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포커 게임 (2)
아포칼립스 D-9, 2029. 4. 5. 밤, 조선호텔 도박장.
상진은 쓰디쓴 블랙커피 한잔을 거의 원샷 하듯이 입안에 퍼부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다. 광주의 자존심, 내 도박 인생이 달린 게임이다.
저 말쑥한 놈은 아무리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 지역 놈도 아니고,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 모르지만, 프로의 냄새가 펄펄 난다.
도박 인생 마지막에 진짜배기 승부를 해보는 거다. 저놈을 넘어서야 진정한 도박사지! 그동안 이 지역에서 맹주로 군림했지만, 여기서 지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거다.
이제 우물을 벗어나 전국구로 나설 실력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상진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테이블에 앉았다.
판이 계속 돌았다. 상진은 이제 종전보다 훨씬 신중해졌다. 기회가 올 때까지 한껏 움츠렸다. 더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큰 판이 벌어지면 그곳에서 단번에 승부를 내야 한다. 그리고 과감히 털고 일어설 생각이다. 너무 욕심낼 게 아니다. 결코, 만만한 녀석들이 아니니.
드디어 때가 왔다.
상진이 A 카드 3장을 받았다. 풀하우스만 만들면 천하무적이다. 은근슬쩍 판돈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른 선수들도 덩달아 풀베팅 중이다. 모두 좋은 패들이 든 게다. 특히 지난 판과 같이 더벅머리와 말쑥한 친구 모두 바닥 패가 심상치 않다.
6구에 상진은 바닥패가 A, 3, J, 3으로 A 탑 풀하우스 메이드다. 더벅머리는 10, 7, J, 7 풀하우스 패다. 말쑥한 녀석은 ♠ 5, ♠ 8, ♠ 9, ♣ 9 카드로 플러쉬와 풀하우스를 모두 노릴 수 있는 패다.
그래도 상진이 쥐고 있는 A 풀하우스가 무적이라 확률상 워낙 유리한 고지다. 말쑥한 녀석이 ‘삥’을 하자 상진은 풀베팅 했다.
더먹머리도 풀베팅이다. 말쑥한 녀석은 콜로 따라붙는다. 모두 콜, 판돈이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이미 5억 원이 넘는다. 드디어 히든이다.
상진은 역시 히든을 보지 않고 상대를 살폈다. 말쑥한 녀석은 테이블에 놓인 히든 카드 끝만 살짝 살피고는 패를 그대로 내려놓는다. 더벅머리는 상진처럼 아예 패를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패만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바닥 패가 9 원 페어로 가장 높은 말쑥한 녀석이 먼저 ‘삥’을 던졌다.
지난번 큰 판에서 상진이 들고 있던 패와 유사하다. 9 원 페어로 바닥 패가 가장 높아 맨 먼저 베팅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삥’을 한 것까지도 똑같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알 수 없는 형국이다. 더벅머리는 한참 고민하더니 하프 배팅을 했다.
모험을 할 수밖에 없다. 상진이 과감하게 풀베팅을 했다. 이제 차례는 말쑥한 녀석. 상진은 은근히 콜이나 풀베팅 해주길 바랐다. 녀석에게 복수할 수 있는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오늘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녀석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포착했다. 다시 패를 바라본다. 뭔가 어색하다. 블러핑을 할 상황은 아닌데!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초조하게 그의 액션을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역시! 양팔을 벌려 옆에 잔뜩 쌓여 있던 칩을 모조리 밀어 넣으며 ‘올인’을 외친다. 어림잡아도 15억 원 이상을 밀어 넣은 것이다.
아! 뭘까? 설마 블러핑일까? 방금 분명 자신 없는 기운이 느껴졌는데······.
상진에게도 빌린 돈 10억 원가량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소소한 판을 몇 번 이겼기에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아! 이걸 남겨두고 후일을 기약해야 하나?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텐데. A 풀하우스 아닌가?
확률상 이번 판에 모든 걸 거는 게 좋다. 지금껏 바닥이나 죽은 패에 나머지 ♠ A 카드가 나온 적도 없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남겨둔 히든 패를 들어 올렸다.
엄지에 한껏 힘이 들어갔다. 손에는 송글송글 땀이 배기 시작했다. 제발! 더는 가슴 졸이지 않게 ♠ A 카드가 나와주길!
삐쭉 나온 검은 무늬가 보인다. 아, 제발! 엄지를 눌러 앞 카드를 조금 더 내렸다. 뾰족 나온 검은 점이 양 갈래 선으로 펼쳐진다. 분명 ♠ A 카드다. 무려 A 포카드!
아! 신이 날 돕는구나. 광주에서 벌어지는 판, 역시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먹고 들어간다는 말이 맞아!
이렇게 운대가 맞을 줄이야. 상진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판돈을 모두 밀고 ‘올인’을 외쳤다.
더벅머리 역시 더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올인’으로 맞짱을 튼다.
