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결사항전 (4)
아포칼립스 D-4, 2029. 4. 10.(화) 오후,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일대.
나갑주 부상 소식을 들은 동주는 천상진과 김태호에게 그쪽으로 가 이들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정령치 휴게소 상공에 있던 두 대의 드론이 나갑주를 후송하기 위해 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김태호는 드론에서 내려 나갑주의 상태를 살폈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쇼크 상태이다. 무엇보다 수혈이 시급하다. 여기서는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다.
천상진과 고재철이 조심해서 나갑주를 들어 올린 후 김태호가 모는 드론 뒷좌석에 눕혔다. 고재철이 함께 탄 뒤 상의를 벗어 나갑주의 복부에 대고 지혈하고 있다.
김태호는 서둘러 정령치 생존 벙커로 향했다. 동아는 재빨리 생존 벙커 방 하나에 수술대를 설치하고 의약품과 장비를 셋팅하기 시작했다.
태호의 아버지인 김창수도 수술 가운을 입고 기다리고 있다. 그는 30년 경력의 정형외과 의사다. 한빛 대학병원 정형외과 교수를 역임했고, 광주에서 가장 유명한 척추전문병원을 개원해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수술을 집도해온 베테랑이다.
나갑주가 도착했다. 소식을 들은 신수경도 뛰어왔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라 나갑주의 상태를 보고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다.
“아이고, 갑주 아저씨!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정신 좀 차려보세요. 갑주 아저씨!”
신수경이 눈물을 훔치며 안절부절못한다. 소식을 듣고 온 은수가 신수경의 어깨를 감싸며 위로한다.
동아는 먼저 나갑주의 입에 산소마스크를 씌웠다. 혈압이 급격히 떨어진 상태다. 하필 혈액형이 AB형이다.
긴급할 땐 다른 혈액형의 피를 공급받을 수도 있지만, 그건 소량(200mL 이하)일 때 이야기다. 대수술을 앞둔 나갑주의 경우는 반드시 AB형 혈액을 수혈해야 한다.
동주는 생존팀 중 AB형이 있으면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워낙 보기 드문 혈액형이라 찾을 수 있을지 걱정됐다.
전세계로 보면 O형이 가장 많고, 그다음으로 A형, B형, 마지막으로 AB형이다. 통계마다 달라 정확하진 않지만, AB형은 전체 인구의 5%가량이거나 이보다 더 적을 수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오히려 A형이 가장 많고, AB형 역시 10% 내외로 세계평균보다 훨씬 많은 편이다.
다행히 장재건이 AB형이라며 달려왔다. 곧바로 그를 침상에 눕히고 채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워낙 많은 피를 흘려 장재건 혼자로는 부족할 것 같다.
때마침 오기철이 AB형이라며 알려왔다. 강대주가 오기철을 휠체어에 태워 이곳으로 데려왔다. 장재건은 이미 침상에 누워 피를 뽑고 있었다.
그의 옆에 누운 오기철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다. 좋은 마음으로 피를 나누러 왔는데, 하필 원수인 장재건이 옆에 누워 있으니 말이다. 둘은 아무 대화도 없이 서로 다른 곳만 바라보고 있다.
동주는 적 탱크가 전차포를 쏠 수 없는 먼 거리로 물러난 걸 확인하고, 나머지 드론 부대의 귀환을 지시했다. 드론이 하나, 둘 휴게소 주차장과 이착륙장으로 내려왔다.
생존 벙커의 철문이 열렸다. 안에 있던 가족들이 줄지어 밖으로 나온다. 전투에 참여한 일행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모두 안고 기쁨을 나누는 모습이다.
그것도 잠시, 불타 재만 남은 정령치 휴게소의 모습을 보고 모두 놀래 말문이 막혔다. 집처럼 아늑했던 휴게소가 단 몇 시간만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다니! 이제 벙커 밖은 황량한 공터뿐이다. 마음 편하게 쉴 공간 하나도 남지 않았다.
컨테이너 성벽은 포탄에 맞아 검게 그을렸고, 주차장과 도로는 움푹 패이고 부서져 있었다.
뒷산과 주변 나무는 모두 불타 재로 변했고, 타다 만 나무줄기가 검게 그을려 흉측한 모습이다. 바람이 쓱 불자, 검고 흰 재가 사방에 흩날린다.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간 뒤 남은 건 상처투성이 폐허뿐이다.
평생 전쟁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던 생존팀은 이 폐허 속에서 평화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 다르나니! 내일은 또 어떻게 변해있을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만 할까?
아무리 살아남는 게 지상 최대의 과제라지만, 이렇게 남을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니잖은가? 너무 감상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일까?
벌써 멀리 서쪽 하늘엔 해가 뉘엿뉘엿 지려 한다. 산 아래 보이는 들과 마을은 변함이 없건만 이곳은 상전벽해가 되고 말았다.
저 멀리 노오란 노을에 물들어 찬란히 빛나는 세상은 푸근하고 아름답기까지 한다. 반면에 이곳 하늘은 어느새 어둠이 짙게 몰려와 마치 죽음의 화신이 그 옷자락을 휘날리는 것만 같다.
