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감금 (2)
아포칼립스 D-10, 2029. 4. 4. 어느 지하실.
남자의 발걸음이 점점 다가온다. 먼저 왼쪽 팔을 묶고 있던 끈이 풀렸다. 아! 이제야 팔을 움직일 수 있다.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나? 갈비뼈 위로는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다음으로 오른쪽 팔까지 풀렸다.
남자가 머리를 한 손으로 받친 후 나머지 한 손으로 어깨를 밀어 앉을 수 있게 도왔다. 그리곤 양손을 뒤로 묶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쓰지 못하도록 천으로 감싸고는, 그 위를 두꺼운 줄로 꽁꽁 묶는 느낌이다.
숙련된 손놀림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손길이 따스하다. 뭔가 보살펴주고, 배려하는 듯하다.
다음으로 발을 묶고 있던 끈이 풀렸다. 무릎을 구부려 옆으로 돌아누운 후,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화장실이 어디예요?”
“일어서.”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섰다. 앞이 보이지 않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앞으로 3발짝만 걸어봐.”
지시에 따라 앞으로 걸었다. 남자의 인기척이 곁에서 느껴진다. 뒤쪽으로 가 묶인 팔을 붙잡았다.
키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팔꿈치 위쪽을 잡은 남자의 손도 아담한 크기다. 어제 몸부림칠 때 남자의 완력이 세지 않은 느낌이었다. 몸에서는 아무런 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흔한 로션조차 바르지 않는 걸까?
남자는 팔로 밀면서 방향을 가리켰고, 그 지시에 따라 어둠 속을 걸었다. 침대에서 앞으로 5발짝, 오른쪽으로 틀어서 8발짝 정도 걸으니 세면대가 나왔다. 그 옆에서 발로 천천히 허공을 헤집다가 무릎 아래로 변기 같은 게 닿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실 한쪽, 칸막이도 없이 개방된 공간에 세면대와 변기가 있는 듯하다. 지하실은 어림잡아 10평 이상의 크기로, 침대를 빼고는 다른 시설 없이 뻥 뚫린 개방된 공간이다.
사전에 납치를 계획하고 준비해둔 곳 같다. 아무리 소릴 쳐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나 보다. 그러니 입을 틀어막지 않은 거다.
“자, 이 정도면 됐겠지. 앉아서 일 봐.”
종아리에 닿는 변기의 서늘한 촉감으로 위치를 잡았다. 그리고 무릎을 서서히 굽혀 앉았다.
그런데 입고 있던 원피스가 엉덩이에 깔려, 이대로는 일을 볼 수 없다. 두 팔을 뒤로 단단히 묶고 손가락을 쓸 수 없게 해놓아, 원피스를 위로 잡아당길 수 없었다. 민망한 상황이다.
“왜? 올려줄까?”
“팔 좀 풀어주면 안 돼요? 이 상태로 어떻게······. 그리고 계속 여기에 서 있을 거예요? 변태 같이.”
“푸하하! 변태, 그래 변태 맞아. 이런 일을 벌이는 걸 보면 모르겠어?”
“······!”
“예상했던 대로야, 예쁘던데! 조금 빈약한 면도 있지만, 큭큭.”
“야, 이 더러운 놈아! 네가 이러고도 잘 살 것 같아! 넌 천벌 받을 거라고. 나가면 바로 벼락 맞아 죽을 거야!”
“그래, 한 번 봐볼까? 누가 먼저 죽는지.”
소름이 쫙 끼쳤다. 내 주변에 이런 놈이 있었다니, 사이코패스다. 어떤 말을 해도 이놈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 상황을 극도로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사이코패스 대응 방법을 배웠었는데. 아! 그때 열심히 해둘걸. 로스쿨에서 과학수사나 수사기법 등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때 분명 범죄심리학 과목이 있었다. 사이코패스 범죄도 그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변호사시험 과목이 아니고,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강하지 않았다.
경감으로 특채된 직후 한 달여간 경찰 간부 실무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전문가로부터 연쇄살인이나 사이코패스 범죄에 대해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그런데 아버지 권유에 못 이겨 경찰에 입문한 탓에 교육내용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 그때 분명 이런 놈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이참! 그때 잘 들어둘걸. 이런 놈을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까?
뭔가 결핍이 어쩌고, 저쩌고 했던 것 같은데······. 맞아! 그 결핍에 대한 보상으로 무언가를 채워줘야 해. 그렇다면 반항하는 건 별 효과가 없어. 차라리······, 자포자기한 것처럼 굴자.
“그럼 치마라도 올려줘요. 급해요.”
남자의 숨소리가 바로 앞에서 느껴진다. 쭈그려 앉느라 신발 바닥 미끄러지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무릎까지 바닥에 댄 것 같다.
