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결사항전 (3)

아포칼립스 D-4, 2029. 4. 10.(화) 오후,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일대.
동주는 서강파 본진이 남원 방면에서 쳐들어올 것이라 예상했다. 최용석이 가져온 대전차 지뢰를 사용하려면 어떻게든 땅에 매설해야 하는데, 아스팔트를 파는 건 너무 힘들고 티가 날 게 분명하다.
그래서 TNT 폭탄을 이용해 정령치길 초입 경사면을 무너뜨렸다. ‘와르르’ 흙이 쏟아져 내려왔다. 적이 우리가 가진 무기를 모르는 상황에서 설마 대전차 지뢰까지 가지고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우릴 얕잡아 보지 않고 조심해서 지뢰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걸로 상대 공격을 늦추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런데 역시나 남수혁은 우릴 얕잡아 보고, 잠깐 드론으로 주변을 살핀 뒤 지뢰 지대로 들어서고 말았다. 대전차 지뢰 덕에 탱크 한 대와 적 몇 명을 제압할 수 있었다.
최용석과 장영수는 김필구 부대가 반대쪽인 노고단길을 타고 넘어오는 걸 보고, 산악도로에서 가장 가파른 절벽이 있는 곳에 폭탄을 매설한 후 적이 오길 기다렸다.
녀석들이 대전차 지뢰 소식을 들었는지 매우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드론 택시를 먼저 띄워 주변을 살피고 있다.
적에게 들키지 않으려 숲 속에 숨고, 다시 나뭇가지로 은폐, 엄폐를 확실히 해두었기에 드론에서 최용석 일행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앞장서던 김필구의 탱크가 절벽 아래에 들어섰다. 뒤따르던 탱크와 보병들까지 폭탄이 매설된 낭떠러지 옆으로 접어들었다. 이때다. 최용석은 격발기를 눌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깎아지른 절벽이 무너지면서 큰 바위와 흙더미가 마치 대규모 산사태가 벌어진 듯 쏟아져 내렸다. 아래를 보니 부대 절반이 바위와 흙더미에 파묻힌 것 같다. 대성공이다.
용석과 영수는 임무를 마치고 숲길을 따라 정령치 터널 뒤편 구릉에 있는 드론부대의 은거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전차포가 정령치 휴게소를 향해 발사됐다. 주변이 불바다가 되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있다.
워낙 먼 거리에서 전차포를 쏴대는 터라 정령치 터널이나 휴게소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그 주변 일대까지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용석과 영수가 몸을 숨긴 구릉까지도 포탄이 날아오고 있다.
하마터면 포탄에 맞아 죽을 뻔했다. 몸을 피하고 있던 이들 바로 앞에 포탄이 떨어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만약 바위 뒤에 납작하게 누워있지 않았다면 바로 즉사할 뻔했다. 공포가 몰려왔다. 바로 고갤 더 처박고, 숨죽이며 몸을 웅크렸다.
전차포 공격이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도대체 포탄을 얼마나 싣고 온 거야? 포탄이나 그 파편이 이쪽으로 떨어지지 않길 기도하며 줄곧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설마 했는데, 저 녀석들, 이 벙커를 빼앗기도 전에 다 부술 생각인가? 역시 서강파 애들은 종잡을 수 없다니까.
이 벙커가 탐나서 쳐들어오는 녀석들이 아닌가? 다 부숴버리면 그저 기분 낸 것 말고는 아무런 소득이 없게 된다. 그런데도 저놈들은 그저 복수심에 불타 포탄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그 영향이 어떠한지 따지지 않고 무작정 쏴대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포탄 떨어지는 간격이 늘더니 이제 다행히 포 소리가 멈추었다.
휴! 천만다행이다.
아래를 보니 정령치 휴게소가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주변이 불바다다. 으윽! 우리 쪽도 피해가 크다. 휴게소에 있는 물품을 다 빼내지 않았으면 피해가 막급할 뻔했다.
용석과 영수는 서둘러 뒷산으로 가 드론부대와 합류했다. 이곳은 적의 전차포 사정거리 밖이다.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릉과 구릉 사이로, 미리 위장막과 나뭇가지로 덮어 드론을 잘 숨겨 두었다.
적이 근접해 오면 마지막 수단으로 이 드론들이 출동해 전투를 벌일 계획이다.
심원기와 심원주가 정령치와 노고단길이 훤히 보이는 언덕 위에 위장막을 두르고 숨어 정찰 드론을 운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드론으로 확인한 전황을 곧바로 이곳 드론부대에 알려주고 있다.
남수혁 부대는 전차포가 불을 품는 사이 흙 속에 묻혀 있던 대전차 지뢰를 제거해 길을 뚫었다. 전차포 공격을 멈춘 뒤 곧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김필구 부대는 탱크가 묻혀 있는 산사태 지역을 넘어 도보로 휴게소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거기다 드론 택시가 선두에 나서 어느새 정령치 휴게소 상공에 근접해 오고 있다.
계속 숨어 있을 순 없다. 우리도 공중전을 치를 수 있는 충분한 전력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동주는 드론부대 출동을 지시했다.
조종술이 뛰어난 최용석, 천상진, 스텔라가 앞장서고, 뒤이어 김원기, 이수성, 강대주가 모는 드론이 출발했다. 다음으로 동주와 장영수, 전민국, 김태호 그리고 나머지 드론병과 3대대 합류병이 모는 드론까지 모두 출동했다.
