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생존팀 회의 (2)
아포칼립스 D-10, 2029. 4. 4. 밤.
장재건은 현기차 공장에서 배터리와 수전해 시스템을 매수한 후 곧바로 정령치 휴게소로 갔다. 신수경 사장이 장재건과 그 직원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곳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지대라, 평소에도 통행량이 많지 않다. 밤이 되면 길이 어둡고 미끄러워, 아예 차량의 발길이 뚝 끊기곤 한다. 그땐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떨어지길 기다리며 휴게소에서 대기했다.
신수경은 풍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다. 장재건 일행이 야근하는 걸 알고는 그들을 위해 저녁을 대접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드디어 해가 떨어졌다. 작업 시작이다. 터널 가운데쯤에 차량을 주차하고, 고소 작업대를 조작했다.
천장 부근까지 올라가 준비해간 드릴로 여러 개의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으로 내시경 검사기를 넣어 내부에 있는 구조체 이음새 부분을 찾았다.
터널 천정의 균열이나 지하수 누수는 모두 이런 이음새 부분에서 발생하기 마련. 이제 이음새를 따라 마치 균열이 크고 길게 발생한 것처럼 가짜 흔적을 만들어야 한다.
장재건은 전동 콘크리트 해머(속칭 뿌레카)에 일자형 날을 장착한 후, 천장 외벽에 충격을 가해 일부러 균열을 만들었다. 부서진 천장의 파편들이 터널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이왕 가짜 균열을 만드는 김에 마치 누수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보자!
신수경의 도움을 받아 천장에 물을 뿌려 균열 사이로 물이 들어가게끔 했다. 천장에서 떨어진 물 때문에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감쪽같다. 이 정도면 균열과 누수가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데는 성공이다.
신수경과 장재건은 남원경찰서와 시청에 전화해, 터널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신고했다. 이제 출동한 공무원이 위험한 상황임을 확인해주면 된다.
신고한 지 채 30분도 안 돼, 경찰차 2대와 남원시 공무 수행 차량이 정령치 터널에 도착했다.
약속대로 최창민 과장이 직접 교통과 경찰들을 데리고 현장에 왔다. 장재건 사장은 마치 터널을 지나가다 우연히 현장을 목격한 것처럼 능청맞게 둘러댔다.
출동 경찰은 전문지식이 없어, 드러난 모습만 보고는 사고 원인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주변을 둘러본 후 사진 몇 장을 찍고는 곧장 남원경찰서로 돌아갔다.
그리곤 남원시에 안전진단 결과가 나올 때까지 터널 폐쇄가 필요하다는 공문을 보냈다. 최창민이 은수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 * *
밤 9시 광주 동구 동명동 김정현의 집.
장재건 사장이 뒤늦게 도착했다.
“어떻게 일은 잘 진행됐습니까?”
동주는 장재건 사장을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
“이 변이 말한 그 최 과장이라는 분이 실제로 직접 왔어. 둘러보고는 막 위험하다며 빨리 조치하라고 지시하던데.”
“아, 다행이네요.”
“시청 공무원도 내일 바로 안전진단 업체를 섭외하겠다고 하더라고. 우리가 계획한 대로 일이 잘 풀린 것 같아.”
“고생 많으셨습니다.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아니야, 신 사장님이 저녁을 해주셨어. 요리 솜씨가 대단하던데, 아주 맛있었어.”
“아, 다행입니다. ······자! 그럼 계속 회의를 해볼까요.”
먼저, 생존 팀의 최대 인원에 대해 논의해보기로 했다.
3단 높이의 컨테이너 중 가운데 부분이 숙소 용도다. 총 15개 호실 중에서 공용으로 사용될 3개 실을 빼면 12개 호실이 남는다.
한 호실에 4명을 배정하면 총 48명인 셈이다. 나머지 30개 컨테이너가 생활 필수품이나 장비를 보관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계획은 잠정적이라 만일, 물품을 다 채우고도 여분의 컨테이너가 있으면 숙소로 개조해 더 많은 사람을 받을 수 있다. 다만, 물자를 확보하지 못한 지금으로서는 얼마나 남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그리고 하나의 호실에 4명이 아닌 더 많은 인원을 배정하면, 역시 수용 가능 인원이 늘어난다. 하지만, 사람이 늘수록 비축해야 할 생활 필수품도 대폭 증가하게 된다.
이런 필요 물자는 우리가 얼마나 오랜 기간 벙커에서 생존해야 하는지에 따라 그 양이 정해진다. 지금으로서는 얼마나 오래 생활해야 할지, 밖으로 나가면 생활 필수품, 특히 식량을 구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결국, 논의 끝에 수용 인원을 예정한 48명에서 더 늘리지 않고, 필요한 물품은 이 48명이 1년간 버틸 양을 확보하기로 했다.
다음은 팀원 당 데리고 올 수 있는 인원을 정하는 문제다.
누구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최대한 많이 데려오길 원한다. 하지만 이걸 무한정 허용하면 쉽게 최대 수용 인원을 넘기게 돼 생존 자체가 어려워지고 만다.
우선 팀원 당 자신을 포함해서 총 4명까지 데리고 올 수 있는 것으로 확정했다. 그 이상은 안 된다.
부녀 사이인 김정현 대표와 김수연 변호사, 형제간인 심원기, 심원주와 천상진, 천무용 그리고 동주와 동아를 따로 봐야 할지, 아니면 하나의 팀원으로 봐야 할지 문제 됐다.
만약 이들을 따로 본다면, 팀원이 벌써 13명으로 4명씩 꽉 채울 경우(52명=13×4) 이미 수용인원을 초과하게 된다.
