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간질
아포칼립스 D-10, 2029. 4. 4. 오후, 광주지방검찰청 714호 검사실.
기오성이 검사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조사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천무용은 별실에서 정태수 변호사를 만났다.
“천 검사, 미안해. 좋은 사건으로 만나야 하는데······.”
“아니요. 변호사가 사건을 가리면 안 되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살인 사건 조사라 좀 세게 나가더라도 이해해주십쇼.”
“알아, 자네 조사 스타일이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편하게 조사해. 난 그저 옆에 앉아만 있을 테니까. 그래도 변호사로 옆에 있는 거니까, 뭔가 절차적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그런 분위기만 살짝 내주면 돼.”
“아이, 부장님! 제가 그 정도는 당연히 해드리죠. ······이제 조사 시작해볼까요?”
정태수 변호사는 천무용의 대학과 검찰 직속 선배다. 재작년엔 정태수가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부장검사였고, 천무용이 그 밑에서 중요한 사건을 도맡아 해결했었다.
정권이 바뀌고 차장검사 승진에서 밀린 정태수는 올해 초 고향인 광주에서 개업해, 굵직한 형사 사건을 싹쓸이하는 전관 변호사다.
서강파는 천무용과의 이런 인연을 이용하기 위해 정태수를 변호인으로 선임했다. 검찰은 자기 식구였다가 최근에 개업한 변호사를 만나면, 한동안 예전 직책으로 불러주고 있다.
그래서 천무용은 개인적으로 만나면 지금도 정태수에게 ‘부장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것이 나름 이들만의 예의인 셈이다.
정태수는 여러 차례 천무용에게 전화해, 사정을 설명하고 사건을 빨리 종결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강직한 천무용은 공과 사를 확실히 구별한다. 사적으로는 그와 편하게 대화하고 서로 조언을 구하기도 하지만, 공적으로는 사건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정태수는 더 이상 천무용을 설득할 수 없어, 그러면 서강파에게 욕먹지 않을 정도로 편의만 봐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런 내막을 모르는 기오성은 정 변호사가 별실에서 한참 대화 나누는 걸 보고 뿌듯했다.
역시 가까운 사이라더니, 사실인 듯하다. 조사도 조금은 수월하게 받을 것만 같다.
“기오성 씨! 서강파 조직의 최고 수장이신 거 맞죠?”
“서강파라는 조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저희는 아시다시피 유통이나 건설업 하는 건실한 회사일 뿐이죠.”
“현재 어느 회사의 대표로 재직하고 계시죠?”
“제가 따로 회사를 운영하는 건 아니고, 여러 회사에서 고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조선호텔, 유통, 물류, 건설, 이 이외에도 많습니다.”
“가족관계가 어떻게 되죠?”
“처와 아들 둘이 있습니다.”
“조선호텔 유흥주점을 운영하는 정마리아 씨와는 어떤 관계죠?”
“네? 아니 갑자기 그 여자는 왜 묻습니까?”
“다 묻는 이유가 있어서겠지요. 어떤 관계죠?”
“오래 알아 온 친구입니다.”
기오성은 못마땅한 말투로 대답했다.
“정마리아 씨가 데리고 있는 아이 중에 임안나라고 있던데, 아시죠?”
“네?”
기오성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정태수를 바라본다.
“아니, 정 변호사님! 오늘 도대체 무슨 조사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왜 사건 조사는 안 하고, 남의 사생활을 이렇게 묻는 건지, 쯧.”
정 변호사는 이때 나서지 않으면 체면이 서지 않아,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천 검사님, 혹시 정마리아나 임안나 씨가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살인 사건이 하나 더 문제 돼서 그렇습니다. 조사하면서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오성 씨, 진술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본인에게 불리한 진술일 경우 거부하셔도 됩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임안나 씨와는 무슨 관계죠?”
“진술거부권 행사하겠습니다. 도대체 이걸 왜 묻는 건지······, 쯧.”
“좋습니다. 어떤 사건인지 알려드리죠. 2029년 3월 2일 금요일 밤, 피해자 정길수가 조선호텔 2층 유흥주점에 들른 이후 최근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됐는데요. 조선호텔 유흥주점, 정마리아 씨가 운영하는 거 맞죠?”
“네, 맞습니다.”
기오성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임안나는 정마리아가 데리고 있는 아가씨 맞죠?”
“······.”
“그날 새벽 임안나가 한빛 대학 응급실에 간 사실 알고 있는가요?”
“네? ······전, 모릅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진짜, 전 모르는 일입니다.”
“조선호텔은 계단을 통해서 나가는 뒷문이 따로 있지요?”
“전 모릅니다.”
“그곳엔 CCTV도 없던데.”
“······.”
“우리가 한 달째 잠복해서 다 봤어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 진도가 나갈 것 아닌가요?”
“좋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그게 어때서요?”
“그날 새벽 그 뒷문으로 큰 짐들이 나갔다고 하더군요. 남수혁의 부하들이 고생 좀 했다던데, 맞습니까?”
“저, 전 모르는 일입니다.”
기오성은 매우 당황한 표정이다.
