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배신 (2)
아포칼립스 D-8, 2029. 4. 6.(금) 밤, 광주지방검찰청 714호 검사실.
천무용은 불안한 듯 검사실을 빙빙 돌며 생각에 잠겨 있다. 김 주임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하고 있는 동주. 정보를 얻으려 외근 나간 박 계장이 천 검사에게 전화했다.
어제 조선호텔 도박장에서 수십억대 도박판이 벌어졌고, 그 판에 상진이 끼어 있던 게 사실이다.
게다가 상진이 전 재산을 날리고 사채까지 써, 마지막엔 사채업자와 호텔을 나가는 걸 본 사람이 있었다. 그 뒤로 휴대폰이 꺼지고 현재까지 거의 만 하루 종적을 알 수 없는 상태다.
드론 회사에 연락하니, 오늘 상진의 드론 면허를 승계하고, 보증금을 처분하겠다는 전화가 있었다. 본인이 직접 오지 않으면 어렵다고 알려주자, 그 뒤로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상진의 휴대폰 신호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건 조선호텔 부근이다. 상진을 끌고 가면서 휴대폰을 빼앗아 끈 것 같다. 남수혁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동주도 착잡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서강파 애들이 잔인한 건 알았지만, 이렇게 계략까지 써가며 궁지로 모는 치밀한 녀석들인 줄은 미처 몰랐다.
분명 최근까지도 상진이 천 검사의 동생인 걸 아무도 몰랐는데, 어떻게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아무래도 강대주가 의심스럽다.
상진이 천 검사의 동생인 사실은 서강파에서 강대주와 오기철만 알 뿐이다. 그들도 며칠 전 상진과 술자리를 가지며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남수혁도 알고 있다면, 이들이 흘리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무용도 강대주에게 속은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형님! 강대주가 배신했다면, 직접 형님과 담판을 벌이지 않았을까요?”
“······!”
“이번에 형님 덕에 큰 공을 세웠잖아요. 내부 첩자까지 밝혀냈으니. 게다가 새벽에 물자도 제공한 걸 봐서는 아무래도 이상해요. 남수혁과는 앙숙 관계인 것도 그렇고.”
*
천무용은 어젯밤 강대주와 담판을 벌일 때, 그가 서강파를 배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확인했다.
강대주는 서강파의 검은돈을 세탁하면서 자기 주머니를 톡톡히 챙겼다. 지금까지 30억 원가량을 빼돌려 마카오에 있는 비밀 계좌에 예치해 놓았다.
그런데 남수혁 쪽에서 어떻게 된 건지 이를 알아챈 눈치다. 계속 뒷조사하고 있었다.
목줄이 잡히기 일보 직전이다. 그래서 서둘러 가족들을 데리고 마카오로 간 후 제3국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국내에 있는 재산을 은밀히 정리했다. 위조 여권을 만든 후 비행기표도 구했다. 이제 야반도주만 하면 된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가?
갑자기 아포피스가 등장했다. 며칠 뒤에 거대한 소행성이 떨어진다고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마카오로 간들, 또 거기에서 다시 어디로 간들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됐다.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어떻게든 남수혁의 뒷조사를 무마하고, 무등산 벙커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그런데, 이게 웬 떡이야? 복덩이 천상진이 제 발로 기어들어 와 생존계획을 술술 말하고, 거기다 천 검사의 동생이라니, 하늘이 돕는 느낌이다.
무등산 벙커가 유일한 살길이 아니었다. 상진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은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이미 눈치를 챈 남수혁의 손아귀는 결국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기오성도 그의 자금 횡령 사실을 알게 될 게 뻔하다.
아포피스가 떨어지면 나 같은 자금세탁이나, 돈 관리하는 녀석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멸망한 세상에서 돈이 무슨 소용이고, 사업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힘쓰고 폭력에 의존하는 남수혁 같은 놈이 가장 쓸모 있겠지.
남수혁의 세상이 바로 코앞인데, 그놈은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놈이다. 늘 머리만 쓰며 거저먹는 놈이라고, 내 뒷담화를 어찌나 해대던지 조직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무리 머리를 짜봐도 서강파에 남아서는 살 방법이 없다. 소행성 충돌에서 살아남아도 기오성이나 남수혁의 칼에 맞아 죽을 게 뻔하다.
그런데 천상진이 천무용의 동생이라니. 게다가 이미 생존 벙커를 만들고 있고, 대지진에도 견디는 그야말로 요새이니 더욱 탐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대주는 서강파를 배신하기로 작정하고, 천상진에게 천 검사와의 자리를 부탁한 것이다.
강대주는 천무용이 요구하는 모든 일에 협조하는 대신, 가족과 오기철을 생존 팀에 합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천무용과 동주는 이런 사정을 다 확인한 후 강대주를 믿을 수 있다고 보고 담판을 매듭지은 것이다.
강대주가 천무용이 요구하는 역할을 하려면 기오성으로부터 확실한 신뢰를 얻고, 남수혁을 낙마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천무용이 이미 쓰임새를 다한 서강파 내 첩자 유승민을 강대주에게 알려주고, 새벽에 그에 대한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마치 야반도주한 것처럼 꾸미고 실은 검찰 내 안가에 숨겨둔 것이다.