‘스윽’
옷자락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으윽! 하필 남자의 손길이 무릎을 스쳐 지나갔다. 이 변태 자식! 옷만 잡고 올리면 될 것을, 굳이 내 몸까지 스치다니. 이 더러운 놈!
치마가 조금씩 올라가 허벅지까지 말아 올라갔다.
“엉덩이 좀 들어줘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일어나며 무릎으로 이 녀석 얼굴을 강타하면 어떨까? 그 뒤로는? 앞이 안 보이는데, 내가 뭘 할 수 있지? 지금은 때가 아니다. 참아야 해,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살짝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원피스가 엉덩이 위쪽까지 말아 올라갔다. 맨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다리를 오므려 최대한 은밀한 부분이 보이지 않도록 했지만, 너무도 창피하다. 죽고 싶다.
“됐어요. 이제 저리 가주세요. 아니, 나가주세요. 일 끝날 때까지.”
“싫은데! 내가 나가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나가냐? 걱정하지 마, 여자들 일 보는 건 많이 봐서, 별로 땅기지도 않아. 저 끝에 가 있을 테니까, 편하게 보라고.”
으윽, 변태 자식!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일을 볼 수밖에 없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점점 멍해지지. 갑자기 하품이 나온다. 일을 봐서 긴장이 풀린 건가, 아니면 머리를 잘못 맞아서 뇌에 이상이 생긴 걸까? 뭔가 계속 무기력해지는 느낌이다.
“일 다 봤어요. 제발 마무리할 수 있게 손 좀 풀어주세요.”
“걱정하지 마, 비데가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 봐.”
남자가 다시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변기 옆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쏴아악, 물줄기가 세차게 올라온다. 아! 이게 무슨 꼴인가? 난감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물줄기가 멈추었다. 무엇으로라도 닦고, 마를 때까지 기다릴 힘도 없다. 침대로 가서 빨리 눕고 싶다. 뭘까? 두유에 수면제라도 탄 건가?
“두유에 약 넣은 거지? 말해봐, 무슨 짓을 한 거야?”
남자가 다가와서는 팔을 붙잡고 일어설 수 있게 돕는다.
“여기서 뭐 할 거야? 잠이나 계속 자 두는 게 좋지. 그렇지 않아?”
“이 나쁜 놈! 날 잠재우고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걱정하지 마,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었어. 지금은 그럴 생각 없으니까, 그냥 잠이나 자둬.”
남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다. 부축받으며 침대로 갔다. 남자가 팔과 다리를 묶는 동안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극도의 피로감, 무기력감이 몰려왔다. 단순한 수면제가 아닌가 보다.
아! 누가 날 구해줄 수 있을까?
이 순간 동주 오빠의 얼굴만 떠오른다.
이제 더는 그 환한 미소를 볼 수 없겠지! 지금 오빠는 무얼 하고 있을까? 생존 벙커 만드느라 바빠서, 날 잊고 있는 건 아닐까?
하긴, 헤어지자고 한 건 난데, 계속 지켜달라고 말하는 건 억지지. 예전 같으면 만사 제쳐놓고 날 찾고 있을 텐데······.
뭐가 급하다고 그렇게 결혼에 집착했을까?
대학 때 사귄 그 남자처럼, 혹시 오빠가 떠날까 봐 겁났던 거야.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어. 결혼하면 정말, 그때는 오빠가 진짜 내 사람이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오빨 힘들게 한 것 같아.
오빠가 날 사랑하는 것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도 알았는데. 엄마가 편찮으셔 경황이 없었지? 동아 먼저 결혼시키고 싶어 하는 것도. 준비하고 싶은 게 많은 것도 다 알았는데. 오빠가 힘들어하는 거 알면서도 내 욕심만 부렸어.
오빠, 너무 미안해!
어제 휴게소 계약하고 기뻐서 안기고 싶었는데, 헤헤! 에이, 그냥 모르는 체하고 안겨볼걸, 아쉽다.
오빠 품에서 맘껏 울고 싶었는데. 차에서 내릴 때도 오빠가 붙잡았다면, 나, 가지 않았을 거야.
제발 오빠가 붙잡아 주길 바랬어. 태호 오빠랑 사귄다고 한 거, 사실은 마음에 없던 일이야. 예전부터 날 마음에 두는 걸 알았지만, 계속 거절했어. 난 오빠뿐이었거든.
그런데 오빠가 붙잡지 않으니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오빠가 날 잡지 않으면, 어떻게든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어. 그땐 오빠가 진짜 미웠어.
그런데 막상 저질러 놓고는 엄청 후회했어. 헤어지고 당장 만나지 못하니까, 너무도 그리웠어. 오빠의 따뜻한 눈빛, 푸근한 손길, 아늑한 그 품이.
아······, 오빠! 제발, 날 찾아줘. 부탁이야!
어느새 스르르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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