동주는 가족 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심원기가 정찰 드론이 갈 수 있는 최대거리까지 쫓아가 본 결과, 남수혁이 이끄는 부대는 정령치 길 초입까지 물러난 것 같다.
노고단길 방면으로 오르던 녀석들은 정령치로와 접하는 달궁삼거리까지 후퇴했다. 이들이 지리산 생존팀 공격을 포기한 게 아니다. 재차 공격하려고 준비 중일 것이다.
어쩌면 지원병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몇 녀석이 주변 산세와 등산로를 살피며 이동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녀석들이 이제 위험한 산악도로가 아닌 산길로 공격하려고 준비 중인 모습이다.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동주는 3대대 병력인 고재철 중위와 이수성에게 일행을 데리고 가, 적이 침투할 수 있는 산길이나 능선을 살피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밤에 침투하는 적을 방어할 대책도 수립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최용석에겐 내일 있을 전투를 대비해 드론 충전을 마친 뒤 다시 은거지에 잘 숨겨두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야간 순찰을 위한 스텔스 드론 운행계획을 세워달라 요청했다.
오늘 밤을 무사히 버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병력 숫자에서 월등히 앞서는 서강파가 밤에 기습할 가능성이 크다. 피아 구별이 어려운 야간이라면 전투 경험이 없는 우리 쪽이 더욱 불리한 상황이다.
* * *
남수혁 부대는 정령치로 초입에 있는 고기삼거리 부근 운봉마을에 주둔지를 잡았다. 그곳에서 탱크와 각종 장비를 정비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했다.
강창배가 지휘하는 구례 쪽 부대는 노고단로 끝자락인 달궁삼거리에서 아래로 더 내려와 도계쉼터라는 큰 공터에 주둔지를 잡았다.
지금껏 계속된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해와 기고만장했던 남수혁. 그는 오늘 지리산 생존팀과의 첫 전투에서 호된 신고식을 한 셈이다.
얕잡아 본 탓에 상대 전력에는 별 타격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손실만 입고 말았다. 기오성에게 솔직히 말하고 지원병을 받을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야간 전투라면 이 병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리 3대대 병력 몇 명이 그쪽에 붙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민간인 아닌가? 강대주와 오기철 녀석이 뭘 하겠어?
이번엔 반드시 내 힘으로 성공해내야 한다. 저놈들에게 복수하는 길은 캄캄한 밤에 기습하는 거다.
해가 지면 험준하고 먼 산길을 행군해 가기 어렵다. 해가 다 저물기 전에 최대한 정령치 휴게소 가까이 접근해야 한다. 부하들에게 최대한 휴식시간을 주고 배불리 먹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오후 5시, 남수혁 부대는 20여 명의 정예원을 이끌고 고기삼거리에 집결해 백두대간 길을 따라 정령치로 출발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한반도의 중심산줄기로 총 길이는 1,400km에 이른다.
이 중에서 지리산 백두대간 줄기는 고기삼거리에서 시작해 고리봉, 만복대, 노고단, 삼도봉, 칠선봉, 제석봉을 돌아 천왕봉까지 총 40km 구간이다.
정령치 휴게소(1,172m)는 고리봉(1,305m)과 만복대(1,438m) 사이에 있는 정령치에 있어 지리산 백두대간 줄기의 하나이다.
예전에는 정령치로가 아스팔트 도로인 탓에 이 백두대간 줄기를 끊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3년 그 도로 위에 정령치 터널을 만들고, 그 위에 자연공원을 조성해 다시 백두대간 줄기를 연결한 것이다.
고기삼거리에서 고리봉까지는 3.4km, 고리봉에서 정령치까지는 0.8km 합계 4.2km 거리이다.
평지라면 젊고 힘이 넘치는 서강파 조직원들이 한 시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산행인 데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해서 고리봉 부근까지 한 시간 반 가까이 걸렸다.
강창배가 이끄는 부대 역시 건장한 정예부대원 20여 명을 이끌고 도계쉼터에서 만복대까지 약 4km 가파른 길을 오른 뒤, 그곳에서 정령치 휴게소까지 2km를 더 가야 한다.
새벽에 무등산 레이더기지를 출발해 오전 내내 힘든 전투를 치른 터라 모두들 기진맥진해 있다.
남수혁은 맨 먼저 고리봉에 도착해, 망원경을 들고 정령치 휴게소 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이곳 고리봉에서 정령치까지는 내리막길인 데다, 거리가 800m가량에 불과해 아무리 늦어도 30분이면 그곳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등산로 주변에 나무는 없고 주로 듬성듬성 억새만 있어 부대가 줄지어 이동할 경우 금방 노출된다.
거기다 망원경에 생존팀이 운용하는 정찰 드론의 모습까지 포착됐다. 철저한 녀석들이다. 정령치로를 따라 저 아래까지 여러 대의 정찰 드론이 계속 주위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다. 정보전에서 이미 밀린 셈이다.
남수혁은 부하들에게 고리봉 너머로 가지 말고 이곳에서 밤이 올 때까지 쉬라고 지시했다. 강창배에게도 상대의 정찰 드론에 포착되지 않도록 만복대까지 가지 말고, 산 뒤편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공격은 밤 8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이놈들! 그래, 마음껏 승리에 도취해 있거라, 오늘 밤이 너희들 마지막 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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