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계엄군 내전 (3)
아포칼립스 D-6, 2029. 4. 8.(일) 오후.
드론을 타고 공중에서 상황을 살피던 최용석이 박석진에게 박격포 부대와 드론 2개 소대 전멸, 그리고 매복했던 보병부대 붕괴 소식을 전했다.
박석진은 전세가 기울어 더 싸워본들 희생자만 양산할 뿐임을 직감했다. 김성철이 노리는 건 바로 나다. 더 큰 희생을 줄이기 위해선 내가 먼저 항복해야 한다.
최용석과 휘하 병사들에게 백기 투항하겠다고 알렸다. 대신 너희들은 살길을 찾아, 가능하면 멀리 떠나라고 지시했다.
부대원들 모두가 눈물을 흘리며 만류했으나, 박석진의 의지를 꺽지 못 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무전기를 들었다.
“3대대장 중령 박석진이다. 더 이상의 피는 원하지 않는다. 조건 없이 투항하겠다.”
박석진은 백기를 들고 혼자서 본부 앞 광장으로 나아갔다. 토우 지프도 속속 본대로 복귀했다. 곳곳에 숨어 있던 병사들까지 백기를 들고 광장으로 나온다.
빌딩 숲 사이로 먼지 바람이 몰아쳤다. 무너진 빌딩과 파괴된 도로 사이로 지축을 흔드는 궤도 굉음이 울려 퍼진다. 길게 뻗은 포신이 하나, 둘 보이더니 어느새 기갑 탱크들이 광장 주변을 에워쌌다.
김성철은 확성기를 들고 탱크 위에 섰다.
“모두 총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 꿇어!”
엉거주춤 서 있던 3대대 병사들이 옆에 총을 내려두고,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모두 머리 위로 손 올려!”
광장에 모인 100여 명에 이르는 병사들은 모두 풀이 죽은 채 명령에 따랐다.
그때 본대 뒤편 능선에 숨어 있던 남수혁 부대가 언덕에서 내려와 광장 쪽으로 향한다. 남수혁은 승리에 도취해 큰소리로 외친다.
“으하하! 내 작전이 어때? 바로 이거라고. 애들아! 우리가 이겼다. 만세! 만세!”
총을 든 손을 높이 들어 흔드는 남수혁.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그의 분위기에 이끌려 나머지 조직원들도 환호성을 치기 시작했다.
“만세, 만세!”
탱크 위에 있던 기관총 사수와 나머지 1대대 병력도 하나 같이 만세를 외치며 승리를 기뻐했다. 남수혁은 광장에 모인 3대대 패잔병 앞에 섰다.
“야, 이놈들 꼴 좀 봐라. 진작 항복했으면 이 꼴은 면했을 거 아니야? 애들아! 무기들 챙겨.”
서강파 조직원들은 병사들 옆에 놓인 총과 무기를 모조리 수거해 트럭에 실었다. 남수혁이 기쁨을 나누고자 김성철에게 다가갔다.
“고생하셨습니다. 대대장님!”
“다 자네 덕분이지. 그나저나······, 저 박석진은 어떻게 할까?”
김성철은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 직접 박석진을 처형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저놈의 입을 막아야 해서, 죽일 생각이다. 남수혁은 금방 김성철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거야, 여기에선 어렵겠죠. 제가 알아서 처리해드릴까요?”
“흐음! 그, 그러면 좋지. 중요한 건 말이야, ······발포 명령을 저 녀석이 했다는 거야.”
“아, 물론이죠.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이곳은 제게 맡겨 두시고, 약속대로 이제 무등산으로 가시죠.”
김성철의 탱크부대는 이제 무등산 레이더기지를 치러 움직인다. 남수혁은 3대대 본부에 남아 패잔병을 정리하고, 이곳에 있는 무기와 장비를 챙겨야 한다.
우선 이곳에서 서강파와 함께 할 자원병을 모집했다. 아포피스가 떨어질 때 유일한 살길은 우리와 함께 하는 것뿐이라며 설득했다. 30여 명이 동참하겠다고 한다.
자원하지 않은 나머지 병사들은 군복을 모두 벗게 한 후 집이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는데, 잘 되었다며 다들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기 바빴다.
남수혁은 박석진을 끌고 3대대 본부로 들어갔다. 음습한 지하실로 끌고 가 두 팔을 밧줄로 묶었다. 그리곤 천정 기둥에 밧줄을 걸어 몸을 끌어 올렸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박석진. 팔이 떨어져 나갈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남수혁은 몽둥이로 박석진의 온몸을 패기 시작한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입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배와 옆구리 피부가 멍들더니 금세 피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악! 제발, 살려줘. 으윽! 죽일 거면, 제발 빨리 끝내줘! 아악!”
남수혁이 아래로 내리라고 지시했다. 밧줄이 천천히 내려왔다. 박석진의 발이 바닥에 닿았지만 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지고 만다.
“자, 여기 종이 줄 테니까, 자술서 한 장만 써.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알았지?”
남수혁은 잘 감시하라고 지시한 뒤 자리를 떴다.
박석진은 시위대에 발포 명령한 게 자신이라는 취지의 자술서를 써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고통이 계속 반복될 것이다.
전장에서 패배해 이미 의기를 상실한 박석진. 하지만 군인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자 했다.
자신을 따르던 많은 부하가 전장에서 용감하게 죽음을 맞았는데, 어리석은 지휘관은 비겁하게 살아 이렇게 숨 쉬고 있다. 부끄럽다.
박석진은 종이와 볼펜을 받아 들었다. 몸통이 하얗고 날렵한 일반 플라스틱 볼펜이다. 목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목젖 좌우 3cm 부근에 경동맥이 있다. 이곳을 단번에 찔러야 한다.
