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지리산 생존팀
아포칼립스 D-7, 2029. 4. 7.(토) 밤 10시,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동주는 신수경에게 생존팀 잠자리를 부탁했다. 터널 내에 있는 생존 벙커가 완성됐지만, 벌써부터 그곳에 들어가 사는 건 다들 싫어했다. 한번 둘러보고는 휴게소에서 지내고 싶어 하는 눈치다.
그래서 우선 너른 휴게소 1층과 2층을 임시 숙소로 정하고, 부족한 부분은 밖에 지어놓은 근로자 대기소와 숙소를 이용하기로 했다.
약속대로 다들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왔지만, 아직 천무용과 김정현 대표 가족이 도착하지 않았다.
천무용은 검사로서의 소임을 끝까지 다하고 마지막에 합류하고자 했다. 그래서 천상진이 형수와 조카만 데리고 오는 중이다.
김정현 대표는 동생인 김진현을 데려오고 싶었다. 그런데 북부소방서 소방대장인 김진현은 계엄군이 떠나자 방화사건이 급증해, 계속 자리를 지켜야 한다며 극구 거절하고 있다.
생존팀은 그의 도움을 받아 제독 장비와 방사능오염에 대비한 각종 장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생존팀에 합류하길 원하면 김진현의 가족도 따로 방 하나를 배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직원들과 함께 최후까지 시민을 돕겠다고 한다.
동주는 강대주의 부탁으로 그의 처와 딸을 데리고 왔다. 이제 가족이 이곳에 있는 이상 강대주가 변절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송은수와 그 가족도 아직 올 수 없는 형편이다. 동주는 내일 한빛 대학병원에 가 은수의 상태를 살피고, 태호와 함께 합류하게 할 생각이다.
동주의 여동생인 동아는 한빛 대학병원 간호사다. 그동안 태호와 동아가 의약품과 비상약, 수술 도구 등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외과 의사인 태호가 동참하면 든든할 것 같다.
장재건의 아들 장영수는 광주지역에서 유명한 가수이자 기타리스트다. 라이브카페와 기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장재건은 아들이 공부를 잘해 판사나 검사가 되길 바랐다. 그런데 기대에 부응하는 자식이 얼마나 있겠는가? 영수는 줄곧 공부와는 담을 쌓고, 음악 쪽에만 관심을 두었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인 장재건은 아들을 때리기도 하고, 기숙사에 가두기도 했다. 공은 누르면 더 튀는 법. 영수는 아버지 등쌀이 싫어 고등학교 때부터 가출을 밥 먹듯 했다.
결국 부자지간의 사이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영수가 가수를 한다고 집을 나간 이후로는 서로 원수라도 된 것처럼 모르는 체하며 지냈다.
그런데 아포피스 사태가 벌어지니 맨 먼저 생각나는 게 아들이었다. 장재건은 이번에 영수가 운영하는 기타학원을 처음 가보았다.
어린 학생들의 고사리손을 잡아 기타 운지를 교정해주는 다정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다.
그를 믿고 따르는 많은 학생, 성인반 원생, 그의 무대에 열광하는 많은 관객을 보고 마음을 바꿔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장재건은 아들에게 사과하고 뜨거운 포옹을 했다. 덕분에 생존 벙커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고, 이번에 함께 하게 됐다.
영수는 생존팀에 큰 활력소다. 모두 처음 만난 어색한 사이라 서로 서먹했다. 그런데 영수가 기타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자, 분위기가 사뭇 가볍고 경쾌해졌다.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있던 가슴들이 조금씩 펴지고, 마음의 여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은 틈만 나면 영수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졸랐다.
부탁만 하면 노래방 기계처럼 동요부터 팝까지 술술 나왔다. 멋들어진 기타반주에 맛깔난 노래 솜씨, 생존팀 사람들 모두 장영수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오승현 교수는 아내 김순미와 딸 오송이 만을 데리고 왔다. 며칠 전 오 교수가 조용히 동주를 찾았다. 그리곤 애인 신은혜를 부탁했다.
