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비밀 침투 (1)
아포칼립스 D-7, 2029. 4. 7.(토) 밤 8시, 정마리아의 저택.
천 검사가 정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기 시작할 무렵, 동주는 천상진과 함께 최용석이 모는 스텔스 드론을 타고 정마리아의 저택 뒤편 상공에 있었다.
드론 위에서 1시간가량 저택의 상황을 살폈다. 저택 옆에 창고 모양의 가건물이 있는데, 경비를 서는 서강파 조직원들이 묵고 있는 곳이다. 그 건물 옆에는 봉고차와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천 검사가 대문에서 소란을 피우자 그 건물에서 3명이 뛰쳐나와 그곳으로 향했다. 외부 경비원은 총 3명인 것 같다.
동주는 드론에서 밧줄을 내린 후 헬기 레펠 하듯 부드럽게 줄을 타고 내려가 뒤뜰에 섰다. 뒤이어 천상진도 내려왔다.
동주는 6사단 수색대 출신이다. 평소 축구와 농구로 단련되어 있었기에, 육군 논산훈련소에서 퇴소한 직후 곧바로 수색대에 차출됐다.
혹독한 훈련과정엔 적지에 침투해 생존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헬기를 타고 침투하는 훈련을 수도 없이 해왔기에, 이 정도의 저고도 레펠은 식은 죽 먹기다.
상진은 공군을 지원해 복무 기간 내내 비행장 활주로를 청소하고 새만 쫓았다. 하지만 평소 취미로 클라이밍을 했기에 어렵지 않게 줄을 타고 내려올 수 있었다.
둘은 뒤뜰에서 조심스럽게 저택 외벽으로 다가가, 유리창이나 문을 만지며 열린 곳이 있는지 찾았다.
다행히 뒷문 하나가 열리는 것 같다. 한참 밖에 서서 귀를 쫑긋하고 내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최용석은 드론에서 적외선 카메라로 저택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위치를 확인해, 인이어(in-ear) 무전기를 착용한 동주에게 알려주었다. 저택 1층 맨 오른쪽 끝방에서 한 명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2층에선 중앙 계단 옆 방에 세 명이 있다. 집사와 다른 서강파 조직원일 듯하다. 그 옆방에 작은 3개의 움직임이 보인다. 아마도 반려동물 같다. 적외선 카메라로는 지하실까지 확인할 순 없었다.
지금 이 시각 정마리아는 조선호텔에 있다. 동주는 박홍식 과장으로부터 조선호텔의 상황에 대해 들었다. 남수혁이 그곳에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정마리아가 없는 이 저택에 남수혁이 있을 리는 없다. 도대체 어디에서 또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저택을 지키는 서강파 애들 3명은 지금 대문 앞에서 천 검사와 실랑이 중이다.
1층 중앙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바로 큰 로비가 나왔다. 맞은편엔 정문이 있다. CCTV가 있는지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위쪽에 한 대가 있다. 방향을 보니 정문을 보고 있다.
상진이 서강파 애들에게 잡혀 있을 때 이곳 지하에 감금 시설이 있다고 들었다. 두 사람은 CCTV의 방향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로 향했다.
그곳에 커다란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디지털 도어락으로 잠겨 있어, 손잡이를 비틀어도 열리지 않았다.
동주는 준비해온 해정기(문 개방기)를 꺼냈다. 최용석이 테러 진압할 때 사용하는 문 개방용 해정기를 빌려왔다. 3만 볼트 안팎의 초 고전압 전기충격으로 디지털 도어록의 오작동을 유발해 문이 열리도록 하는 장치다.
삐리릭, 삐리릭 소리가 나더니 도어록의 잠금이 풀렸다. 집안이 너무 조용해 삐리릭 소리도 크게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누군가 이 소릴 들었다면 분명 이쪽으로 올 텐데. 귀를 기울이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지하실로 들어갔다. 여기도 긴 복도가 있고 방이 여럿 있는 구조다. CCTV가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준비해간 플래시를 켰다. 인기척이 전혀 없다. 왠지 헛다릴 짚은 듯하다. 은수가 이곳에 갇혀 있는 것 같지 않다.
첫 번째 방에는 집기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의자나 식탁, 가재도구들이 쌓여 있다.
두 번째 방엔 디지털 도어록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중으로 잠금을 해둔 걸 보면, 아무래도 중요한 방인 듯하다. 동주는 다시 해정기를 사용해 문을 땄다.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맨 처음 수술실에서나 쓰는 침대가 보였다. 귀퉁이에 쇠사슬이 한 무더기 쌓여 있다. 철제 의자와 쇠 파이프, 야구방망이도 보인다.
서강파 애들이 감금 시설이라고 한 게 이 방인 것 같다. 언젠가 이곳에 누군가를 감금해 두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일은 아니다. 의자나 침대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바닥에도 먼지가 쌓여 두 사람의 발자국이 새겨질 정도다. 이곳도 아니다.
