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가오리 전투기

아포칼립스 D-5, 2029. 4. 9.(월) 오후, 담양 부근.
동주와 강대주 일행은 상진이 다시 드론을 끌고 올 때까지 우선 몸을 피해야 했다. 남수혁 일당이 언제든 쫓아 올 수 있어서다.
영산강 지류로 내려가는 걸 보았기에, 담양이나 북광주 쪽으로 이동해 동주 일행을 추격할 수 있다.
우선 영산강 상류 쪽으로 이동해, 담양 읍내로 몸을 피했다. 고속도로에서 벌어진 총격전과 전차포 사격으로 전쟁 분위기가 나서인지, 읍내는 사람 한 명 볼 수 없을 정도로 썰렁했다.
상가는 모두 문을 닫아 젖은 몸을 말리거나 은신할 곳조차 찾기 어려웠다. 그때 멀리서 기관총을 탑재한 탑차 행렬이 보였다. 동주 일행은 모두 좁은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제길! 서강파 무리가 벌써 우릴 찾으러 담양 일대를 수색하고 있다. 동주는 일행과 함께 골목길을 통해 죽녹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담양읍 향교리에 있는 대나무숲 공원이다. 약 16만㎡의 구릉에 울창한 대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그 아래로는 관방제림과 메타세콰이어길이 길게 늘어져 있다.
도롯가로 이동하다가는 영락없이 발각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산길을 통해 조심스럽게 이동해야 한다.
무전기를 가지고 있지만, 물에 빠지면서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상진과 헤어질 무렵까지만 해도 작동이 되던 게 지금은 고장이 난 듯하다.
상진과 만약 서로 연락이 안 되면 최후에는 금성산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어쩔 수 없이 그곳까지 걸어가야만 한다.
동주는 일행을 끌고 죽녹원에서 담양호 방면으로 산길을 따라 이동했다. 한참 울창한 대나무 숲길을 걷고 있을 때, ‘쒜엑’ 날카로운 비행 소음이 귀청을 때린다.
그 뒤로 다시 ‘쉐엥’ 하는 소리와 함께 여러 대의 전투기가 먼 하늘을 가로지른다. 뒤이어 기관총과 미사일 소리까지 들렸다.
동주 일행이 걷고 있는 담양호 주변 숲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담양리조트 부근에 미사일이 떨어졌다. 저 멀리 엄청나게 큰 불길이 치솟고 있다. 전투기끼리 싸움이 붙은 것이다.
일행은 놀라 바위와 나무 뒤에 숨었다.
서강파가 전투기까지 가지고 있진 않은데, 이게 무슨 일이지? 공군에서 서로 치고받고 하는 걸까?
동주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가 상황을 살폈다. 납작한 삼각형 모양의 독특한 전투기다. 대한민국이 보유한 F-15, 16, 35 전투기는 모두 일반 비행기처럼 유선형 디자인이다.
그런데 저 비행기는 마치 홍어나 가오리처럼 납작한 삼각형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빠른 속도에도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고, 심지어 급격하게 속도를 줄이거나 가속하는 모습이다.
세 대의 비행체가 앞서 날고 있는 한 대의 비행체를 계속 쫓고 있는 형국이다. 어떻게든 격추하려고 미사일이나 기관총을 쏴대고 있다.
도주하는 녀석은 누가 조종하는 건지 기상천외한 비행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중으로 갑자기 솟구치다가 쫓아 오는 녀석들이 접근하면, 어느새 180도 방향을 바꿔 땅으로 꼬꾸라지며 처박을 듯 가속도를 붙여 내리꽂는다.
그러다 지면에 닿을 듯 떨어진 순간 갑자기 몸을 틀어, 지표면에서 불과 몇 미터 남겨두고 바닥을 훑으며 다시 비상하기 시작한다.
와! 어떻게 저런 비행이 가능하지? 어느새 두려움을 잊고 경탄하며 비행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때 추격하던 세 대의 비행체가 작심한 듯 동시에 연달아 미사일을 발사했다. 무려 10여 발에 가까운 미사일이 쏟아져 나왔다.
전투기가 적기를 요격할 목적으로 쏘는 게 공대공 미사일이다. 미국제 전투기에 탑재된 것 중 가장 유명한 게 AIM-9 사이드와인더(sidewinder)다.
표적의 열을 추적하는 적외선 유도 방식이다. 최신식 모델은 조종사 헬멧에 장착된 '자동조준장치(JHMCS: Joint Helmet Mounted Cueing System)'와 연동돼, 조종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공중표적에 유도공격이 가능하다.
저런 10여 대의 공대공 미사일이 한 대의 전투기를 겨냥해 발사되면, 백이면 백 피하지 못하고 격추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오리 전투기 이 녀석은 달랐다.
담양호로 내려가 수면에 닿을 듯 저공 비행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미사일들도 포물선을 그으며 아래로 비행해 수면 바로 위에서 추격하고 있다. 잔잔했던 호수에 길고 날카로운 파동이 퍼져 나간다.
이때 가오리 전투기가 담양호 수면을 겨냥해 미사일을 발사했다. ‘쉬잉’ 날아간 미사일이 수면을 충격하며 폭발했고, 그때 발생한 커다란 물보라가 가오리 전투기와 뒤를 쫓던 미사일 위로 쏟아졌다.
그러자 가오리 전투기가 급하게 공중으로 방향을 틀었다. 쏟아지는 물보라로 잠시 열추적 기능에 오류가 발생한 미사일들이 목표물을 놓쳐 계속 물 위를 날고 있다.