먼저 더벅머리가 패를 깠다. J 풀하우스(J, J, J, 7, 7)다. 의기양양한 표정이다. 상진이 3 풀하우스라고 생각한 듯하다.
상진은 쥐고 있는 패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맨 처음 ♥ A 카드를 내놓자, 더벅머리는 깜짝 놀라 당황하는 표정이다.
또 ♣ A를 내려놓았다. A 풀하우스다. 상진은 말쑥한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미동이 없다.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상진이 남은 한 장의 패를 까지 않고 있자, 그제야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상진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한 장이 뭔지 궁금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독한 놈!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놈이다.
그래 보여주마! 너희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패였음을. 상진이 마지막 ♠ A를 내려놓자,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와’하고 환호성을 쳤다. 에이스 포카드다.
무적의 패가 아닌가? 상진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의 환호에 화답이라도 하듯 한 손을 들어 보이며 승리를 자신했다.
더벅머리는 없는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인데 반해, 어쩐 일인지 말쑥한 녀석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쉐에엑’하고 지나갔다. 냉기가 쑥 올라오며 서늘한 기운이 머리끝에서 맴돈다.
뭘까, 이 느낌은? 바닥 패를 봤다. ♠ 5, ♠ 8, ♠ 9, ♣ 9 카드다. 5, 8, 9 어느 포카드가 나와도 이미 승부는 정해졌다. 모양이 같은 플러쉬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걱정되는 건 더벅머리가 7 카드를 두 장이나 가지고 있는데, 하필 하트와 다이아몬드다. 스페이드였다면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다.
설마 스트레이트 플러쉬(카드 다섯 장의 무늬가 같고, 숫자가 연달아 있는 패)?
녀석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히든 패를 들어 손에 쥔 패와 합치고는, 조심스럽게 패를 까기 시작했다.
먼저 ♠ 10이다. 소름이 쫙 끼쳤다. 녀석의 눈빛에 어떤 흔들림도 없다. 마치 신선과 포커를 치고 있는 느낌이다. 세상 일에 달관한 듯한 표정이었다.
현재 ♠ 8, ♠ 9, ♠ 10 카드가 연번이다. ♠ 6, ♠ 7 또는 ♠ 7, ♠ J 카드가 나오면 스트레이트 플러쉬로 포카드보다 더 높은 패다.
앞에 죽은 패들을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 6, ♠ 7, ♠ J 카드는 기억나지 않았다. 유독 스페이드가 보이지 않은 판이었다.
제발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아니길! 말쑥한 녀석이 다시 카드 한 장을 공개했다. ♠ 6이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나오는 게 아니야?”
“설마 그게 나오겠냐?”
구경꾼들이 저마다 한소리씩 하고 있다.
상진은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 7이나 ♠ J 카드가 나온 것보다는 확률이 확 떨어진 셈이다.
이제 ♠ 7 카드만 나오지 않으면 승리는 나의 것이다.
포커꾼들은 지금 상황을 ‘단 구멍’이라고 표현한다. 오로지 ♠ 7 카드 아니고는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나올 확률은 너무도 희박하다. 도박사의 경험상 신이 장난을 치지 않고서는 이런 ‘단 구멍’을 히든에 뚫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토록 무표정이었던 이 녀석이 갑자기 상진을 노려본다.
아! 뭔가 기분 나쁜 눈빛이다. 어쩐지 ‘덤빌 곳을 잘못 찾았어, 넌 이제 파산이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상진은 기도하는 마음이다.
제발! ♠ 7 카드만 아니길!
파란만장한 도박 인생,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나와 져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패를 쥐고 이긴 적은 한 차례 있었지만, 이렇게 큰 판은 아니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0.03% 확률로 날마다 포커를 친다 해도, 실제 도박판에선 평생 한 번 쥐어보기 어려운 패다.
긴장된 순간, 상진의 모든 인생이 이 카드 한 장을 향해 달려온 듯하다.
천천히 말쑥한 녀석의 손에서 마지막 패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위는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숨소리조차 멈춘 고요함 그 자체다.
녀석의 하얀 손에서 카드 뒷장이 뒤집어지며 패가 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치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녀석의 팔꿈치, 손목의 스냅과 손가락의 움직임까지 그 생생한 동작 하나, 하나가 드러났다.
아! 검은색이다.
이럴 수가, 아! 삐죽한 모양의 스페이드가 분명하다. 주위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놀래 숨이 멎을 것만 같다. 아! 이럴 수가, 진짜 ♠ 7 카드다.
이렇게 큰 판에서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그것도 에이스 포카드를 누르는 진풍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막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패를 보려고 안달이다. 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지만, 상진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세상에 히든에서 ♠ 7 카드가 떴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야!
뭔가 사기에 걸린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상진은 그 순간 온몸이 얼어버렸다. 생각이 멎고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뭔가 크게 당했는데,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꼬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마치 큰 덫에라도 걸린 듯 몸부림치고 싶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말쑥한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마치 늘 하던 일을 마치고 퇴근하기 위해 짐을 싸는 직장인 마냥 여유롭고 가벼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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