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전운(戰雲)
아포칼립스 D-5, 2029. 4. 9.(월) 오후, 남원 화학공장.
전동기가 어서 나와야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그때 사무실에서 큰 소리가 들리고, 공장 동과 마당에 있던 서강파 조직원들이 주위를 살피며 황급히 사무실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제길! 남수혁이 먼저 전민국의 도주 사실을 알린 것 같다. 이미 전동기를 제압하고 우리 공격을 대비하고 있는 눈치다.
용석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여기에서 멈추고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과감히 쳐들어가 적을 제압하고 전동기를 구출할 것인지.
그냥 돌아가기엔 너무 면목이 없다. 군인 세 명과 저격수 출신 장영수까지 출동했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쳐들어갔다간 총격전을 피할 수 없을 테고, 이쪽도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때 공장 사무실 2층의 유리창이 열리고, 차례로 두 대의 정찰 드론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주변을 수색하려는 눈치다.
전동기에게 보낸 문자가 들통 난 게 분명하다. 우리 전투 드론의 위치까지 발각됐다. 녀석들이 우리 병력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섣불리 나가지 않고, 우선 버티는 작전이다.
남수혁이 이쪽으로 병력을 보낸 게 분명하다. 얼마 뒤면 적들이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용석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동주에게 전화했다.
그런데 신호가 가지 않는다. 통신이 끊겨 그런 건지,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지 답답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정체도 드러나고, 위치까지 들통 날 상황이다.
어쩔 수 없다. 용석은 일행에게 드론을 격추하라고 지시했다. 영수는 조준경으로 드론을 겨냥하기 시작한다.
“탕!”
역시 명사수답다. 단 한 발을 쏘았을 뿐인데, 드론의 몸통을 제대로 저격했다. 드론은 ‘파싹’하는 소리를 내더니 바로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탕, 탕”
드론병 둘이 동시에 나머지 하나 남은 드론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런데 모두 빗나갔다. 비행 중인 조그만 드론을 저격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정찰 드론이 총성이 난 방향을 감지하고, 이쪽으로 본체를 틀어 다가온다.
“탕!”
장영수가 다시 조준한 후 곧바로 드론을 향해 발사했다. 이번에도 정확히 드론의 몸통을 맞추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드론에 불이 붙어 추락했다.
다행히 적의 눈을 가렸지만, 그렇다고 전동기를 구출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무모하다. 언제 남수혁의 지원군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더 이곳에 있는 건 무의미하다.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지원군에게 포위돼 위험할 수 있다. 안타깝지만 전동기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용석 일행은 서둘러 몸을 숨기고 있던 동산에서 빠져나왔다. 재빨리 뒷쪽 공터로 가 그곳에 숨겨 둔 드론에 탑승했다. 이들은 아무런 소득 없이 지리산으로 돌아가야 해 마음이 무거웠다.
* * *
강창배는 강대주 일행이 전민국을 빼내 도망치자, 곧바로 그 사실을 남수혁에게 보고했다. 남수혁은 강대주가 배신할 걸 이미 예상했었다. 그때가 언제인지만 문제 된다고 보았다.
그동안 몰래 강대주의 행적과 그 부하들을 조사해, 이상한 점을 여럿 발견했다. 강대주는 세븐스타와 결별한 이후 아내와 이혼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위장 이혼 같았다.
줄곧 아내와 딸을 만나고, 재산을 아내 명의로 빼돌려 놓은 걸 확인했다. 서강파가 아파트 재개발 사업이나, 대규모 군납 사업을 통해 확보한 비자금은 모두 강대주가 직접 세탁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돈이 새나간 정황이 발견됐다.
장부상의 내용과 현금 시제가 맞지 않아 여러 차례 캐물었는데, 그때마다 강대주는 해외 브로커에게 현금으로 지급하는 세탁비용이라며 영수증이나 증빙자료를 확보할 수 없는 돈이라 둘러댔다.
국내 환전상이나 사채업자를 이용해 세탁했다면, 쉽게 꼬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해외 비밀계좌와 마카오나 파나마에 있는 환전상을 이용해 비자금을 세탁했기에, 의심이 가지만 아직 확실한 물증까지는 확보하지 못했다.
남수혁은 기오성에게 이런 사실을 일러바쳤고, 그는 강대주에게 자금세탁 장부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강대주는 떳떳하다며 가진 장부 전부를 기오성에게 전했다.
기오성은 회계 쪽엔 젬병이라, 장부만 봐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회계에 정통한 몇몇 사람에게 장부를 보내, 강대주가 말하는 세탁비용이라는 게 무엇이고, 적정한지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비자금 전문 회계사를 찾는 게 만만치 않아, 시간이 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즈음 곽형규가 강대주의 의심스러운 정황을 알려줬다. 지리산 생존팀에 물자를 제공하고, 천 검사를 만난 듯하다. 그 때문에 더욱 변절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야수의 본능을 지닌 남수혁은 비록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동물적 감각으로 강대주의 배신을 확신하고 있던 것이다.
남수혁은 곧장 전동기가 있는 남원 화학공장에 연락해, 그쪽으로 지리산 팀이 공격해올 것이니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서강파 조직원들은 곧바로 전동기를 붙잡아 그의 휴대폰을 빼앗았다. 전동기는 동주에게 온 문자는 보자마자 곧바로 지웠다. 그런데 방금 최용석이 확인차원에서 다시 문자를 보낸 게 화근이 되고 말았다.