동주가 가족으로 여동생 동아만 데리고 왔기에, 그에게 여분의 두 자리가 있었다. 신은혜를 사촌 동생인 것처럼 해서 생존팀에 끼워달라는 거다.
동주는 찜찜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 교수의 공이 누구보다 큰 상황에서, 게다가 한 명을 더 데리고 올 수 있는데도 굳이 한자리를 비우기까지 해서,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동주는 동아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른 사람들에겐 신은혜를 사촌 동생이라 소개했다.
신은혜는 한빛 대학 성악과 조교로 이제 서른을 갓 넘긴 나이다. 오 교수가 50대 초반이니 그와는 스무 살가량의 차이가 있다.
오 교수는 대학본부 행정처에서 일한 적이 있다. 공과대 학장이 대학 총장에 선출됐고, 그가 도와달라고 해 한동안 대학 예산편성이나 감사와 같은 업무를 도맡아 했다.
그때 음대 쪽 일을 봐주다 조교인 신은혜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성악과 정기 연주회 때 그녀의 노래와 자태를 보고 더욱 사랑에 빠지게 된 오 교수는 오랫동안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짝사랑해왔다.
사귀던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삐걱대고 있던 신은혜는 어느 날 만취해 대학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조교실에 두고 온 가방을 가지러 가는 중이다. 비틀비틀, 이기지 못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금방이라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공대 앞을 나서던 오 교수는 신은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너무 취해 갈지자로 걷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공대 앞에 있는 큰 호숫가 길을 걷는데, 비틀거리는 게 자칫하면 물에 빠질 듯 위태롭다.
오 교수는 용기를 내 신은혜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때마침 그녀가 발을 헛딛어 그만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다.
호수는 그 깊이가 성인 남자의 가슴 정도였다. 그런데 만취한 신은혜는 바닥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둥지둥 물장구를 치며 그대로 가라앉을 모양이다.
오 교수는 급히 달려가 양복 입은 채 그대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리곤 신은혜의 허리와 다리를 붙잡아 끌어안은 뒤 물 위로 들어 올렸다.
그녀의 온몸이 물풀과 진흙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오 교수도 구두가 진흙에 빠지고, 시궁창처럼 텁텁한 물에 온몸이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신은혜를 구할 수 있어 너무도 마음 뿌듯했다. 그녀를 안고 있는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녀는 쾨쾨한 호숫물을 들이마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콜록, 콜록 기침한 뒤 입 안에 있는 것들을 뱉어냈다.
오 교수는 천천히 걸어 호수 밖으로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죽을 고비를 넘기느라 술이 확 깨버린 그녀는 오 교수를 단박에 알아봤다.
지난번 성악과 예산편성 때 오 교수가 많은 배려를 해줘, 덕분에 성악과 지도교수에게 큰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성악과 정기발표회 때도 오 교수가 직접 와 끝까지 공연을 관람하고 가는 걸 먼발치에서 보았다.
자주 눈에 띄어 언제부턴가 의식하고 있던 분이다. 그런데 무슨 인연인지, 오늘 그분이 날 구했다.
분명 잘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땅이 푹 꺼지는 듯하더니 물에 쑥 빨려들고 말았다. 겁먹고 얼마나 팔을 저었는지, 몸이 돌처럼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발버둥 치다 또 얼마나 호숫물을 마셨는지!
아, 이제 정말 죽는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어디선가 기사처럼 나타나 날 번쩍 들어준 분이 바로 오 교수님이라니! 너무도 고마웠다.
오 교수는 그 일을 계기로 신은혜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게 됐다. 처음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였다가, 점점 마음이 닿아 매 순간을 함께 하는 듯했다.
박사 논문 심사를 앞두고 있던 그녀는 오 교수로부터 논문작성이나 발표 방법에 관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오 교수는 그녀 덕에 잊었던 청춘의 열정을 떠올리고, 풋풋한 감성을 채웠다.