“남수혁의 부하 중 몇몇이 시체를 야산에 묻은 것 같은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십니까?”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 여기서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천무용은 동주와 헤어진 후 서강파 내부 정보원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물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무튼 그날 남수혁이 유흥주점에 있었고, 여러 명을 동원해 뒷문으로 큰 짐을 빼낸 건 확실하다.
“계장님, 남수혁 씨 좀 불러주십쇼.”
박 계장이 대기실에 있던 남수혁을 데리고 와 기오성 옆에 앉게 했다.
“남수혁 씨, 지난 3월 2일 금요일 밤 11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조선호텔 유흥주점에 있었죠?”
“네?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묻는 말에나 대답하세요. 그때 유흥주점에 있었어요, 없었어요?”
“어, 언제 말입니까? 다시 말해주십쇼.”
“지난 3월 2일 금요일 밤 11시 이후요. 한 달밖에 안 된 일이잖아요.”
남수혁은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며, 옆에 있는 기오성의 눈치를 살핀다.
“음······,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남수혁 씨, 날마다 조선호텔 출근하시죠?”
“날마다는 아니고 자주 가고 있습니다.”
“벤츠 2899번, 남수혁 씨가 타는 차 맞죠?”
“네, 제 차가 맞는데요.”
“조선호텔 지하주차장 전산 자료를 보니까, 매일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에 출근하던데요. 지난 3월 2일 금요일에도 오전 9시 출근했고요. 맞죠?”
“그, 그럴 겁니다.”
“평소에는 저녁 무렵에 퇴근하는데, 그날은 다음 날 새벽 2시 반에 나갔더군요. 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 무슨 일이라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남수혁 씨, 그날 임안나가 왜 상처를 입은 거죠? 팔에 피가 철철 났다던데.”
“아이, 전 모른다니까요. 왜 그걸 저한테 묻냐고요?”
“임안나 씨 데리고 간 게 남수혁 씨 부하 강창배예요, 강창배. 그런데 모른다고 시치미 떼는 겁니까?”
“저, 전 몰라요.”
“그날 피해자 정길수가 살해당했어요. 뒷머리를 둔탁한 걸로 맞아서 뇌출혈로 사망한 거라고요. 부검 결과 보니까, 양주병 같은 걸로 그냥 내려친 것 같던데, 남수혁 씨가 한 거 아니에요?”
“아, 아닙니다. 전 아니에요.”
남수혁이 몹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날 남수혁 씨 부하들 여럿이 무언가를 담은 큰 상자를 끌고 내려간 걸 목격한 사람이 있어요. 그 일 처리하느라 남수혁 씨도 늦게 퇴근한 거 아니냐고요?”
“저, 정말 아니라니까요. 도대체 누가 목격했다는 겁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목격자는 잘 보호하고 있으니까. 목격자를 알려주면 또 정길수처럼 묻어버리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무슨 말씀을······.”
“기오성 씨? 옆에서 보니까 어때요. 이 친구 뭔가 수상하죠?”
“······.”
“기오성 씨! 분명히 그날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거죠?”
“네, 저는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남수혁 씨가 지금까지 한 달 동안 아무런 보고도 안 한 거네요?”
“······!”
“맞습니까?”
“네, 그런 말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천무용은 기오성과 남수혁의 관계에 금이 가도록 일부러 이간질하며, 잔뜩 자극했다.
“남수혁 씨, 왜 조직 수장에게 그런 중요한 일을 보고도 하지 않은 거죠?”
“저, 정말 그러지 않았다니까요. 뭐, 그런 일이 실제 있었어야 보고하지요. 진짜 그런 적이 없다니까요.”
“음······, 전혀 반성하지 않는군. 남수혁 씨! 본인의 오른팔 강창배에게 대포폰 만들어 오라고 지시한 적 있죠?”
“아니요. 무슨 말을······.”
“거짓말 그만하시고, 사실대로 말해봐요. 남수혁 씨! 대포폰 판매업자가 이미 다 진술했어요. 강창배가 사간 대포폰 10개 다 조회 끝났고, 본인들 위치까지 다 확인했단 말입니다.”
“······!”
“기오성 씨, 그동안 이런 친구를 믿고 같이 사업한 거예요?”
“하······!”
기오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착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 대포폰 문자메시지를 보니까, 남수혁 씨를 ‘혁’이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던데. 누군지 아시겠죠?”
“······.”
천무용은 오전에 김필구에게 제시했던 대포폰 통화내역과 문자메시지 수발신 내용을 일일이 보여주었다.
“자, 어때요! 볼만 하죠?”
기오성은 눈을 부라리며 남수혁을 응시하고 있다. 김필구의 변호인으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어서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낯뜨거운 증거들을 직접 보니, 분노가 폭발 일보 직전까지 이르고 말았다.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한 남수혁을 당장에라도 패 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자! 남수혁 씨, 이래도 부인할 겁니까?”
“하······!”
남수혁은 크게 한숨을 쉰 후 넌지시 기오성을 바라보았다. 분노에 찬 그의 얼굴에서 살기마저 느껴졌다.
‘아! 이제 난 죽었구나······.’
- 작가의말
더욱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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