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범인 (2)
곽형규가 설계한 대로 남수혁은 박시영에게 펜을 바꿔치기하라고 지시했다.
박시영이 그동안 돈을 받고 서강파 일을 도와준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 정보를 제공하거나 편의를 봐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증거물 바꿔치기는 중죄이기 때문에 도저히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곽형규는 남수혁에게 어떻게든 증거물을 확보해야 하니, 박시영의 가족을 협박해서라도 꼭 받아내라고 조언했다.
남수혁은 박시영의 집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돈 봉투를 건넬 때 그 집 앞에서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곧바로 박시영의 집으로 애들을 보냈다.
현관에서 초인종을 누르며 박시영을 찾았다. 놀란 부인은 박시영에게 전화했고, 남수혁은 박시영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더 거절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에 할 수 없이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박시영은 보이스펜을 빼돌려 정마리아의 집사에게 넘겼다. 정마리아는 곽형규, 남수혁과 함께 문흥동 저택에서 보이스펜에 녹음된 내용을 들었다.
살인 현장의 생생한 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남수혁이 병으로 정길수를 내려치는 소리, 임안나의 비명과 통곡, 정마리아가 현장을 치우라고 지시하는 말, 시체를 야산에 묻는 과정, 그때 남수혁의 부하들이 한 말들 모두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다.
이 녹음파일만 없앤다고 해서 처벌을 면하는 게 아니었다. 녹음내용을 들은 게 박시영과 송은수다. 박시영은 뇌물과 가족이 얽혀 있어 입막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송은수는 서둘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곽형규는 송은수의 집을 알고 있기에 집 근처로 사람을 보내 곧바로 납치할 걸 지시했다.
월요일 밤 은수가 동주와 헤어진 후 밤 9시 30분경 공용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다.
통금시간이라 서강파 조직원들 여럿이 대놓고 움직이기 어려웠다. 은수는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 같아 계속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여러 사람이 뒤를 쫓다 보니 금세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이다.
거기다 공용주차장에서 은수네 집까지 거리가 매우 짧아 기회를 잡지 못했다. 실패다. 만약 다음날 은수가 출근해서 보이스펜을 공표해버리면 이제 정말 끝장이다.
발대식에 참여하라는 말을 들었던 형규는 부랴부랴 동주에게 전화했다. 혹시 은수도 참석하는지 궁금해서다.
동주와 대화하면서 은연중에 은수도 내일 발대식에 참석하는 걸 알아냈다. 다행이다. 다음날 조직원들을 대학 내에 준비시켰다.
은수가 혼자 남으면 눈치 안 보고 강제로라도 납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발대식 이후에 줄곧 동주와 함께하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다.
대신 은수가 연가를 내고 남원에 가는 걸 알았기에 오늘 당장 보이스펜 녹음내용이 드러날 염려는 없었다. 오늘 밤 은수가 귀가할 때, 그때가 마지막 기회다.
형규는 노련한 조직원 몇 명을 동주의 차량에 붙여 이들을 미행했다. 남원경찰서를 거쳐 정령치 휴게소로 가는 것까지 은밀히 뒤쫓았다. 오후 6시 30분 광주로 돌아와 상무지구 번화가에서 이들이 헤어지는 걸 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자친구인 김태호를 만나는 것이다. 계속 기회가 없었다. 이들이 7시 반경 음식점에서 나와 양림동 쪽으로 향했다. 형규는 양림동 자신의 집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은수를 납치하면 이곳으로 데려와 직접 은수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남수혁, 정마리아는 조직원들을 시켜 진상두처럼 여수 쪽으로 데리고 가 바다에 던져버리는 게 낫다며,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러나 형규는 극구 반대했다.
은수는 자기가 책임지고 처리하겠다고. 녹음내용이 새 나가지 않게 하고, 조사도 무혐의로 종결시키겠다고. 은수를 가둔 뒤 어떻게든 회유해보고, 만약 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 처리해도 늦지 않는다고.
7시 40분, 그녀가 김태호와 양림동 회전교차로 앞에서 헤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형규는 은수를 납치하기 위해 의료용 흡입마취제를 준비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뒷주머니에 고무망치도 꼽아 두었다. 은수를 미행해온 녀석들이 전화로 실시간 은수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희망슈퍼에서 물건을 산 후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이장우 가옥 앞 삼거리 쪽으로 가고 있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통금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다.
이미 밤이 깊어 골목 골목은 질흙 같은 어둠이 깔려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아포피스는 이제 제법 빛을 내고 있었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 이제 곧 이장우 가옥 앞 삼거리다.
숨어 있던 형규는 불쑥 은수의 뒤로 가 왼손으로는 팔과 가슴을 제압하고, 오른손으론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은수의 입과 코를 막았다. 손수건엔 흡입마취제를 흥건하게 적셔놓았다.