박석진은 자술서를 쓰려고 하니 밧줄을 느슨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묶인 밧줄이 조금 풀리자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경비가 방심한 듯하다.
박석진은 두 손으로 볼펜을 쥐고는 곧바로 자신의 경동맥을 찔렀다.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동맥에서 붉은 핏줄기가 튀어나왔다.
박석진은 그 자리에서 꼬꾸라져 머리를 바닥에 세게 부딪쳤다. 놀란 경비가 급히 다가와 흔들어 보았지만, 이미 동공이 풀리고 의식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육군 제10사단 503보병여단 1대대장 중령 박석진은 이렇게 패배의 모든 책임을 안고 장렬히 최후를 맞았다.
* * *
같은 시각 일곡동 상공에 있다 대피한 최용석은 멀리서 박석진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모습을 보았다.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정의가 이겨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런 악한 인간들을 돕다니!
이미 3대대 본부를 적들에게 빼앗겨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소대원들을 설득해 살길을 도모해야 한다.
최용석은 남은 드론부대와 투항하지 않은 병사들을 5km 북쪽에 있는 패밀리랜드 놀이동산 주차장에 집결하게 했다.
드론 4대와 20여 명의 병사가 모였다. 최용석은 그곳에서 지리산 생존 벙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집이나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은데, 만약 혹시 모를 소행성 충돌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함께 하자고 제의했다.
그중에서 드론 병 2명과 병사 3명이 함께 하겠다고 한다. 최용석은 합류한 이들과 함께 나머지 병사들의 드론과 총기를 수거해 정령치 휴게소로 향했다.
* * *
동주는 상진과 함께 드론을 타고 한빛 대학병원을 방문했다. 꽃이라도 사 들고 가고 싶었지만, 시내 어디에도 문을 연 가게가 없었다.
고속도로는 벌써 피난 행렬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북쪽 방향 노선에 있는 차들은 거북이걸음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도심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부서지고 불에 탄 차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화염병 파편과 깨진 벽돌이 도로에 무수히 흩어져 있고, 시위대가 뿌린 전단과 삐라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한빛 대학병원 응급실에는 밀려온 환자로 가득했다. 시위과정에서 다친 사람, 약탈과 방화로 피해를 본 사람, 작은 규모 병원들이 문을 닫아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환자들이다.
은수는 어젯밤 응급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겨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동주와 상진이 병실에 들어갔을 때, 은수 옆에는 태호와 은채가 있었다.
동주를 바라보는 은수의 눈빛이 왠지 차갑게 느껴진다. 은채도 썩 반가운 기색이 아니다.
“은수야! 몸은 좀 어때?”
누워 있던 은수가 은채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앉는다.
“어, 머리가 좀 아픈데,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
얼굴에 난 상처에 습윤밴드를 붙이고, 왼쪽 눈의 멍도 옅어져 어제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형규가 저지른 만행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호야!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생존팀 전부 벙커로 집결했거든. 은수 몸은 좀 어때?”
“다행히 영양제 맞고, 어제 잘 잤더니 수치는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렇게 심각한가요?”
태호는 병원에만 있어 밖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응, 방금 연락받았는데, 서강파와 탱크부대가 결탁한 것 같아. 지금 계엄군끼리 내전 중이고. 어젠 전동기 사장 화학공장이 서강파 애들에게 털렸어.”
“아······!”
“서강파 애들이 이제 진짜로 레이더기지도 치러 갈 것 같아. 그다음엔 우리 쪽일 것 같고. 그나저나 은수랑 너도 합류해야지?”
“네, 저희도 그러기로 했어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은수가 아직은 힘들어해서, 며칠은 더 치료해야 할 것 같아요.”
“그, 그래야지.”
동주는 걱정이 앞섰다. 차량으로는 정령치 휴게소까지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다. 도로가 피난 행렬로 가득 차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서강파가 계엄군까지 장악해 광주를 지배하면, 드론으로 은수를 데려가는 것도 어려울 수 있다. 그땐 진짜 걸어서 가야 한다. 제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은수야! 그동안 동주가 너 찾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동주 일행을 맞는 분위기가 어쩐지 이상해, 답답해진 상진이 거들고 나선 것이다.
“무, 무슨 소리야.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지. 우리 팀원인데······.”
동주는 상진의 어깨를 잡고는 더 언급하는 걸 만류한다. 아직 가족들은 은수가 어떻게 구출된 건지 모르고 있다.
동주가 그동안 얼마나 애썼는지도 알지 못한다. 형규 짓임을 알게 된 후 동주는 미안함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수야! 몸 잘 챙기고 있어. 움직일 수 있게 되면 그때 다시 데리러 올게.”
동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눈빛을 보낸다.
“그래, 오빠! 바쁠 텐데, 일 잘 보고.”
은수는 힘없이 손을 흔들고 다시 천천히 눕기 시작한다. 동주는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상진과 함께 병실을 나왔다.
몸은 조금 좋아졌을지 몰라도,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다. 형규가 어떤 짓을 저지른 건지는 지하실에서 처음 본 은수의 모습을 보고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비열한 놈! 분노가 치밀어 올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만나면 그놈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나도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철저히 친구를 속여왔다. 검은 흑막을 숨기고, 마치 친구로서 모든 걸 도울 것처럼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곤 우리 정보를 빼내 서강파에 고스란히 넘겼다.
정마리아와 결탁한 걸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몹쓸 짓을 많이도 했을 게 분명하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에, 사이코패스였던 거다.
은수 일은 친구를 잘못 두고, 그 녀석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 책임이다. 은수가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통받을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하다.
동주는 마치 모든 죄를 자기가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은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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