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범인 (3)
형규는 고등학교 때 줄곧 동주와 라이벌 관계였다. 서로 전교 1등을 두고 엎치락뒤치락 하며 경쟁했다.
그때만 해도 형규의 성적이 더 좋을 때가 많았다. 정마리아의 도움으로 개인과외까지 받으며 악착같이 동주를 이기려 했고 덕분에 성과를 냈다.
모두들 이 둘이 국내 최고 명문대에 합격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형규는 명문대 사회과학계열에 수석 입학했다. 동주는 그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은 달랐다. 동주는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반면에 형규는 방학 때면 광주에 내려가 정마리아의 유흥주점을 관리하면서 노는 맛을 알게 돼 대학 성적이 갈수록 떨어져 갔다.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 형규는 2학년 무렵이 되었을 때 이미 과에서도 수석 자리를 빼앗기고 점점 밀리는 형국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동주와 함께 명문대 로스쿨에 지원했는데, 동주가 상위권으로 합격한 반면 형규는 떨어지고 말았다.
대학 생활 내내 동주에게 밀리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는데, 로스쿨 시험까지 떨어지고 보니 더더욱 내상을 입게 됐다. 재수해서라도 로스쿨에 가고 싶은 욕심에 1년을 더 준비했지만, 결과는 또 떨어지고 말았다.
이미 동주는 명문대 로스쿨에서 좋은 성적을 내며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로 진로도 같아 늘 비교 대상이었던 동주. 그에 대한 질투심이 형규를 눈멀게 했다. 점점 동주가 싫어지고, 녀석이 잘나가는 꼴을 볼 수가 없었다.
친구인 상진이 먼저 광주에 내려가 있었다. 형규는 로스쿨 진학을 포기하고 정마리아를 도울 생각으로 광주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동주와는 더 격차가 벌어졌다.
내심 자존심이 상해 다시는 동주을 안보겠다고 결심했는데, 하필 녀석이 광주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상진과 어울리다 보니 동주를 계속 만나야 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친구, 보면 괴로움만 주는 친구가 동주였다. 언제라도 기회가 있으면 녀석을 밟아주고, 그 오만한 콧대를 꺾어주고 싶었다. 이번이 그 기회였던 셈이다.
생존 벙커를 만든다고 앞장서 나서는 꼴을 보고 기가 찼다. 지가 아무리 잘났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생존 벙커를 만들려 안간힘 쓰다 결국 제풀에 꺾여 포기하겠지 했다. 그런데 녀석이 진짜 판을 크게 벌이고 있다.
서강파는 무등산 벙커를 차지하지도 못하고 그냥 기웃기웃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녀석은 이미 설계도를 완성하고 자금줄도 확보해 컨테이너까지 실어다 나르고 있다.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참여해 진행 속도도 엄청나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로 일을 벌일 태세다. 아! 도저히 배 아파 옆에서 볼 수가 없다.
은수가 헤어지자고 해 그러자고 한 것일 뿐 동주의 마음은 여전히 은수에게 있는 걸 잘 안다. 은수도 빼앗고, 생존 벙커도 박살 내 버려야지.
네가 잘나가는 꼴을 이제 더는 봐줄 수가 없다.
*
2029. 4. 5.(목) 아침, 양림동 주택 지하실.
은수는 어느새 약 기운에 취해 의식을 잃고 말았다. 형규는 은수를 그대로 방치한 채 밖으로 나와 병원으로 갔다.
귀 윗머리가 20방울이나 꿰맬 정도로 크게 찢어졌다. 피멍이 든 부분도 연고를 바르고 감싸야 한다. 의사는 지혈과 소독을 마치고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았다.
아까부터 계속 상진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로 동주와 점심을 같이하자고 한다. 일 때문에 어렵다고 계속 거절했는데, 점심 무렵 일하고 있는 동구청 앞에까지 와 있다고 한다.
하아! 귀찮은 자식들. 형규는 검은 모자를 푹 쓰고 백반집에 갔다. 어제 야간 단속 나갔다가 넘어져 다쳤다고 둘러댔다.
그곳에서 상진이 강대주와 협상해 생존 물자를 확보한 걸 알게 됐다.
역시 강대주 녀석 믿을 수 없다니까! 제 살길을 찾아 나설 줄 알았다. 그런데 저녁에 또 중요한 약속이 있는 것 같다.
꼬치꼬치 캐물었다. 상진이 자랑삼아 막 이야기하려던 찰나에 동주가 막아선다. 비밀이라나 어쩐다나. 분명 오늘 밤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 거다.
돌아가 남수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강대주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으니 잘 살피라고.
어제 일부러 술판을 벌여 천상진을 만취하게 만들고는 생존 벙커 계획을 알아냈다. 그런데 갑자기 물자를 제공한다? 무언가 거래가 있지 않고서야······. 무슨 딜을 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술자리에서 천상진이 천무용 검사의 동생인 사실도 알아챘겠지. 저녁에 있다는 약속은 그것과 관련된 일일 거다. 남수혁에게 오늘 밤 강대주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라고 알렸다.
그날 밤 강대주가 오기철과 함께 도박장에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런데 뒤를 따라붙으라고 시켜놓은 녀석이 이들을 놓치고 말았다. 분명 누군가를 만나러 나갔는데······. 아무래도 천무용 검사를 만나러 간 것 같다.