20여 대의 드론이 정령치 휴게소 뒤편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때 적 탱크가 생존팀 드론을 향해 전차포를 쏘았다. 최용석은 사정거리 밖으로 펼치라고 지시했다. 좌, 우로 넓게 펼쳐 마치 학익진과 같은 모양을 갖추었다.
어느새 남수혁 부대의 탱크가 산악도로의 절반가량이나 올라온 상태다.
동주의 지시에 따라 최용석 일행이 김필구 부대에 했던 것처럼, 고재철 중위와 나갑주가 미리 정령치로 중간 가파른 낭떠러지에 TNT 폭약을 매설하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낭떠러지 뒤 억새가 우거진 수풀에 숨어, 적이 오길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한 번 호되게 당한 적이 있어 남수혁 부대의 경계가 삼엄하다. 드론 택시가 앞장서 산악도로 주변을 저공으로 날며, 매복이 있는지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여러 대의 드론이 고재철 일행의 머리 위를 날며 분주히 주변을 살피고 있다.
빌어먹을! 들킨 것 같다.
TNT 폭약을 매설할 때 생긴 흔적이 발견된 것 같다. 눈치 빠른 고재철은 이곳에 더 있다가는 금방 정체가 들통 날 것임을 직감했다.
주변에 이렇다 할 나무나 숲이 없는 개활지라 어쩔 수 없이 억새 수풀 사이에 숨었다. 드론이 저공 비행해 근접하면, 억새 수풀 사이에 숨어 있는 이들 모습이 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만약 이 근처에 숨을 곳은 억새 수풀밖에 없다고 보고, 이곳에 그냥 총질해대면 영락없이 죽는 수밖에 없다.
고재철은 급히 동주에게 무전을 날려 도움을 요청했다. 동주는 안전이 우선이니 적을 섬멸하려 욕심부리지 말고, 우선 대피하는 것에만 집중하라고 말했다.
전투 드론을 보내 시선을 끌면서 엄호할 테니, 공중전이 벌어지면 탱크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더라도 바로 폭탄을 터트리고, 500m 뒤쪽에 있는 나무숲으로 내달리라고 지시했다.
젠장! 남수혁 부대가 행군을 멈추었다. 분명 매복이 들키고 만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길이라도 막아서는 수밖에······.
고재철은 생존팀 전투 드론이 이곳을 향해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는 힘껏 격발기를 눌렀다.
“콰광, 우르르 쾅, 쾅!”
고막을 찢는 폭발음이 퍼지더니 이제 산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바위와 흙더미가 우르르 쏟아지며 지축을 흔들고 있다.
“드르륵, 드르륵!”
화가난 서강파 드론에서 기관총이 발사됐다. 그곳 주변에 있는 억새 수풀 곳곳에 총질해댄다. 큰일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그때 ‘쒜엑’하는 소리와 함께 정령치 휴게소 쪽에서 내려온 우리 편 전투 드론 두 대가 기관총을 발사하며 적 드론을 공격했다. 최정예인 최용석과 스텔라가 직접 몰고 있다.
적 드론은 이제 전투 드론을 상대하느라 억새 수풀을 향한 총질을 멈췄다. 그리고 전투 드론을 향해 일제히 기관총을 난사했다.
이때다. 이 기회를 놓치면 위험하다.
고재철은 나갑주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바로 수풀에서 나와, 뒤쪽 언덕 너머 울창한 소나무 숲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나갑주도 뒤따라 뛰기 시작한다.
제발! 적들이 우릴 발견하지 못하길······!
고재철 일행은 산길을 따라 앞만 보고 내달리고 있다. 다행히 아직까진 이들을 향한 공격은 없다. 이제 100여 미터만 달리면 숲이다.
그때 뒤늦게 이들을 발견한 적 드론 두 대가 급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이들 드론의 기관총이 불을 품었다.
위험한 상황이다. 생존팀 일행이 공격당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스텔라는 순간 급격하게 고도를 낮추어 뛰고 있는 고재철 앞쪽으로 전투 드론을 몰아갔다. 적 드론이 표적에 들어오자마자 기관총으로 조준사격을 가했다.
‘파바박, 파바박’
전투 드론에서 쏜 기관총 총탄이 상대 드론 택시 한 대에 명중했다. 불길이 치솟더니 바로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한다.
“드르륵, 드르륵”
상대가 쏜 기관총 총탄이 고재철 일행을 뒤쫓으며 빗발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뛰고 있던 나갑주가 총탄에 맞아 그만 풀썩 쓰러지고 만다.
앞서던 고재철이 놀라 나갑주에게 다시 돌아갔다. 총탄이 복부를 관통하고 말았다. 온몸이 피에 젖어 시뻘겋다.
나갑주는 벌써 입에 거품을 물고 정신이 혼미하다. 서둘러 치료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 고재철은 나갑주를 등에 업고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스텔라가 모는 전투 드론이 고재철 일행을 뒤쫓던 나머지 드론까지 격추했다. 신출귀몰한 전투 드론의 공세에 전의를 상실한 상대 드론들이 도주하고 있다.
최용석은 무전을 날려 나갑주가 위험하니 급히 태호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아래를 보니 고재철이 힘겹게 나갑주를 업고 뛰는 모습이 보인다. 그 상공에 스텔라의 전투 드론이 멈춰서 엄호 사격을 하고 있다.
‘이런! 갑주 아저씨에게 너무 위험한 일을 맡겼구나!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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