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구출

아포칼립스 D-7, 2029. 4. 7.(토) 밤, 양림동 곽형규의 주택.
은수야! 은수야!
동주는 은수를 부르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상진도 뒤따라 내려왔다.
은수야, 정신 차려! 은수야!
동주는 은수의 얼굴에 귀를 대고 호흡을 확인했다. 약하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이 뛰는지 확인했다. 분명 심장박동 소리가 들린다. 살아 있다.
그런데 왜 눈을 뜨지 않는 거지? 동주와 상진은 재빨리 은수의 팔과 다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었다.
은수의 얼굴엔 여러 곳 쓸린 상처가 있고, 왼쪽 눈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오른쪽 귀에서 어깨까지 피가 흐른 흔적이 있다. 심하게 구타당한 것 같다.
달랑 헐거운 잠옷 하나만 걸치고 있다. 몸이 얼음처럼 차갑다. 옆에 이불이 있는데 덮지도 않고 있었다.
치마 아래로 보이는 발은 차갑게 식어 푸른 빛마저 돌고 있다. 큰일이다. 이런 싸늘한 방에 오랫동안 그냥 방치된 것 같다.
왜 의식이 없는 걸까?
“용석아! 119 불렀어?”
“네, 형님! 지금 오는 중입니다. 여기 소방서가 가까우니까 금방 올 거예요.”
“안 되겠다. 우리 은수 데리고 나가자. 좀 도와줘 애들아!”
동주는 상진의 도움을 받아 은수를 업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하실을 나섰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 주택 밖으로 나갔다. 멀리서 엠뷸런스 소리가 들린다.
이곳은 좁은 골목이라 큰 차가 들어오기 힘들 수 있다. 큰길까지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동주는 은수를 업고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회전교차로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양림교에서 이쪽으로 들어오는 엠뷸런스가 보인다. 상진이 두 손을 크게 흔들며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쳤다.
구급차가 회전교차로에 도착했다. 동주는 구급대원의 부축을 받아 은수를 차량에 태웠다. 그리곤 함께 탑승했다. 상진과 용석은 드론을 타고 한빛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여기서 대학병원까지는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동주는 태호에게 연락했다. 은수를 찾았다고. 의식이 없으니 서둘러 응급조치해달라고.
동주는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은수의 얼굴을 보자,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큰일이 아니길······.
동주는 차가운 은수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동안 얼마나 참혹한 일을 당했기에, 이 지경이란 말인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은수야! 힘내, 제발 이겨내야 해.
그때 은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동주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은수야! 정신이 드니?”
동주는 은수의 얼굴 가까이 귀를 댔다.
“오, 오빠!”
은수가 날 알아본다.
“그래 은수야, 이제 살았어. 걱정 안 해도 돼. 병원 가면 금방 좋아질 거야.”
은수의 눈이 촉촉이 젖어가고 있다. 동주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했다. 다행히 태호가 의료진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환자를 이송할 베드와 산소호흡기가 다가왔다. 은수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입에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곧바로 응급실로 향했다.
동주도 태호를 뒤따랐다. 의료진 여럿이 은수에게 붙어 이야기를 나누며 상태를 살핀다.
동공반사를 확인하고, 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근육수축이나 반사신경은 어떤지 살핀 후 혈액검사를 시행했다. 태호는 외과의라 옆에서 보조만 하고, 신경과 전문의가 붙어 은수를 살피고 있었다.
얼마 뒤 태호가 기다리고 있던 동주에게 다가와 은수의 상태를 말해주었다. 신경안정제가 과다 투여 돼 의식이 혼미하다. 얼굴이나 몸에 난 상처는 타박상으로 구타를 당한 흔적이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하지 못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이다. 방금 해독 치료를 시작하고, 영양제를 투여받고 있다. 미미하게 의식이 돌아왔지만, 명료하지 않아 정상적인 대화는 어렵다.
오늘 밤 안정을 취하면 내일쯤에는 대화도 되고, 의식도 많이 좋아질 것 같다고 했다.
다행이다. 은수가 깨어나고, 회복될 수 있다고 하니. 몸에 큰 무리가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동주는 계속 머물며 은수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태호가 있는 상황이라 아무래도 어색하다. 게다가 친구인 형규가 저지른 일이니, 은수를 별 면목이 없었다.
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형규 이 자식은 도대체 제정신인 건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세상에 은수를 저렇게 만들어 놓고 버려두었다니!
동주와 상진은 번갈아 가며 형규에게 전화하고 문자로 연락했다. 그러나 형규는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에도 답하지 않았다. 형규네 집에도 전화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는다.
동주는 송은채와 아버님에게도 연락해 은수를 찾았고, 지금 대학병원 응급실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곧 있으면 가족들도 도착할 것이다.
동주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일행과 함께 드론을 타고 지리산 생존 벙커로 향했다.
*
2029. 4. 5.(목) 아침, 양림동 곽형규의 집 지하실.
얼마나 잤을까? 지금은 며칠일까? 아포피스가 오기까지 얼마나 남은 걸까? 생존 벙커는 다 만들어졌을까?
아! 머리가 아프다. 아무래도 오빠가 날 찾기는 어렵겠지. 이런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찾겠어. 하! 답답하다.
그때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녀석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다. 점점 다가오는 느낌이다.
“일어났어? 배고프지?”
