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생존팀 회의 (1)
아포칼립스 D-10, 2029. 4. 4.(수) 오후 6시
광주 동구 동명동에 있는 김정현의 집, 이곳은 5년 전 오래된 집 3채를 매수한 후 다 철거하고 신축한 고급 양옥 주택이다.
커다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곧바로 오르막 계단이 있다. 그 위로 너른 정원이 펼쳐지고, 담장 주변으로는 으리으리한 소나무들이 멋지게 둘러 있다.
가운데는 잔디밭이 잘 조성되어 있고, 한 귀퉁이에는 조그만 연못이 그윽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택은 2층 규모로 대리석과 벽돌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었다. 한눈에 보아도 돈과 공을 들인 걸 쉽게 알 수 있다.
동주가 집에 들어섰을 때 맨 먼저 수연이 반겼다. 정장 차림의 모습만 보다가 수수한 옷차림의 수연을 보니 다른 느낌이다.
“오빠, 어서 들어와. 다른 분들도 와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조금 늦었지. 미안!”
동주는 수연과 함께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에 자리한 커다란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에는 김 대표와 생존 팀 일행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처음 온 심원기와 그의 동생 심원주도 있어 서로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했다. 동주가 미리 연락해 동아와 최용석도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오 교수는 오늘 장재건 사장과 함께 심원주가 근무하는 현기차 광주공장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먼저, 차량용 배터리 생산 라인을 살펴보고, 발전기 용도로 사용할 배터리 일체를 구매했다.
이 배터리는 생존 벙커의 심장이다. 10여 대의 리퍼 컨테이너와 전열기 등 각종 장비에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대지진의 충격에도 버텨낼 수 있도록 보호 캡슐과 지지대까지 함께 장만했다.
다음으로, 현기차 수소연구소를 방문해 수전해 시스템을 확보했다. 연구소에서는 최근 새 모델을 구입하고, 구형 모델은 협력업체에 처분하려고 공고를 내놓은 상태였다.
오 교수는 이 구형 수전해 시스템도 2년 정도만 사용한 것이어서, 앞으로도 오랜 기간 충분한 성능을 낼 수 있기에 곧바로 매수했다.
심원주 덕에 생존팀의 전력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었다. 이제 이런 설비를 생존 벙커에 설치하면, 아무리 오래 벙커에 있더라도 전력 걱정은 덜 수 있게 됐다.
장재건 사장은 현기차를 나와서 곧바로 정령치 터널로 향했다. 오늘 밤 신수경의 도움을 받아 터널 천장에 하자가 있는 것처럼 꾸며야 하기 때문이다. 장재건은 믿을 수 있는 직원 두 명을 이미 정령치 휴게소로 불러놓았다.
고가사다리가 장착된 차량을 이용해 천장 일부를 뜯어내고, 모래와 흙이 쏟아져 내린 것처럼 터널 내부를 꾸밀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야간을 이용해야 했다. 장재건은 그 때문에 오늘 저녁 모임에 곧바로 참석할 수 없다. 늦은 저녁에나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 만찬에 모인 일행들은 우선 식사를 했다. 동주는 은수 일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아니면 수사상황을 보고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직 실종인지도 정확하지 않은 데다가, 우리가 준비하는 일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괜히 이야기를 꺼내면 불안만 조성할 수 있다.
게다가 동주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은수 때문에 제대로 일을 수행할 수 없다는 걱정만 끼칠 것 같았다. 그래서 은수 일은 당분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오 교수가 동주에게 친구인 상진과 형규가 오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동주는 형규가 근무 때문에 올 수 없다고 알리고, 상진은 생존물자를 구할 방법을 찾고 있다며 우선 둘러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깐 차 한잔을 한 뒤에, 본격적으로 회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동주는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고 생존대책 수립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러나 마음이 잘 서지 않았다. 은수가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을지 떠올리니, 참을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해왔다. 제발, 빨리 어떤 단서라도 나와야 할 텐데. 이대로 시간을 허비하면, 점점 은수를 찾는 게 어려워질 수 있다.
동주는 정원으로 나와 연못가를 걸으며 김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호야! 오늘 경찰조사 잘 받았어?”
“네, 저야 있는 그대로 다 말했죠. 제 친구도 같이 가서 조사받았고요.”
“그래, 경찰들 분위기는 어때?”
“저는 휴대폰 통화내역이나 위치가 친구 집이라서 알리바이가 확실하잖아요. 그래서 조사가 빨리 끝나 일찍 돌아왔습니다.
다른 용의자로 지목된 경찰 한 분은 계속 조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내용은 잘 모르고요.”
“태호야! 너도 은수 많이 걱정하는 거 알아. 우리 서로 이 건에 대해서는 진짜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돼, 알았지?”
“물론이죠. 저도 은수가 걱정돼 죽겠습니다.”