참석한 이해당사자들 모두 말을 아꼈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라, 누구도 섣불리 자신의 의견을 밝히지 못했다.
동주는 이런 상황에 대비해 정리해둔 의견을 제시했다.
형제나 가족인 구성원들은 부득이 하나의 팀원으로 인정해, 그들을 포함해서 총 4명까지만 데리고 올 수 있다.
다만, 다른 팀원이 4명을 다 채우지 않았거나 사정상 결원이 생긴 경우, 이들이 가장 우선 그 여분의 자리를 배정받는다.
그리고 만일, 충분한 물자를 확보한 상황에서 여유 컨테이너가 생겨 사람을 더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때도 이들이 최우선으로 배정받을 수 있다.
최대한 이해관계를 절충한 셈이다. 참석자들 모두 동주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다음으로, 만약 생존 벙커가 알려지면 여러 세력이 이곳을 빼앗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 이때 우리 벙커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 논의했다.
먼저, 계엄군이 알면 곧바로 해산시키거나 빼앗을 게 분명하다. 기밀 유지가 중요하다. 만일, 폭동이 발생해 계엄군이 통제력을 상실하면, 전시와 같은 대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 야쿠자가 도시를 장악한 것처럼, 언젠가 이 지역도 폭력조직이 지배할지 모른다. 생존 벙커 정보가 언제, 누구의 귀에 들어갈지 알 수 없지만, 이런 각각의 위기 상황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두어야만 한다.
동주는 계엄군의 근황을 파악하고, 무기확보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일부러 동아의 남자친구인 최용석을 초대했다. 그는 광주, 전남 계엄군 주력부대인 제10보병사단 내 503보병여단, 3대대 소속으로 드론부대 소대장이다.
이 지역 계엄군 최고책임자인 사단장은 부대 지휘를 각 여단장에게 맡기고, 오래전에 서울 지역으로 올라갔다.
항간의 소문으로는 각 사단 장성과 그 가족들이 휴전선 부근 벙커시설로 대피했다고 한다. 후방에선 일부 여단장마저도 이미 대피해, 대대장급의 간부가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실정이다.
계엄군 내에서는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다. 그 때문에 위험을 무릎쓰고 가족이나 형제자매를 만나기 위해 탈영하는 군인마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게다가 박민우 대통령이 계엄군 쿠데타 세력에게 붙잡혀 있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계엄군이 와해되는 건 시간문제다.
최용석은 당장 우리가 무기를 확보할 순 없지만, 계엄군이 해체된다면 뜻을 같이하는 동료와 함께 전투 드론을 가지고 지리산 벙커로 오겠다고 말했다.
그가 이끄는 드론부대는 최첨단 장비를 갖춘 특수부대로 공중전 수행이 가능하다. 그래서 계엄군 내의 여러 파벌이 호시탐탐 그 지휘권을 노리고 있었다.
정령치 터널 자체가 해발 1,000m 이상 높이에 있고, 주위에 컨테이너를 성벽처럼 쌓기 때문에 방어하기에 수월하다. 공격용 드론과 기관총 정도만 확보하면, 어떤 적이 쳐들어와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생존 물품에 관한 이야기다.
옷가지나 이불, 생활필수품들은 각자가 최대한 준비하면 된다. 계엄군이 통제하고 있는 식료품을 제외한 공산품은 다행히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매트리스, 가전제품, 조리도구, 가재도구, 공구 등은 이미 주문을 마치고 배송 중이다.
심원주는 현기차 광주공장에 납품하는 회사를 소개하며, 그쪽을 뚫으면 대량의 식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축산업 관련 업체를 몇 개 확보해 소, 돼지, 닭고기를 최대한 확보하고, 이를 훈제 방식으로 건조 가공하기로 했다.
콩나물이나 숙주나물, 알팔파 등은 햇빛이 없어도 기를 수 있다. 브로콜리, 겨자, 크레스, 메밀과 같은 새싹 채소는 암실에서 발아시킨 후 온실에서 인공 빛을 쪼여 재배하면 된다.
수경재배와 정밀한 인공광 기술을 이용하면, 심지어 상추, 고추, 토마토, 치커리와 같은 일반 채소까지도 생산할 수 있다. 생존팀은 컨테이너 몇 개에 이런 온실을 설치하기로 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채소 생산은 오승현 교수의 아내 김순미가 맡는다. 그녀는 한빛대학 응용식물학과 교수다. 이 분야에선 이 지역 최고 전문가인 셈이다.
문제는 보관이 쉽고 유통기한이 긴 쌀과 같은 곡식, 시리얼, 건조식품, 통조림과 같은 식료품을 대량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김정현 대표는 인맥을 총동원해 이런 식료품을 구해보려 했다. 그런데 계엄 상황이라 물품을 쥐고 있는 그 누구도 모험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계엄군 감시를 피하거나 모험을 감수할 유통업체를 뚫어야 한다는 결론인데, 그건 서강파 쪽 물류뿐이었다. 난감한 상황이다. 이 부분은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계속 논의해야만 한다.
앞으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 단체 카톡방을 개설해, 언제 어디서든 서로 연락할 수 있도록 했다. 통신이 끊길 경우를 대비해 휴대용 무전기도 준비해야 한다.
열띤 토론이 계속되다 보니 벌써 자정 무렵, 다들 피곤한 기색이다. 혼돈과 약탈의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세부 일정을 짜고, 각자의 역할을 나눈 후 회의를 마쳤다.
이제 남은 건 9일, 우리의 목숨은 그 동안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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