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수사 종결
아포칼립스 D-8, 2029. 4. 6.(금) 밤, 광주지방검찰청 714호 검사실.
때마침 천무용의 휴대폰에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 소리가 들렸다.
사진 하나가 전송됐다. 천상진이 발가벗긴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이다. 두 손과 발은 모두 침대 기둥에 묶여 있다.
침대 옆에 수술 가방과 수술 도구들이 보인다. 띠리링, 다시 알림 소리가 들리고 문자메시지가 떴다.
[ 오늘 밤 자정까지 답을 알려주지 않으면, 수술 들어간다. 서둘러야 할 거야. ]
“으윽, 이 개자식들!”
무용은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동주도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급하게 몰아붙일 줄이야!
자정까지는 이제 채 3시간도 남지 않았다. 녀석들이 답을 달라고 하는 건 사건을 모두 무혐의로 정리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진을 죽이고, 장기는 해외로 팔아버리겠다는 거다.
이 문자는 대포폰을 이용해 보낸 것일 거다. 발신지 위치추적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해본들 성과가 있을 리도 만무하다. 지금은 가부 간의 결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형님, 상진이 목숨이 달렸어요. 제발 이번만은 형님이 양보하시죠?”
“너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내 손으로 서강파 애들 면죄부를 주라는 말이야? 나보고 무혐의 처분하라고?”
“형님, 아시잖아요. 검사가 무혐의 처분한다고 해서 그게 바로 면죄부 주는 게 아니라는 거.”
“그래도, 안 돼.”
“뭐, 일사부재리니 꼭 그런 게 아니니까, 나중에 기회 생기면 그때 새로운 증거 나왔다며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요.”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걔들하고 타협할 순 없어. 그것도 가족 문제로 협박받아서 무릎 꿇는다는 건, 내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천무용의 의지는 완강하다.
“형님! 우선 시간이라도 벌어야 하니까, 무조건 오케이 하세요. 내일 기회 봐서 뒤집을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현실적으로 접근해야지, 지금 상황에서 명분이나 논리 따질 때가 아니에요.”
“넌 몰라서 그래. 애들에게 한번 목줄 잡히면 평생 끌려다녀야 한다고. 애들이 상진이를 풀어준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니야. 이번 일 가지고 계속 우려먹으려고 할걸.”
“······.”
“그리고 이 자식들 말로만 이렇게 협박하고, 실제는 실행하지 못할 거야. 그랬다간 진짜 이제 전면전인데.
지들이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해도, 검사 가족을 건들면 그 뒤는 끝이라는 것 정도는 알 거야.”
“형님, 그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건 다 추측일 뿐이잖아요. 만에 하나 진짜 쟤들이 실행이라도 해버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정말 이건 도박이라고요. 상진이 목숨 가지고 하는 도박!”
“아무래도 안 돼. 난 그럴 수 없어.”
천무용은 강직한 성격 탓에 유연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검사는 지금까지 나온 증거로 유죄 입증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부득이 증거불충분 무혐의 처분을 할 수 있다.
이런 검사의 불기소처분은 법원에서 한 무죄판결과 같이 기판력이 있는 게 아니다. 기판력은 그 범죄에 대해서 다시 심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와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증거가 나오거나 유력한 목격자가 나오면 언제든지 수사를 재개할 수 있고, 그 자체가 위법한 게 아니다.
물론 한번 무혐의 처분한 사건을 다시 기소하는 게 어려운 건 사실이다. 평소보다 훨씬 강한 입증을 해야 하고, 기존의 무혐의 처분 이유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을 만한 유력한 증거가 필요하다.
지금은 아무래도 전두만, 진상두 실종 건을 살인사건으로 전환해 기오성을 기소하기엔 증거가 턱없이 부족하다.
해양경찰은 이미 시체 발견 조사를 포기하고 철수한 상태다. 시체가 버려진 지 벌써 한 달가량 지나 해류에 떠밀려 간 걸 지금 찾을 방법이 없다.
설령, 시체에 돌을 매달아 가라앉게 했더라도, 해류가 심해 바닥에 가라앉은 시체가 이미 움직여 이동했을 수 있다. 게다가 워낙 수심이 깊고 시야가 흐려 잠수부가 넓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시체를 찾는 건 너무도 어렵다.
기선호 선주도 부산에서 휴대폰 신호가 끊어진 이후로 일주일 이상 전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진 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 하나 나오지 않은 상태다.
검사장과 약속한 한 달 이내에 이들에 대한 조사를 마쳐 기소하는 건 아무래도 어려워 보였다.
게다가 앞으로 일주일 뒤면 대재앙으로 혼돈에 빠지거나 모두 죽을 수 있는데, 더 이상 맥 빠지는 수사에 전념하느니 우선 생존부터 챙기는 게 어떻겠냐고 설득했다.
분명 천무용이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검사 생활 10년 동안 가져온 자신의 원칙을 한순간에 포기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 이제 자정을 코앞에 두고 있다.