“태호야! 혹시 요즘에 은수에게서 이상한 점이나, 뭔가 이 사건과 관련될 수 있는 뭐라도 기억나는 게 없어?”
“실은 경찰에서도 말한 건데요. 가끔 집에 들어갈 때 누군가가 자기를 쫓아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데요.”
“뭐라고? 언제 들은 이야기야?”
“한 일주일 전쯤일 거예요.”
“뭐라고, 일주일 전쯤? 그때 은수가 한 이야길 좀 더 자세히 말해봐.”
“며칠 전부터 은수가 집에 올 때 누군가가 뒤에서 자기를 보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런데 뒤를 보면 아무도 없다고 했어요.”
“그래?”
“아, 참, 은수가 차를 양림동 공용주차장에 두는데, 언젠가 주차된 차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길래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데요.”
“아······!”
“은수는 누군가가 차 안에서 자기를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데요.”
“하아,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경찰에 도움을 청했어야 하는데······!”
“저도 당연히 그렇게 말했죠. 그런데 자기가 경찰인데 누구한테 말하냐면서······. 별일 아닌데 자기가 과민해서 그런 거라며 그냥 넘긴 거예요.”
“그 정도로 느꼈다면, 분명 누군가가 며칠 전부터 은수를 살피고 있었던 게 맞을 거야. 또 도움 될 만한 이야기는 없을까?”
“그게 전부에요.”
“그래, 고마워. 나도 계속 상황 살펴볼 테니까, 태호 너도 백방으로 찾아봐 줘.”
“네, 너무 불안해요.”
“나도 마찬가지야. 빨리 은수를 찾아야 할 텐데······.”
“그러게요······.”
“그리고, 지난번에 널 의심한 건 미안해! 그땐 나도 경황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어······.”
“아니요. 저라도 당연히 그런 생각했을 걸요, 뭐.”
“여하튼 내가 이렇게 열심히 찾는 건 은수와 다시 뭔가를 해보려고 그러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진 말고.”
“네, 지금은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죠. 이 변호사님이 이쪽 분야엔 전문가시니까 꼭 우리 은수 좀 찾아주세요.”
“그래, 노력해볼게.”
“참, 우리 생존팀에 너도 참여하면 좋겠는데······, 너도 은수한테 들어서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지?”
“네, 그래서 저도 고민 중이에요. ······은수를 찾으면 그땐 꼭 같이할게요.”
“그래, 고맙다.”
동주는 가슴이 더 답답해지고 말았다. 제발 납치가 아니길, 마음이 심란해 혼자 어딘가로 여행 떠났길 간절히 기도했었다. 다른 말 못 할 사정이 생겨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태호로부터 최근 은수가 겪은 이상한 느낌에 대해 듣고 보니, 계획된 납치가 분명함을 직감하게 됐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수연이 다가온다. 수수한 옷차림이지만 얼굴은 메이크업이 잘 되어 있어, 정원 조명등 아래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따라 숙녀처럼 우아한 분위기가 났다.
“오빠!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까 저녁 먹을 때 보니까 안색이 좋지 않던데······.”
“아! 어제 잠을 좀 설쳐서, 별문제 아니야.”
수연은 동주에게 더 다가와 얼굴을 그의 코앞까지 다다르게 들이밀었다. 그리곤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오빠!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오빤 거짓말 잘 못하잖아. 지금이 딱 그 모습인데······.”
“아, 아니야······.”
“오빠! 나에겐 편하게 말해도 돼. 실은 나도 알고 있어.”
“뭐, 뭘?”
“은수하고 전화통화 했거든. 오빠랑 헤어진 거 들었어.”
“아, 그거. 그래 얼마 되지 않았는데, ······실은 그렇게 됐어.”
수연은 동주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동주 어머니 장례식에 은수의 모습이 없는 게 이상했다. 그 전부터 둘이 만나는 게 뜸해진 것 같기도 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 은수에게 전화했다. 그리곤 넌지시 동주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은수는 수연이 눈치챈 듯해서 있는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한 사실을.
“오빠가 그래서 요즘 힘들어하는 것 같더라. 어머니 일도 있고······.”
“그러게. ······아포피스까지 온다고 하니까 사실 정신이 없긴 해!”
“은수랑 헤어지고 나서 다시 일 때문에 이렇게 만나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 오빠는 어때?”
수연은 동주의 마음이 궁금했다. 은수와 헤어진 걸 인정하고 새 출발을 하려 하는지, 아니면 아직도 은수를 잊지 못하는 건지.
“응, 처음에는 그랬는데, 우선은 살고 봐야 하니까 그냥 접어두기로 했어.”
아무래도 은수를 잊지 못하는 눈치다. 수연은 내심 아쉽고 서운했다.
“우리 이제 들어가 볼까?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텐데.”
동주는 우선 은수 걱정을 떨쳐내고, 생존계획 수립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의 아이디어와 추진력에 목숨을 맡기고 있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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