마지막 세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큰 책장이 여럿 있고, 칸칸이 낡은 책들과 앨범, 트로피와 상패들이 있었다. 이곳에서도 은수의 흔적이나 단서는 찾을 수 없다.
아! 별 소득이 없다. 낙담한 동주가 플래시로 쓱 비춰보고 방을 나서려던 찰라, 상진이 팔을 붙잡는다.
그가 책장 한가운데 놓여 있는 액자 사진 하나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마치 바위처럼 굳어 있는 상진.
동주가 그 사진에 플래시를 비추었다. 억! 이게 뭐야?
그곳에 곽형규의 고등학교 졸업사진이 있었다. 형규의 옆에 서 있는 말쑥한 정장 차림의 여성, 아무리 봐도 정마리아의 얼굴이다.
아니 이 둘이 무슨 관계지? 두 사람은 형규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기에, 그 사진이 고등학교 졸업식 때 찍은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동주는 옆에 있는 다른 사진들과 앨범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쪽 귀퉁이에 있던 앨범에서 형규의 대학 졸업식 사진도 발견했다. 그때도 옆에 정마리아가 같이 하고 있었다.
세상에!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니, 이럴 수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설마 형규가?
풀리지 않던 퍼즐들이 하나, 하나 맞춰지기 시작했다.
상진이 천 검사의 동생인 걸 남수혁이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강대주가 흘린 게 아닐까 의심했는데, 바로 형규 때문이었다.
강대주가 생존팀에 물자를 제공한 것도 형규가 알린 거다.
지난 목요일 점심때 동구청 앞에서 만나 상진으로부터 그 정보를 얻은 거다. 그때 천 검사가 밤에 강대주를 만나기로 한 이야기까지 나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형규가 동구청에서 유흥주점 단속업무를 맡은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가 보다. 유흥주점으로부터 뇌물을 받는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어떻게 친구인 우리를 이렇게까지 배신할 수 있지? 그리고 지금까지 감쪽같이 속이다니. 아무래도 지리산 생존 벙커 이야기도 형규가 흘린 것 같다.
서강파는 우리 계획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거다. 큰일이다. 이제 생존 벙커가 완성된 것까지도 알 테니, 언제라도 빼앗으려 할 거다. 공포가 몰려왔다.
형규가 은수까지 납치한 걸까? 형규는 은수를 잘 알고, 동주가 사귀는 3년 내내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런 형규가 은수를?
갑자기 지난 목요일 점심때 형규가 머리를 다쳐 붕대를 감고 나왔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왠지 어색하고, 무언가 숨기는 눈치였다.
그동안 생존팀 회의에도 나오지 않았고, 연락도 잘 안됐다. 새벽에 생존 물품을 구하러 가는 일에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상진이 실종된 상황에서도 연락 한번 없었다. 이 녀석 도대체 뭐야?
동주와 상진은 이곳에 은수가 없음을 확인했으니, 서둘러 나가기로 했다. 지하실 문을 열고 막 나가려던 찰라, 밖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1층에 사람들이 있고 서로 대화하고 있다. 귀를 기울여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어보려 했다. 그런데 너무 멀어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젠장! 갇혀버린 꼴이다.
동주는 천 검사에게 문자를 보내, 곽형규가 정마리아와 무슨 관계인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리고 곽형규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어머닌 양동시장에서 치킨을 팔고 있으며, 시장 부근에서 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혹시 모르니 곽형규 소유의 다른 집이나 상가가 있는지도 살펴달라고 했다.
천 검사는 정문 밖에서 야단법석해도 녀석들이 순순히 문을 열어주지 않고, 이제 대문을 지키는 녀석 한 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저택으로 다시 올라갔다고 알려주었다.
그 세 녀석 중 두 명이 지금 1층에 와 있나 보다. 집사와 다른 남자들 목소리가 들린다. 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 전화로 지시를 받고 있다. 아마 정마리아와 통화하는 것 같다. 불안하다. 혹시 지하로 누군가가 온다면 영락없이 들통나게 된다.
동주는 천 검사에게 부탁해 다시 한번 소란을 피워달라고 부탁했다.
천 검사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대문 옆 담장을 넘기 시작했다. 박 계장과 김 주임이 허리를 굽혀 천 검사가 그 위를 밟고 올라갈 수 있게 도왔다.
천 검사는 발을 담장 윗면에 걸치고, 손으론 대문의 처마를 붙잡았다. 힘껏 잡아당겨 간신히 담장 위에 섰다. 날카롭게 선 쇠창살만 넘으면 곧장 집 안으로 뛰어내릴 수 있다.
“어, 어! 아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문 앞을 지키고 있던 덩치 녀석이 깜짝 놀라 소리를 쳤다. 휴대폰으로 이쪽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저, 저 미친 검사가 담장을 넘어오려고 해. 지금 벌써 담장 위에 서 있다고, 넘어오기 직전이야. 빨리 와!”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