동주는 은수를 납치해간 게 서강파 정마리아와 남수혁이라고 확신했다. 정길수의 보이스펜에 분명 살인사건의 상황이 모두 녹음되어 있었을 것이다. 은수가 녹음된 내용을 들은 게 분명하다.
북부경찰서 정보원을 통해 이 사실을 안 서강파에서 사건을 무마하고 증거를 없애려고 은수를 납치하고, 증거물을 바꿔치기해 펜을 확보했을 것이다.
이번 서강파에게 무혐의 처분을 하면서 상진뿐만 아니라 은수도 넘겨달라고 해야 한다.
“형, 이제 결단 내려야 해. 검사장이나 차장검사까지도 종결하라고 한다면서, 눈 딱 감고 도장 찍어, 응?”
“음······.”
“내가 직접 가서 협상할 테니까, 형은 우선 문자로 조건을 협의해보자고만 제의하세요. 그리고 상진이 안전을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고.”
“네가 직접 가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저 녀석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어떻게든지 형한테서 벗어나려는 거야. 얼마나 간절하면 이렇게까지 하겠어요.
형 말처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야. 우리가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해서 받아낼 건 다 받아내자고.”
“음······.”
“이번 아포피스 일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그 이후에 고민해도 돼요. 우린 지금 상진이와 은수를 찾는 데 집중하게요.”
마침내 동주는 무용을 설득해냈다. 먼저 상대의 대포폰에 문자를 보냈다. 간단히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만 했다.
곧바로 상대에게서 문자가 왔다. 세부 협상을 위해 만나자고 한다. 무용은 상진의 친구인 동주가 대신 나간다고 알렸다. 약속은 다음 날 오전 9시.
* * *
아포칼립스 D-7, 2029. 4. 7. (토) 아침, 광주 동구 문흥동 르네상스호텔 1층 커피숍.
동주는 홀로 남수혁을 만났다. 초면인데도 왠지 낯설지 않은 이들의 모습.
남수혁의 이력에 대해서는 수사기록을 통해 충분히 확인했다. 그가 은수를 데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맘 같아서는 당장 이 녀석과 한 판 붙고 싶다. 은수가 어딨느냐고 곧바로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다.
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문을 해서라도 은수의 행방을 찾고 싶다. 이런 때 법은 너무도 느리고 적절한 수단이 아님을 또 한 번 절감하게 된다.
남수혁의 저 비열한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게 고역이다. 저 녀석과 말을 섞어야 한다니. 저놈이 그간 저지른 만행들을 생각해 보면 치가 떨린다. 정길수도 저놈이 때려죽인 게 분명하다.
진상두, 전두만도 다 저놈의 손을 거쳐 이제 먼 바닷속 어딘가를 떠밀려 가고 있지 않은가? 남수혁과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까? 상진이 이 녀석은 도대체 어쩌다 저런 작자에게 잡혀 있는 건지?
우선 상진의 신변 안전을 확인해야 한다. 녀석은 지금 어딘가에 갇혀 고통받고 있다. 은수와 같이 있으면 어떤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 텐데.
“상진이 어디 있어요?”
동주가 눈을 부라리며 남수혁을 응시하고 있다.
“전 사채업자들이 상진일 데리고 있는 것만 알지, 어디에 있는진 모릅니다.”
“잘 아시면서, 시치미 떼기는?”
“그나저나 천 검사가 무혐의 종결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부터 확실히 합시다.”
“우선 상진이부터 돌려보내 주시죠.”
“하하, 상진일 먼저 보냈다가, 만약 천 검사님이 약속을 안 지키면 우린 어떻게 되죠? 어제 분명 동시에 하자고 했는데······.”
“동시에 할 게 있죠, 어떻게 사람 목숨 가지고 그렇게 장난칠 수 있습니까?”
“무슨 소리에요? 상진인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데, 오해에요, 오해!”
뻔뻔한 남수혁의 태도에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북부서 송 팀장은 어디에 가두고 있어요?”
“무, 무슨 소릴?”
“모를 줄 알았죠? 그 보이스펜!”
“뭐, 뭐요?”
동주는 보이스펜을 바꿔치기한 게 정마리아와 남수혁의 짓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걸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 남수혁의 허를 찌르기로 했다.
“녹음 되어 있던 거 다 들었어요.”
동주는 은수가 보이스펜에 있던 녹음파일을 분명 어딘가에 따로 보관했을 것으로 보고, 마치 그것이 남아 있어 확인한 것처럼 남수혁을 속여볼 참이다.
“네, 뭐라고요?”
남수혁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목숨이 달린 증거물 아니던가?
정마리아가 깔끔하게 처리했다고 해서 걱정을 던져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 파일이 남아 있다니, 지금껏 고생해서 한 짓이 모두 물거품이 된 게 아닌가!
“남수혁 씨, 송 팀장 돌려보내 주면 그 파일도 깨끗이 없애 드릴게요.”
남수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 상진이랑 무혐의 문제부터 빨리 처리하시죠.”
걸려들었다. 녀석이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다. 은수는 녀석들이 데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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