수술까지 했지만 이후 수혁은 더 이상 유도를 할 수 없었다.
잘못 끼어든 한 번의 싸움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셈이다.
수혁은 그 상황을 만든 작두파 애들을 가만둘 수 없었다. 시내에서 놀고 있던 작두파 애들을 찾아가, 혼자서 5명을 피범벅이 되도록 패버렸다. 수혁은 그 일로 소년원에 들어갔고, 나와서는 김필구의 부름을 받아 서강파에 몸담게 됐다.
망가진 인생, 그 복수의 대상을 찾아 몸부림친 수혁. 늘 최선봉에 서서 몸을 아끼지 않고 미친 듯 싸웠고,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당시 서강파의 보스 전두만은 이런 수혁의 패기와 독기 어린 눈빛을 단번에 알아보고, 그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수혁은 조직 선배인 필구보다 훨씬 앞서 나가, 행동대장을 넘어 중요한 간부의 반열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악연(惡緣) 같은 기연(奇緣)으로 김필구는 이제 남수혁의 오른팔, 그가 쥔 검의 칼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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