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양심
아포칼립스 D-5, 2029. 4. 9.(월) 밤, 지리산 생존벙커.
“아이! 영어식 이름 말고, 본명을 말해줘야죠.”
동주는 점점 더 스텔라에게 호기심이 갔다.
“실은 저도 궁금한데······, 그것밖에 몰라요.”
“네? 진짜요?”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에요. 어렸을 때 기억이 별로 없어요. 이상하게 어머니나 아버지 기억도 없고, 가족이나 형제들 기억도 없어요.”
스텔라의 표정이 애매하다.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럼 지금까지 어디에서 살았던 거에요?”
“전, 천지창조(the Creation)라고 들어보셨죠? 거기 비밀결사대 소속이에요.”
“아, 한국인이 수장으로 있는 그 유명한 종교단체 말하는 거 맞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네, 맞아요. 뉴욕에 본부가 있고, 일본, 중국에도 있죠. 전 일본에 있다가 뛰쳐나온 거에요.”
“아······, 왜 그곳에서 나온 거죠?”
동주는 점점 스텔라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뭔가 남다른 아우라가 느껴졌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 별천지에서 살아온 결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라 신기했다.
“그, 그건······, 뭐긴 뭐겠어요, 힘들어서지. 헤헤!”
뭔가 대답하기 난처하거나 힘든 상황 같다.
“한국 사람인 건 맞죠?”
“그럼요. 일본에서 근무했을 뿐이에요. 그곳에 있는 직원들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었으니까요. 교주님이 한국분이라, 간부들이나 주요 인사는 다 한국 사람이라고 보면 돼요.”
“그나저나, 중국 쪽으로 넘어가려고 하던 건 포기해도 되겠어요?”
“저도 살려고 그쪽으로 가려던 거예요. 그런데 여기도 만만치 않은데요, 뭐.”
“아! 그런가요. 보시기에 어때요? 본인이 전문가라고 했으니까······.”
“휴게소 안내문을 보니까 여기가 해발 1,000m가 넘더군요. 게다가 터널 내부에 뭔가를 잔뜩 채워서 지진을 대비한 것 같고. 그래핀으로 문도 단 거 보니까, 꽤 준비를 잘한 것 같아요.”
“하하!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아이! 뭘 그 정도 가지고······. 저도 이곳에 있으면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나 살펴본 것뿐이에요.”
“실은 할 말이 있어요.”
동주가 조금 뜸을 들이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뭐, 뭔데요?”
서강파 공격에 맞서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인력을 모두 동원해야 할 상황이다. 당장 내일 전쟁이 벌어질 것이고, 그때 총격전이나 드론을 이용한 공중전이 예상된다.
동주는 스텔라에게 서강파가 어떤 녀석들이고, 왜 이곳을 빼앗으려 하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우리를 도와 싸워줄 수 있는지 물었다.
“하하! 그거야 제 전공이니까,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제가 뭐랬어요? 꼭 필요할 거라고 말했죠?”
“고맙습니다. 초면에 어려운 부탁이었는데, 흔쾌히 받아주셔서.”
“아이! 아까부터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 딱딱한 거 아니에요? 이제 같은 편인데······. 그쪽 혹시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텔라가 갑자기 정색하며 동주의 나이를 묻자, 얼음처럼 굳고 말았다.
“저, 전 올해 서른셋인데요.”
“아이, 그럼 저보다 한참 많으신데, 제가 오빠라고 부를게요. 오빠! 괜찮죠?”
정말 당돌한 여자다. 동주가 이곳 생존팀을 이끄는 걸 알고 벌써 친분을 쌓으려 저돌적으로 파고드는 느낌이다.
“아, 물론이죠. 혹시 나이가?”
“하하! 편하게 하세요. 전 스물일곱이요. 계속 종교단체에서만 생활해서 여러모로 많이 부족할 거에요. 오빠가 저 좀 많이 도와주세요. 네?”
“아, 그래야죠. 이제 우리 생존팀인데, 하하!”
“하하하!”
동주는 그녀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넉살에 넋이 빠지고 말았다. 스물일곱이면 동아보다도 어린 나이다. 그런데 처음 본 동주에게 벌써 오빠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하고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그녀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 * *
강대주는 아내와 어린 딸을 다시 만나자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젖어왔다. 그동안 서강파와 생존팀 사이에서 박쥐 같은 생활을 해오며 마음고생이 많았다.
오늘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이곳에서 다시 사랑하는 가족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아내는 젊은 나이에 회계사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남편이 어느 날 교도소로 끌려가는 걸 보고 충격에 빠졌다.
가족을 위해 위장 이혼하자고 해서 지금껏 따로 살아왔지만, 실은 여전히 가족인 건 다름없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 느닷없이 조폭 생활을 하겠다고 해서 극구 말렸지만, 그의 뜻을 꺾을 순 없었다.
몇 년간 그가 돈벌이를 위해 나쁜 짓을 하는 걸 보며 그녀 역시 마음고생이 많았다. 최근엔 더는 남편과 함께할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계속 진짜 이혼을 요구하고, 딸과도 인연을 끊으라고까지 말했다. 조폭의 딸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다.
그런데 이번 아포피스 일을 계기로 정말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하겠다고 말해, 믿어보기로 했다. 그가 생존 시설로 갈 기회가 있다고 해서 믿고 따라나섰다.