조직원들은 용석이 보낸 문자를 보고는 탈출계획을 알게 되었고, 곧장 공장과 밖에 있던 조직원을 불러들인 후 사무실 문을 모두 잠그고 방어태세를 갖췄다.
그리곤 남수혁에게 지리산 쪽의 계획을 알린 뒤 지원부대를 요청했다. 남수혁은 방금 광주교도소에서 나와 동성파 조직원들과 함께 새로운 부대를 결성한 김필구에게 남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그곳에 주둔하면서 공장을 지키고, 지리산 쪽 애들이 나타나면 섬멸하라고 지시했다. 김필구는 지프 1대와 트럭 3대에 20여 명의 중무장한 부대원을 태우고 남원을 향했다.
이들이 남원 공장에 도착했을 무렵 최용석 일행은 이미 지리산으로 떠난 뒤였다. 기존에는 다섯 명의 조직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이제 중무장한 김필구의 부대까지 가담해 그곳은 더 이상 누구도 넘볼 수 없게 됐다.
더욱이 지리산 생존 벙커와 가장 가까운 남원 공장에 김필구 부대가 자리 잡아, 지리산 쪽은 더욱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남수혁은 무등산 레이더기지로 가, 직접 기오성에게 강대주의 배신과 도주 사실을 알렸다.
“으이구!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끝내 강대주 이 자식이 배신을 때리는구만.”
“회장님!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자식 음흉한 놈이라,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고요.”
“야! 난들 그걸 몰랐겠어? 그 신기수 놈이 문제야. 내가 몇 번이나 물었거든. 강대주 그놈 믿을 수 있냐고. 그랬더니 뭐라 한 줄 알아? 세븐스타 쪽으론 절대 안 넘어간다는 거야.”
“카! 기수 형님, 정말······.”
“어이구, 세븐스타 문제가 아니라, 완전 도둑놈 하나 키우고 있던 거야. 대충 어림잡아도 30억 원은 빼돌린 것 같다는데, 이런 날 강도 같은 놈 하고는······.”
기오성은 화를 참지 못하고, 탁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뭉치를 집어 벽을 향해 내던졌다. 남수혁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을 응시하고 있다. 경직된 모습과 달리 입가엔 미소가 묻어 있다.
“회장님! 그나저나 임안나 씨까지 같이 데려간 게 조금······.”
“하아, 이 새끼들이 날 완전히 엿 먹인 거지, 안나까지 데려가! 이놈들 간이 배 바깥으로 튀어나온 거 아니야?”
“거기다 그 벙커를 만든 주역 중의 하나가 천 검사 동생 아닙니까! 이번에 일 처리 하는 거 보니까 천 검사가 뒤에서 많이 도운 것 같습니다.”
“그래? 음······, 우리가 천 검사한테 갚아야 할 빚이 좀 있지?”
기오성의 말투가 갑작스럽게 차분해졌다. 천 검사에 대한 복수심이 다른 모든 흥분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럼요, 아주 많지요. 제가 그렇지 않아도 얘들 시켜서 천 검사 뒤를 밟게 했습니다. 기회를 봐서 확 질러 버리려고 했는데, 이놈이 귀신같이 알고 튀었다 하네요. 아마 지리산으로 간 것 같습니다.”
“수혁아! 넌 그게 문제라고. 꼭 한발 늦는단 말이야, 쯧!”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래서 그런데 이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바로 치러 가시죠.
우리가 생존 티켓을 너무 팔아서, 이러다 나중에 우리끼리 싸움날 수 있다니까요. 거길 반드시 빼앗아서, 우리 사람들을 넣어야 합니다.”
“여기 벙커 공사가 더 급한 거 아니야? 시간 안에 끝낼 수 있어야 하는데······.”
“아이, 그거야 기수 형님이 잘하시겠죠. 저는 공사야 잘 모르니까, 제가 잘하는 거나 해야죠, 헤헤!”
“하긴, 너나 나나 공사하는 덴 별 도움이 안 되지.”
“전 그동안 저 지리산 벙커도 빼앗고, 웬수 놈들 확실히 쓸어버리겠습니다.”
“좋아, 내일 당장 공격해! 그리고 거기 가서 강대주하고 천 검사 그 자식 꼭 잡아와, 내 그놈들을 직접 갈기갈기 찢어 죽일 테니까, 알았지?”
“회장님! 제 마음이 딱 그겁니다. 하! 제가 화를 잘 참아야 할 텐데. 현장에서 그놈들 보면 미쳐서 그냥 도륙해버릴까, 그게 겁난다니까요.”
남수혁은 벌써 강대주 일행을 붙잡기라도 한 듯 김칫국을 마셔댄다.
“야, 남수혁! 이번만은 제대로 해라! 너무 방심하지 말고.”
“네, 회장님! 명심하겠습니다.”
“아무리 쟤들이 약해 보여도 옛말에 그런 말 있잖아,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조심히 접근하라고, 알았지?”
“아이고, 회장님! 걱정 붙들어 두십시오. 이번엔 탱크까지 끌고 가서, 덤비는 놈들은 다 싹 쓸어 버릴 테니까요.
아마, 항복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겁니다. 그놈들도 우리 화력 맛을 보면 금방 깨갱 할 테니까요.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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