“저기요! 제발 부탁인데 보내주시면 안 돼요?”
“하하! 아직도 삶에 미련이 있구나. 너가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가 보이스펜에 녹음 된 거 다 들었다는 거 알아. 널 살려 보내 주면 누가 죽겠어?”
아! 이 녀석 서강파 사람이 맞구나. 주변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잘못 짚었어. 그럼 그렇지, 주변에서 누가 이런 짓을 하겠어. 결국 그 보이스펜 때문이야. 정길수 살인사건을 덮으려고.
“죽일 거면 진작 죽이지, 왜 지금까지 살려두는 거야?”
“킥킥!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한데? 무슨 정이 있다고 너에게 집착하는지 말이야.”
엥? 이 반응은 뭐지? 서강파 사람 중에 날 잘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 정은 뭐고, 집착은 또 뭐지?
“무슨 소리예요. 알아먹게 좀 말해봐요.”
“그런 이야기 그만하고, 살고 싶으면 자, 식사나 해.”
녀석이 지난번처럼 튜브를 넣어 두유를 주려고 한다.
“저기요! 누워서 마시니까 코로 넘어가고 너무 힘들어요. 제발, 앉아서 마시게 해줘요. 네?”
녀석이 튜브를 빼낸다. 그리곤 팔과 다리를 묶었던 끈을 풀기 시작했다. 아! 온몸이 뻐근하고 아프다.
몸에 힘이 없다. 계속 약에 취해 잠만 자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없다. 이러다 정말 쓰러지겠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녀석이 손을 뒤로 묶으려고 한다.
“저, 저기요. 진짜 가만히 두유만 마실게요.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믿어줘요. 그냥 제 손으로 두유 마시게 해줘요. 제발!”
녀석이 머뭇거린다. 마음의 동요가 있는 듯하다.
“좋아! 딴짓했다간 가만 안 둬!”
“네, 진짜예요.”
녀석이 두유를 왼손에 가져다주었다. 팩에 들어 있는 두유다. 튜브가 꽂혀 있다. 천천히 얼굴 쪽으로 들어 올렸다. 녀석이 얼굴 가리개를 들고 턱 밑으로 튜브를 넣어주었다.
입에 넣고 조금씩 빨았다. 아! 또 얼마 만에 먹어보는 건가. 몇 모금 마셨더니 제대로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쪽, 쪽 몇 번 빨았더니 벌써 바닥이다.
“저기요! 배고파서 그러는데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돼요?”
“하하! 배가 고프긴 했나 보다. 그래 원한다면······.”
녀석이 두유 하나를 더 주었다. 두 개를 순식간에 다 마셨다. 그래도 간에 기별도 안 간다. 그런데 차마 더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빈속에 들어가니 지난번처럼 또 금방 신호가 왔다.
“저, 화장실이 급한 데······.”
“하, 참. 가지가지 하네. 그냥 일 보라니까 쯧.”
이 변태 같은 자식! 어이구, 기회만 와 봐라, 널 그냥······.
녀석이 다가와 팔을 붙잡는다. 천천히 일어섰다. 지난번 기억해둔 게 있다. 침대에서 앞으로 5발짝, 오른쪽으로 틀어서 8발짝, 그러면 바로 앞에 세면대가 나온다.
그리고 오른쪽에 바로 변기가 붙어 있다. 세면대에서 오른쪽으로 팔을 뻗으면 변기 물을 담는 큰 통이 손에 닿는다. 그 뚜껑은 도자기로 되어 있어 무겁고 단단하다.
그걸 들어 이 녀석을 강타하면 한방에 끝낼 수 있다. 그래 기회다. 딱 한 번에 승부를 봐야 한다.
녀석의 부축을 받아 앞으로 걸었다.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 8발짝 걸으니 역시 세면대가 손에 닿았다. 은수는 눈이 보이지 않아 머뭇거리는 척하면서 오른손을 더듬어 변기 물통을 확인했다.
변기를 두 손으로 잡는 척하면서 물통 뚜껑을 붙잡았다. 녀석은 여전히 은수의 팔을 잡고 왼편에 서 있다.
지금이다. 뚜껑을 집어 들고 몸을 왼쪽으로 틀면서 그대로 녀석을 향해 뚜껑을 휘둘렀다.
‘깡’, ‘아악!’. ‘후두둑!’
녀석의 머리를 정통으로 가격한 것 같다. 비명 소리가 들리고 녀석이 쓰고 있던 음성변조기가 바닥에 떨어진 것 같다. 뒷걸음질 치며 넘어지는 소리도 들린다.
은수는 재빨리 뚜껑을 세면대 위에 올리고 두 손으로 목에 감긴 끈을 풀기 시작했다. 칭칭 많이도 감아놓았다.
제길! 서두르다 보니 끈이 꼬여 잘 풀리지 않는다. 어느 정도 헐거워진 것 같으니 통째로 벗어던지는 게 낫겠다.
목에서 머리 쪽으로 끈과 스웨터 같은 천을 한꺼번에 들어 올렸다. 코 위로 올라오고 이제 조금만 올리면 앞이 보인다. 머리카락에 엉켜 잘 올라가지 않는다.
에이! 세게 더 잡아당겼다. 드디어 벗겨졌다.
그때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사내가 이쪽으로 달려온다.
아니! 넌, 넌 곽형규! 동주 오빠 친구 아니야?
“오빠!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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