강대주는 오기철의 상태를 확인하러 정령치 휴게소 2층으로 갔다. 그곳엔 송은수와 오기철이 따로 만들어 둔 병상에 누워 있었다.
오기철은 링거에 진통제를 넣어 맞고 있어선지 이제 살만한 표정이다. 아까까지는 허벅지 통증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다행히 포탄 파편이 아닌 콘크리트 파편이 박혀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염증만 잘 잡으면 내일부터도 조심스럽게 거동할 수 있을 듯하다.
그때 장재건과 아들 장영수가 휴게소 2층으로 왔다. 장재건은 은수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다. 은수가 최창민에게 잘 말해줘서 터널 안전진단 명목으로 길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 덕에 공사도 차질 없이 진행된 셈이다.
그런데 오기철이 장재건의 얼굴을 보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야, 이 도둑놈, 사기꾼 새끼······. 너, 너가 왜 여기에 있어?”
오기철이 장재건에게 손가락질하며 부르르 떨고 있다.
“아······, 오, 오 사장!”
“이 개자식, 내가 조만간 한 번 찾아가려고 했는데, 오냐! 잘 됐다.”
오기철이 침대에서 발을 빼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한다. 그때 통증이 밀려와 인상을 찡그리고는 다시 침대에 앉는다. 옆에 있던 강대주가 오기철을 말리며 무리하지 말라고 설득한다.
“저, 저 자식을 여기서 보다니, 그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진짜구나! 내가 다리만 낫고 나면 넌 뒤진 줄 알아!”
“······!”
건실한 중소기업 사업가였던 오기철이 한순간에 파산하고만 건 바로 장재건의 아파트 공사에 참여해서다.
대규모 아파트 마감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거의 원가에 낙찰받았는데, 공사대금을 절반도 채 받지 못했다. 지체상금이니 하자보수비니 다 까버리고, 나머지 공사대금을 떼어먹은 게 바로 장재건이다.
악덕 건설업자의 표본이었던 그는 이런 방식으로 여러 하청업체 사장들을 울렸다. 장재건도 자신의 회사를 이렇게 크게 성장시키기 전까진 이런 식으로 수많은 설움을 경험했다.
건설현장에서는 독한 놈만 살아남는다는 걸 뼈저리게 배웠다. 그 때문에 지금껏 자신이 당해온 것처럼 아래 하청업체들에게 똑같이 대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악독하게 고혈을 짜냈다.
돈은 쥐꼬리만큼 내리고 일은 산더미처럼 주었다. 맡긴 일을 다 하지 못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미지급한 대금을 다 까버리고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소송을 할 테면 해봐. 법이 진짜 너희들 편인지 보자고!
게 중에는 용감하게 소송으로 다툰 하청업체도 있었다. 하지만 소송이란 1심 판결을 받는데도 1년 이상 걸리고, 잘못하면 2년도 넘게 걸리는 게 부지기수다.
돈이 급한 하청업체들은 소송과정에서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억울하지만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헐값을 받는 조건으로라도 조정해야 했다.
이렇게 하청업체 고혈을 빨아 성장하는 게 업계 관행이다 보니,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조차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장재건의 이런 파렴치한 착취로 무수한 사람이 피를 보았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오기철이다. 그는 장재건 때문에 인생이 막장으로 치달아 자살까지 시도했다. 강대주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미 저 세상 사람일 것이다.
강대주 역시 오기철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원수가 생존팀의 주역인 장재건이란 걸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기철이 원한 때문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장영수 역시 몹시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가 이렇게 욕지거리를 당하면서 아무런 대꾸나 저항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 사람 말이 다 사실인가? 건설업 사장 중에는 진짜로 나쁜 사람이 많다던데, 정말 우리 아버지도 그런 사람이었단 말인가?
장재건의 얼굴이 검게 변해 있었다. 자리를 피해 떠나는 그의 어깨는 풀이 죽어 축 처져 있었다.
그는 이번 아포피스를 맞아 생존 벙커를 준비하며 인생 전부를 돌아보고 참회했다.
악착같이 살아왔다. 예전에 자기를 부리던 건설업체 사장들로부터 당한 착취를 곱씹으며, 보란 듯이 그들보다 더 부자가 돼 비웃어 주려고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서슬 퍼런 죽음 앞에 서니 너무도 무의미했다.
과거 한때 본인도 큰 건설회사 사장으로부터 착취당해 부도를 맞은 적이 있어, 오기철 같은 사람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지만, 더는 그런 상황에 직면하지 않으려고 그 잔인하고 매정한 사장들의 모습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베풀고 말았다.
그리고 양심과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쓴맛을 본 뒤에 진짜 세상을 알게 되면 달라질 거라고, 그러면 나처럼 될 수 있다고.
손쉬운 변명이 날 합리화하고 양심과 마음의 눈을 멀게 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운 역사다.
성공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돈이 무엇이고 또 얼마나 가져야 만족할 수 있는 것인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쌓아두고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을 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거나,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다.
삶이란, 인간이란 다 그런 건 줄로만 안 무지와 착각, 그게 이렇게 한순간에 깨지는 것이었는데······.
아들 앞에서 이 얼마나 부끄러운 상황인가? 하지만 변명조차 할 수 없는 건, 모두 사실이고 다 내 잘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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