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귀환
아포칼립스 D-7, 2029. 4. 7.(토) 오전, 르네상스 호텔 커피숍.
남수혁이 얼버무리긴 했어도, 자신이 은수를 데리고 있는 걸 시인한 셈이다. 은수와 녹음파일을 교환하자는 동주의 제안엔 즉답을 피했다. 정마리아에게 물어서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다.
정길수 사건까지, 그것도 보이스펜 녹음파일까지 이야기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남수혁은 극도로 당황하고 말았다.
동주는 남수혁을 더 몰아붙이면 얻을 게 많다고 판단했다.
은수를 돌려보내 주면 파일도 없애고, 정길수 살인사건도 무혐의 종결하겠다고까지 제의했다. 남수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선 동주와의 대화를 피하며, 전화 한 통화 하겠다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수혁은 커피숍 밖으로 나가 정마리아에게 전화했다.
“뭐라고? 보이스펜을 알고 있다고?”
정마리아 역시 놀래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다니까요. 저 변호사 말이 자기가 녹음내용까지 들었다는 거예요.”
“음······, 이상해. 내가 듣기로 송 팀장은 다음날 연가 내고 출근 안 했단 말이야. 그 파일 내용을 아는 사람은 분명히 더는 없어.”
“그렇죠. 나도 분명 그렇게 들었는데.”
“보이스펜은 확실히 수거했고, 파일은 저장한 걸 깨끗이 지웠다고. 포렌식 해도 안 나오게 장비를 써서 확실히 지웠다고 들었어.”
“그렇죠.”
“이상해, 아무래도 그 녀석 거짓말하는 것 같아. 널 떠보려고 한 말인데, 네가 제대로 걸린 것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제가, 어이구 이 바보 같은 놈! 여사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 녀석 분명히 파일 없을 거야. 지금 한창 찾는 중이겠지. 그 파일이 있었으면, 이미 천 검사가 우릴 치고 들어오지 않았겠어?”
“아, 그렇네!”
“송 팀장은 돌려보낼 수 없어. 그 파일 내용을 들은 사람인데, 살려 보낼 수야 없지.”
“아, 물론이죠.”
“그 여우 같은 놈하고 말 길게 하지 말고, 상진이 살리고 싶으면 빨리 무혐의 처분하라고 그래.”
“네, 여사님!”
“그리고, 정길수 건은 알아서 하라고 그러고. 파일이 있으면 알아서 써먹으라고 말해. 알았지?”
“네. 어떤 말씀인지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남수혁은 다시 커피숍으로 돌아왔다. 한결 차분해지고 자신감이 생긴 표정이다.
“상진일 데려 가고 싶은 건 맞아요?”
“무슨 소립니까?”
“우린 전두만, 진상두 사건만 무혐의 처분받으면 되는데, 왜 갑자기 다른 사건 이야기 하면서 판을 깨려 하냐고요.”
남수혁이 자신만만한 투로 오히려 동주를 다그치려 한다.
“음······, 정마리아와 통화하고 오신 거죠?”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솔직히 말하세요. 어떻게 지시하던가요?”
남수혁은 깜짝 놀랐다. 이놈이 마치 옆에서 엿듣기라도 한 것처럼 통화 상대까지 꼭 집어내는 걸 보고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무슨 말인지. 아무튼 딴소리하지 말고, 무혐의 처분이나 어떻게 할 건지 말해봐요. 정길수 건은 알아서 하시고, 우린 모르는 일이니까.”
“아, 정말 이러깁니까? 송 팀장 데리고 있는 거 뻔히 아는데. 우린 송 팀장 돌려보내 주지 않으면 더 할 이야기 없어요.”
동주는 상황이 바뀐 걸 눈치채고 더 강공을 펼치고 있다.
“하하, 그래요? 알아서 하시던가. 내가 여기서 맨입으로 나가면, 상진이 목숨은 나도 책임질 수 없는데······.”
으윽! 이놈이 우리에게 녹음파일이 없다는 걸 아는 눈치다.
은수가 녹음내용을 알고 있어, 그녀를 돌려보내 주는 건 자신의 목숨을 넘기는 것과 다름없다. 거기다 경찰 간부 납치까지 문제 되니 더더욱 순순히 돌려줄 수 없을 거다.
이대로 협상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그랬다간 상진의 목숨이 위태롭다. 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우선 상진이부터 구하자. 은수는 녀석들에게 있다는 정도만 알아도 큰 소득이다. 목표물을 포착했으니, 조만간 어떻게든 구출할 방법이 생길 것이다.
“좋아요. 그럼 상진이와 무혐의 처분을 맞바꾸기로 합시다. 그런데 우리도 정길수 건은 무혐의 해줄 수 없어요.”
“좋습니다. 우리도 그 건은 원래 관심도 없었어요.”
동주는 오늘 오후 2시 광주 동구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 상진을 건네받기로 했다. 이곳은 광주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잦은 번화가다.
토요일이면 쇼핑과 먹거리를 찾으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붐비는 사람들 때문에 경찰이나 누구도 잠복해서 남수혁 일행을 체포하기가 어렵다.
천 검사는 눈물을 머금고 기오성, 남수혁에 대한 증거불충분 무혐의 결정문을 작성했다. 2시에 차장검사에게 결재받기로 했다.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전화를 받은 차장검사는 직접 사무실에 나와 결재하겠다고 했다. 아마 이미 서강파 쪽에 그 사실이 전해졌을 것이다.