강대주는 천무용 덕에 서강파 내 첩자가 남수혁의 수하인 유승민임을 알게 됐고, 바로 오늘 아침 기오성에게 이를 알렸다. 기오성이 남수혁을 버리거나, 더는 신뢰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역시 기오성은 남수혁을 아꼈다.
지금껏 무수한 사고를 치고, 그 부하들이 일 처리를 못해 검찰에 끌려가 그 갖은 수모를 겪었어도, 심지어 정길수 살인사건으로 천 검사에게 목줄까지 잡힌 상황인데도 남수혁을 버리지 않았다.
역시 기오성은 남수혁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자기를 대신해 칼질할 무사가 필요한 거다. 아무리 칼이 부러지고, 날이 무뎌져도 쉽게 버릴 수는 없는 법.
강대주는 진상두, 전두만, 정길수 살인사건의 명백한 물증만 찾으면, 그걸 가지고 천 검사에게 투항할 작정이었다.
*
“그래서 나도 고민이야. 이 녀석이 배신하진 않은 것 같은데, 과연 진짜 믿을 수 있는 건지?”
천무용은 강대주에게 직접 물을 수도 있었으나 그를 믿을 수 없어, 우선 박 계장을 시켜 상진이 진짜 도박에 참여한 건지 확인했다.
“형님, 더 고민해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강대주와 직접 통화해 보시죠.”
“그러는 게 낫겠지?”
천무용은 바로 강대주에게 전화했다. 스피커 기능으로 동주도 대화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어허, 이렇게 약속도 없이 아무 때나 전화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위험하게시리.”
강대주가 거드름을 피우며 전화를 받았다.
“급해서 그래. 혹시 날 배신한 거 아니야?”
천무용은 강대주를 떠보기 위해 거침없이 직진했다.
“네? 무슨 소립니까! 제가 무슨 배신을?”
“상진이 말이야, 소식 몰라?”
“천상진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혹시 최근에 통화한 적 있어?”
“야, 기철아! 너 상진이랑 오늘 통화한 적 있어?
······오늘은 통화 안 했다는데요. 상진이가 어젯밤에 전화했답니다. 도박장에 새로운 애들이 많다며, 뭐 아는 게 있냐고요.”
“그래서?”
“아시다시피 어제 검사님이랑 같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기철이도 모른다고 그랬다는데요.
아 참! 어제 우리 없는 사이에 큰 판이 벌어졌는데, 상진이가 거기 끼었다고는 들었어요. 돈을 좀 많이 잃은 것 같던데, 상진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서강파 내부에서 그 도박 관련해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전혀요.”
“아무래도 사기도박 같은데, 어제 너희들이 그 판 짠 거 아니야?”
“네? 아니에요. 어제 서울 놈들이 왔다는 소리만 들었지, 저나 기철이는 전혀 모르는 얘들이에요.”
강대주는 확실히 모르는 눈치다. 옆에 있는 오기철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된 걸까?
“남수혁이 상진일 데리고 있어.”
“네? 진짜요?”
“남수혁이 어떻게 상진이가 내 동생인 걸 알게 됐을까?”
천무용은 강대주의 반응을 보고자 물었다.
“글쎄요!”
“난 자네와 오기철만 알고 있는 줄 아는데.”
“저흰 진짜로 누구에게도 말 한 적 없어요. 제가 기철이한테도 신신당부했고요. 야, 기철아! 너 솔직히 상진이 이야기 누구한테 한 적 있어? ······없답니다, 진짜로.”
“그런데 어떻게 남수혁이 아냐고? 거기다 치밀하게 덫까지 놔서 상진일 붙잡은 것 같은데.”
“저한테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셔야, 저도 상황 파악을 할 거 아닙니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천무용은 남수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모두 강대주에게 전해주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강대주는 오전에 남수혁이 기오성과 독대하면서, 은밀하게 한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었음을 직감했다. 조직에서는 오직 기오성과 남수혁만 아는 이야기다.
“제가 조심스럽게 찾아보긴 할 텐데,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상진일 찾는단 걸 알면, 금방 변절한 게 드러나는 꼴이라.”
“음, 여하튼 분위기 좀 잘 살펴봐 줘. 혹시 중요한 정보라도 얻으면 바로 알려주고.”
“물론이죠.”
동주와 무용은 난감했다. 강대주도, 오기철도 이 상황에선 별 도움이 안 된다. 강대주가 아니라면, 어떻게 남수혁이 동생인 걸 알았을까? 상진이 그것만은 떠벌리고 다닐 녀석이 아닌데.
기분 나쁜 예감이 스쳐 갔다. 이번 생존 벙커에 참여한 사람들은 발대식에서 소개한 적이 있어 상진이 천 검사의 동생인 걸 안다.
혹시 이들 중 누군가가 서강파에게 정보를 흘린 게 아닐까? 불안이 엄습해온다. 이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형국이다.
강대주가 광양 컨테이너 업자를 통해 우리 벙커 계획을 쉽게 알아챈 것처럼, 정령치 생존 벙커도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듯하다.
생존을 위해 배신이 난무하고 있다. 무서운 세상, 드디어 약육강식의 시대가 눈을 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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