남수혁은 점점 기오성으로부터 신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그 부하인 강창배가 대포폰 관리를 잘못해 천 검사의 조사가 턱밑까지 오게 했다. 거기다 남수혁의 부하인 유승민이 천 검사의 끄나풀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길수 살인사건을 저지르고도 이를 숨기고 있다 이번 검찰 조사에서 그만 들통나고 말았다. 남수혁은 곽형규에게 어려운 사정을 토로하며 반전 카드가 없겠냐고 물었다.
형규는 도박장을 제집처럼 드나들던 천상진이 천무용의 동생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녀석은 큰 도박판이 벌어지면 사족을 못 쓰니 그걸로 미끼를 놔서 잡으라고 조언했다.
남수혁은 곽형규 덕에 천상진을 잡을 수 있었고, 천 검사와 딜을 해서 전두만, 진상두 건을 모두 무혐의로 종결시킬 수 있었다.
형규는 정마리아의 저택 2층에서 살고 있다. 예전에는 양동시장에 있는 어머니 집에서 생활했었는데, 이제 그곳이 불편했다.
좁고 지저분한 방, 냄새나는 시장통이 이제 싫어진 것이다. 정마리아의 저택은 크고 화려하다. 집사와 직원들이 늘 시중을 들고 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가지고 싶은 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다.
2029. 4. 7. 토요일 밤, 머리를 다쳐 쉬고 있던 형규. 정마리아가 전화해 다급하게 녹음파일을 밖으로 빼내라고 한다.
그녀는 남수혁에게 모든 걸 없앴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를 핸들링하기 위해 보이스펜 기기만 폐기하고 녹음파일은 별도로 보관했다.
그런데 유흥주점으로 강력반 애들이 쳐들어온 걸 보니, 문흥동 저택도 안전한 곳이 아니다. 지금은 그 파일이 독이 될 수 있으니 밖으로 빼내야 한다.
형규는 녹음파일이 담긴 USB를 자신의 몸에 숨겼다. 오늘 밤 양림동 집에 가져다 놓을 생각이다.
그런데 때마침 천 검사가 저택 대문에서 문 열어달라며 소란을 피우고 있다. 제길! 나가지도 못하게 됐네. 형규는 어떻게든 대문을 열어주지 말고 막아서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웬걸? 정마리아가 키우는 셰퍼트들이 갑자기 짖으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것이다. 1층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침입자가 있다.
벌써 이곳까지 노출되었구나. 여길 어떻게 알고 쳐들어왔지? 형규는 조심스럽게 2층 계단에서 1층 로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곳에 동주와 상진이 조직원 한 명과 대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재빨리 몸을 피했다. 녀석들이 날 본 건 아니겠지? 다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뒷문이 열리고 사람들 뛰는 소리가 들린다.
유리창 너머로 밖을 보니 동주와 상진이 드론에서 내려온 밧줄을 잡고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아래로는 뒤늦게 뛰어온 조직원들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드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형규는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집사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저 녀석들이 지하실에서 나왔다고 한다.
서둘러 지하실로 갔다. 은수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온 것이구나! 혹시 뭐라도 본 게 있나?
형규는 지하실 방문을 하나, 하나 열고 내부를 유심히 살폈다. 맨 끝방에서 정마리아의 앨범과 사진 하나가 삐죽 튀어나온 걸 발견했다.
그곳엔 정마리아와 형규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아! 녀석들이 내 정체를 알아버렸구나. 큰일이다. 그럼 양림동 집도 뒤지려 할 텐데. 형규는 마음이 급해졌다.
내 손에 은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시간 가면 과다투약으로 죽든, 아니면 굶어 죽든 하겠지 하고 버려둔 건데, 잘못하면 저 녀석들이 먼저 가서 은수를 구출할 판이다.
그랬다가는 내가 저지른 일이 완전히 탄로 나게 된다. 형규는 양림동으로 가려고 승용차 쪽으로 뛰었다. 그때 집사가 나타나 형규를 잡고 말린다.
“도련님! 지금 나가시면 통금 때문에 계엄군에 잡힐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걱정 마세요. 지금 계엄군은 다 빠져서 통금은 옛날 이야기니까.”
“그래도 정 여사님께 말씀하시고 가시는 게······.”
“네, 가면서 전화할게요.”
형규는 급하게 차를 몰아 양림동으로 향했다. 정마리아에게는 전화로 다급한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는 조직원들을 보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은수가 이미 그쪽 손에 넘어갔다면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도 말했다.
이제 치안이고 뭐고 다 망가진 상황인데다, 탱크부대가 서강파와 합류하기로 했으니 사실상 우리가 군이고 경찰이나 다름없다며, 상황이 불리하면 바로 안가(安家)로 돌아오라 했다.
형규가 양림동으로 들어서는 광주천 변에 다다랐을 때 멀리 회전교차로에 엠뷸런스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 동주와 상진이 있고, 119 구급대원이 여잘 베드에 눕혀 구급차에 싣는 모습이 보였다. 제길! 늦었다. 녀석들이 용케 은수를 찾아버렸네!
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찾아내지? 이번엔 내가 제대로 당했는데.
형규는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복수심을 불태우며 정마리아가 말한 안가(安家)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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