오후 2시, 동주는 충장로 우체국 사거리에서 남수혁 일행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사거리로 충장로 중에서도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동주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오른쪽 우체국에서 50m 떨어진 지점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곳에 덩치 2명이 자신을 보라고 손짓하고 있다. 그곳에 상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왼쪽 50m 지점을 보라고 한다. 그곳에도 덩치 2명이 손짓하고 있다. 이번에는 사거리 위쪽 50m 지점이다. 마찬가지로 덩치 2명이 손을 흔든다.
띠리링, 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진이 커피숍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다. 카페 명함 사진도 함께 왔다. 이름을 가리고 주소만 보인다. 충장로에 있는 카페가 맞다.
상대는 천무용이 차장검사로부터 결재를 받으면, 그걸 사진 찍어 바로 정태수 변호사에게 보내라고 말했다. 그러면 자신들은 곧바로 상진을 풀어주고 떠나겠다고 한다. 상진은 지금 충장로에 있는 카페에 있는 것이다.
동주는 먼저 상진에게 휴대폰을 줘서 통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상진이 자신의 휴대폰을 켜고 동주에게 전화했다.
“상진아! 너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동주야, 미안해! 내가 정말 왜 그런지 모르겠다.”
상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울먹이고 있다.
“상진아, 정신 차리고. 거기 충장로 우체국 쪽에 있는 카페 맞아?”
“응, 맞아. 여기 떡대 셋이랑 같이 있는데, 자기들이 무혐의 처분 난 걸 확인하면 금방 풀어주겠데.”
곧바로 전화가 끊겼다. 더 이상 통화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동주는 천무용에게 전화했다. 상진이 이곳 충장로 어느 카페에 있으니, 곧바로 절차를 진행해도 좋다고 알렸다.
상진은 혹시 몰라 박홍식 과장에게 부탁해, 믿을 수 있는 경찰 몇 명을 붙여 달라고 했다. 동주의 휴대폰에 공유 칩을 심었다.
통화내용을 같이 듣고 있는 잠복한 사복경찰들이 주변의 상황을 살피고 있다. 만약 약속을 어기고 상진을 다시 데리고 갈 경우, 곧바로 저들 전부를 체포할 계획이다.
*
상진은 어젯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갑자기 포커치던 애들이 방안으로 쳐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묶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옷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벗겼다. 그리곤 팔과 다리를 침대 기둥에 묶기까지 했다.
갑자기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수술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옆에 앉았다. 수술실에서 쓰는 파란 천을 넓게 펼치고는 그곳에 수술칼과 가위, 소독약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어, 어! 이거 뭐 하는 거예요? 설마 지금 날 수술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흰 가운을 입은 녀석이 상진을 보고 빙긋 웃는다.
“장기를 끄집어내려면, 우선 마취부터 해야겠지? 그나저나 에구, 깜빡 잊고 마취약을 놓고 왔네. 손발을 다 묶었으니까, 마취 안 해도 문제없겠지?”
“뭐, 뭐라고요. 야! 이 미친놈아, 너가 지금 제정신이야? 너, 의사 맞아?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여봐요, 여기요! 제발 사람 살려주세요. 살려줘!”
상진은 목이 터지라 외쳤다. 비명이 방안 가득 맴돌고 있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포커치던 녀석들이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판을 벌이고 있다.
조금 전까지 녀석들은 분명 날 해칠 생각이 없었다. 갑자기 돌변한 이유가 뭘까? 이유라도 알아야겠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예요. 돈 갚으면 될 것 아니야. 내보내 주면 당장 돈 마련해올 테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우리 형이 누군지 알잖아. 여기 다 서강파 사람들인 거 안다고, 굳이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음······, 나야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할 뿐이야. 자! 시작해볼까?”
“아아악! 안 돼. 안 된다고, 제발 살려줘!”
상진은 가운 입은 녀석이 메스 칼을 들자, 놀래 비명을 질렀다. 메스 칼이 마치 장검이라도 된 것처럼 무서웠다.
마취도 안 한 상태에서 난도질이라니! 너무도 겁이 나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오줌이 찔끔 나오고 말았다.
“킥킥킥, 짜아식! 겁은 많아 가지고, 킥킥!”
갑자기 가운 입은 녀석의 태도가 바뀌었다. 조금 전까진 마치 당장 장기를 해체할 기세로 비장하기까지 했는데, 지금은 너털웃음을 짓고 있다.
“왜 웃는 거예요?”
“재밌으니까 웃지, 하하하! 진짜 무섭긴 하나 보다. 큭큭! 나라도 이 상황이면 오줌 쌀 것 같아.”
상진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하다.
“위에서는 그럴싸하게 사진만 찍으라고 했는데, 장비도 있겠다, 장난 한번 쳐본 거야. 큭큭! 근데 정말 리얼하다. 내 연기 어땠어? 죽이지?”
“하아······! 그런 연기 한 번만 더 했다가는 진짜 칼 들어오기 전에 심장마비로 죽겠다야.”
상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이 녀석들이 하도 미친 짓을 많이 하기에, 겁이 덜컥 났다. 지구가 종말을 맞으려고 하니까 별의별 놈이 다 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이놈들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미쳤나 보다 했다. 그러니 무서울 수밖에.
아! 창피하다. 오줌까지 지렸으니,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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