어느새 수줍은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서로 육체적으로도 교감을 나누는 사이로 발전했다.
오 교수는 믿음직한 아내 그리고 사랑하는 딸과 함께 가꿔온 가정을 쉽게 버릴 수 없었다. 신은혜와의 사랑 또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오 교수를 사랑하기 시작한 뒤부터 가슴 한편이 휑하니 빈 느낌으로 살게 됐다. 오 교수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늘 매우 짧았다.
일주일에 한, 두 번, 만나도 서, 너 시간을 넘길 수 없었다. 함께 여행 가는 건 물론, 사람 많은 곳에서 오붓하게 식사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늘 한적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짧게 사랑을 나누고, 숨기 바빴다.
연말이나 크리스마스, 휴가나 연휴와 같이 연인들이 오랜 시간 함께 보낼 시즌이면 이들은 더욱더 만나기 어려웠다. 그때마다 신은혜는 외로움에 사무쳐 힘든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몇 번이고 헤어지려 했고, 몇 번이고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오 교수는 어서 좋은 남자를 만나라고 했다.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될 때까지 그때까지가 자신의 역할이라고. 그 이후에는 말없이 사라지겠다고.
신은혜는 몇 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오 교수와 비교하며 만나는 사람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연애 기간은 매번 짧았고, 그때마다 다시 오 교수에게 돌아가곤 했다.
오 교수는 자신 때문에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정착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녀가 날 붙잡는 게 아니라 내가 그녈 붙잡은 것이다. 내가 사랑한다 말하고, 우리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건 내 소유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젊음을 탐하고, 연애 감정을 탐하며, 풋풋한 감성을 탐할 뿐 그녀의 미래나 외로움은 뒷전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더 의존하고, 허황된 환상의 늪에서 더욱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녀의 외로움과 이별은 나의 작품임을 깨닫게 됐다.
가족을 버리고 그녀에게 갈까도 셀 수 없이 고민했다. 연애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이는 환상이지만, 결혼은 냉엄한 현실임을 잘 알기에 멈춰 서고 만다. 언젠가 모든 걸 잃고 혼자 남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 생각까지 이르자 더는 그녀와 함께 할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 그게 그녀와 나를 위한 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냉정한 말들을 쏟아부었다.
오 교수는 자신이 그녀에 대해 가지는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미래를 함께 그리지 않는 마음은 아무리 열정적이고 순수하더라도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사랑, 세상의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며 허울 좋은 이름들을 짓고 서로를 위로했지만, 모두가 허상이다.
시간이 쌓이고 그 사이사이 고통이 깃들어 가면 언젠가 그 알맹이 없는 빈 껍데기 실체가, 그 민낯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난 지금껏 사랑이란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어 있었을 뿐, 그 사랑의 실체는 다름 아닌 외로움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이기심에 불과하다고.
우리 관계는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이라고. 아무리 사랑을 쏟고 정성을 다해도 서로에게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그런 이상한 관계라고. 이제 진짜 이별을 선언한다고.
오 교수는 그렇게 벌써 두 달째 그녀와 연락을 끊고 살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 출발 하기를 바라며,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음을 깨닫고 배수진 치기를······, 진정한 사랑을 찾아 오래오래 끊이지 않을 사랑 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아포피스가 떨어진다고 하니, 그녀를 험한 세상 끝에 홀로 남겨둔 것만 같았다. 그녈 놔두고 생존 벙커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그래서 그만 다시 금단의 열매를 먹고 말았다.
그녀에게 연락해 만났고, 그곳에서 다시 사랑을 나눈 뒤 함께 아포피스를 맞자고 약속하고 말았다.
죽음 앞에선 모든 게 무의미함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 순간 누구와 함께하길 바라는지, 지금 이 순간 누굴 사랑하고 누구와 잠들기를 바라는지 그게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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