가오리 전투기는 큰 원을 그리며 급하게 방향을 틀어, 어느새 적의 미사일 뒤편으로 날아와 기관총으로 요격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10여 발의 미사일이 모두 격추돼 담양호로 처박히고 있다.
그때 뒤를 쫓던 세 대의 전투기가 기관총을 난사하며 따라붙는다. 이런! 미사일 공격은 피했는데, 이번 기관총 공격은 아무래도 너무 가까운 거리라 피하기 어려울 듯하다.
역시나, 오른쪽 날개에 기관총 총탄이 연달아 박히고 말았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휘청휘청 방향을 잡지 못한다. 담양호 너머로 달아나기 위해 고도를 높이다가, 이제 버티지 못하고 추락하기 시작한다.
엥? 그런데 이게 뭐지? 추락하는 가오리 전투기가 동주 일행이 있는 금성산성 길 숲 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동주 일행은 모두 바위 뒤로 숨었다. ‘피융!’ 가오리 전투기가 이곳으로부터 200여 미터 앞쪽 산 중턱에 떨어졌다.
‘쿵, 콰광!’
큰 폭발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기 시작했다. 주변 나무들이 함께 불타올라 산불이 일어나고 말았다. 어라! 어서 서둘러 이곳을 피해야겠다.
산불이 담양호 주변 산에서 번져 점점 금성산성이 있는 산성산 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 동주는 일행과 함께 금성산성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동주 일행이 걷고 있는 산길 옆 낭떠러지 끝에 낙하산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그곳 바위 사이에 있는 커다란 나무에 낙하산 천과 줄이 뒤엉켜 있다.
다가가 아래를 바라보니 절벽에 붙어 있는 썩은 고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조종사의 모습이 보인다.
딱 보아도 전투기 파일럿이 입는 복장이다. 헬멧을 쓰고 있어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추락한 가오리 전투기 조종사인 게 분명하다.
전투기가 화염에 싸이자 급하게 비상탈출했고, 너무 낮은 고도에서 탈출하는 바람에 낙하산이 제대로 펴지지 않은 것 같다.
다행히 낙하산 줄이 낭떠러지 위 나무와 절벽 썩은 고목에 걸려 당장 목숨은 구한 셈이다. 하지만 이곳은 적어도 100여 미터 높이는 될 듯한 낭떠러지, 아래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즐비하다.
하필 낙하산 백팩 부분이 고목에 걸려, 절벽이 아닌 반대쪽 허공을 바라보며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이 상태로는 혼자서 손 쓸 방법이 없다.
저대로 두면 고목이 부러져 결국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다. 어떡해야 하나? 그래도 사람 목숨은 구해야겠지. 동주는 어떻게든 도울 방법이 없는지 살피기 위해 낭떠러지 쪽을 향했다.
“살려주세요!”
여자의 목소리다. 동주를 발견한 여자 조종사가 애타게 구원을 요청하고 있다. 동주는 낭떠러지 끝자락 바위로 가서 조심스럽게 아래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조종사의 몸이 낙하산 줄에 연결되어 있고, 그 낙하산이 바위 위쪽 나무에도 걸려 있어 동주 일행이 손으로 붙잡을 수 있었다.
동주는 일행과 함께 그 낙하산 줄을 붙잡아 옆에 있는 큰 나무에 묶었다. 이제 추락은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론 절벽 고목에 걸려 있는 줄을 풀 차례다.
동주는 나뭇가지를 꺾어 긴 막대를 만든 후 조종사의 등 쪽 고목에 걸려 있는 줄을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 풀었다. 칭칭 감긴 부분이 풀리자 툭 하고 조종사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고, 낙하산 줄이 팽팽하여졌다.
조종사는 몸을 반 바퀴 돌려 벽을 바라보고 허공에 섰다. 이제 두 손으로 낙하산 줄을 잡고 두 발은 벽에 기댈 수 있게 됐다.
동주는 긴 나뭇가지를 건넸다. 나뭇가지를 잡자 위에서 힘껏 끌었고, 조종사는 벽에 발을 딛으며 천천히 낭떠러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바위에 손이 닿을 무렵 강대주와 일행은 조종사의 양손을 잡아 위로 끌어 올렸다.
바위 위로 올라와 앉은 조종사는 백팩을 벗고 목에 있는 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헬멧을 들어 올리자 바람에 긴 생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아리따운 여자다.
저 멀리 담양호 쪽으로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다. 태양 빛을 받아서인지 여자의 긴 머리가 마치 금발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다.
석양의 후광을 받아, 빛나는 아우라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얼굴과 몸 주변으로 환한 빛이 쏟아졌다.
너른 이마, 쌍꺼풀이 옅게 배인 커다란 눈, 오뚝한 코, 두툼한 아랫입술, 날렵한 턱선과 그 아래로 가녀린 목선, 한눈에 봐도 보기 드문 미인이다.
키도 1m 70cm가 훨씬 넘을 듯하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디 소속이세요?”
동주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낸 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가 어느 쪽 사람인지 궁금했다.
“어디 소속이라뇨?”
“아무래도 우리 공군 소속은 아닌 것 같아서요. 군인 맞아요?”
“아, 아니에요. 전 민간인이에요.”
“네? 무슨 민간인이 전투기를?”
“아,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쪽도 피신하는 중인 것 같은데, 우선은 같이 이동하시죠.”
서로 도망치는 처지라 마찬가지 신세였다. 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최대한 금성산성 쪽에 가깝게 가야 한다. 동주도 더는 묻지 않고 함께 걷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뭘까?’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