그런데 영화에서와 달리 은수가 바로 쓰러지는 게 아니라, 몸부림 치기 시작했다. 힘이 만만치 않아 금방 손수건이 빠져버릴 것 같다.
은수가 발 뒤꿈치로 형규의 무릎을 치려고 한다. 형규의 발을 밟기도 했다.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위험하다.
형규는 손수건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뒤로 빼 뒷주머니에 있는 고무망치를 들었다. 바로 뒤로 물러서 은수의 뒤통수를 세게 가격했다.
픽! 은수가 정신을 놓고 쓰러진다. 형규는 재빨리 은수를 붙잡았다. 뒤에서 미행했던 서강파 두 녀석이 황급히 다가와 부축한다.
형규는 도움을 받아 은수를 업고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 베란다 쪽 바닥에 설치한 발 버튼을 누르자, 지하실로 들어가는 입구 문이 스르륵 열렸다.
형규는 한 녀석에게 열쇠를 줘 철문을 열게 했다.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 침대에 은수를 눕혔다. 이 정도면 은수 문제는 잘 처리했다. 이제 어떡하나?
남수혁에게는 은수를 회유하겠다고 했지만, 어렵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건 허울 좋은 핑계일 뿐, 실은 은수가 탐나서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다.
날 알아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선 얼굴부터 가리자. 목소리도 변조해야지.
형규는 은수의 옷을 하나, 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준비한 잠옷을 입히기 위한 명분이었지만 실은 그녀의 육체가 탐나서다.
겉옷을 다 벗기고 이제 속옷만 남았다. 멀리서 도둑고양이처럼 훔쳐만 보다 바로 눈앞에서 그녀의 속살을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 상태에서 잠옷을 입힐 수도 있지만, 도저히 멈출 수 없다. 욕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발정 난 손이 어느새 속옷마저 벗기고 있었다.
그녀의 눈부신 나신을 보니, 소름이 쫙 끼쳤다. 더 이상 흥분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형규는 은수를 겁탈하고 또 겁탈했다.
*
은수는 목이 졸렸다 풀려나, 거칠게 기침한 뒤 급하게 숨을 들이마신다. 왼쪽 눈과 귀를 주먹으로 세게 얻어맞아 정신이 몽롱하다.
형규는 세면대로 가 자신의 얼굴과 머리를 살피고 있다.
오른쪽 귀 바로 윗부분이 찢어져 계속 피가 나온다. 그 위쪽으론 피멍이 크게 들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다. 빨리 지혈해야 할 상황이다.
형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침대 기둥에 연결된 끈으로 다시 은수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그리곤 세면대 위 서랍장에서 주사기와 유리병을 꺼내왔다.
유리병 안에는 신경안정제가 담겨 있었다. 형규는 허용치보다 몇 배나 많은 양의 주사를 은수의 팔에 놓기 시작했다.
“널 믿고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네가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어.”
“흑흑, 오빠! 제발······.”
은수는 흐느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따가운 주삿바늘에서 서늘한 액체가 흘러들더니 이제 혈관 깊숙이 살을 에듯 파고드는 느낌이다. 아! 이제 정말 죽는 걸까?
“이제 나도 더 이상 널 돌봐줄 수 없어, 알아? 자, 편히 잘 가시게······.”
“퉤!”
은수가 형규를 향해 침을 뱉었다. 그의 얼굴에 침 덩어리가 튀었다.
“이 나쁜 놈! 너가 그러고도 동주 오빠 친구야?”
“킥킥! 동주가 어때서? 너희 둘 헤어진 거 아니야?”
“······.”
“이미 딴 남자 생겼더구만. 너도 그러는 거 아니다. 썩 보기 좋진 않던데······.”
“으윽!”
은수는 살고 싶어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쳤다. 손과 발에 피멍이 들도록 힘을 주어 흔들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가봐야 해서, 아쉽지만 네 최후는 봐줄 수 없을 것 같다.”
“이, 더러운 놈아! 너가 그러고도 잘살 것 같아. 나가자마자 벼락 맞아 죽을 거야!”
“하하! 내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신경안정제를 원 없이 넣어줬으니까, 고통 없이 편히 잠들 수 있을 거야. 이대로 죽으면 다행이고, 재수 없이 깨면 그땐 나도 모르겠다. 잘 있어!”
형규는 총총히 멀어져 간다.
아! 오빤 어떻게 저런 녀석과 친구를 한 거지?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러는 걸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서강파와는 또 무슨 관계일까? 아! 이렇게 비참히 최후를 맞는구나.
점점 힘이 빠지고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 순간 떠오르는 건 오직 동주의 환한 미소뿐이었다.
문득 오빠가 처음 사귀자고 한 제주도 멘토, 멘티 행사 때가 떠올랐다. 그 파란 하늘과 너른 바다, 그리고 오빠 곁에 기대어, 서로의 눈을 마주 보다 나눈 첫 입맞춤.
오빠! 동주 오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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