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결사항전 (8)
아포칼립스 D-4, 2029. 4. 10.(화) 밤,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일대.
남수혁은 헐레벌떡 뛰어 고기삼거리까지 다다랐다. 처음 출발할 때 21명이 함께 했는데, 돌아온 사람은 9명뿐이다.
게다가 클레이모어 쇠구슬에 팔과 어깨에 심한 상처를 입은 녀석이 다섯 명이나 됐다. 남수혁도 기관총 총탄을 피하려 몇 번을 굴렀더니, 온몸에 상처투성이다.
부하들을 볼 면목이 없다. 녀석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죽거나 쓰러진 동료는 우리 한 식구들 아니었는가? 다 버리고 이렇게 간신히 도망쳐 온 신세라니!
강창배에게 연락해 그쪽의 피해 상황도 살폈다. 애초 김필구 부대는 탱크 사수까지 합쳐 총 32명이었다. 지금 남은 건 19명이지만 절반 이상이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큰 부상자다.
오늘 새벽 이곳으로 출발할 무렵만 해도, 승리의 부푼 꿈을 꾸며 이곳에 쉽게 서강파의 깃발을 꼽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동료 절반 이상을 죽음으로 몰고도 얻은 소득이 하나도 없다.
기오성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두렵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버릴 때다. 오직 저 녀석들에게 복수하는 것에만 집중하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지원군을 받아 내일 결전을 펼치는 수밖에 없다.
남수혁은 무거운 마음으로 기오성에게 연락했다.
“뭐, 뭐라고? 사망자가 스무 명이 넘는다고? 부상자는 얼마나 돼?”
“부상자도 스무 명 정도 됩니다.”
“그, 그럼 갈 때 육십 명쯤 데리고 가서 멀쩡한 놈은 스무 명뿐이라는 소리네!”
“네······.”
“하아! ······지금 당장 드론 타고 이리와!”
“네, 회장님!”
기오성이 가만있지 않을 걸 알았지만, 사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 그가 당장 욕설을 내뱉고 화를 냈다면 금방이라도 풀릴 수 있는 일이란 거다.
그런데 아무런 화도 내지 않고 묵묵히 그냥 돌아오라고만 한 건, 분명 분노가 극에 다다랐다는 의미다. 남수혁은 죽을 각오를 하고 무등산 레이더기지로 향했다.
그곳 사무동이 이제 서강파의 본거지가 됐다. 2층 레이더실 한편에 있는 큰 방이 기오성의 집무실이다. 남수혁은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유리로 된 재떨이가 날아왔다. ‘쨍그랑’ 벽에 맞은 재떨이가 깨지면서 사방으로 유리 조각이 튀었다.
“야, 이 개새끼야! 내가 뭐라고 그랬어, 까불지 말고 조심하라고 했지?”
기오성은 곧바로 남수혁에게 달려가 그의 얼굴에 주먹 연타를 날렸다. ‘우두둑’ 무언가 잔뜩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남수혁이 바닥에 쓰러졌다.
기오성은 쓰러진 남수혁에게 다가가 발로 널브러진 그의 어깨와 배를 쿵, 쿵 세게 밟았다. 아니 내리찍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은 기오성은 마치 축구에서 센터링하는 것처럼 남수혁의 허리와 복부를 연달아 세게 걷어찼다.
남수혁의 얼굴은 이미 피범벅이 되었다. 복부를 걷어차이고, 발로 짓밟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
기오성의 일방적인 가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그저 번데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 그의 몸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카악, 퉤!”
분노를 억누르려 애쓰는 기오성이 바닥에 침을 뱉는다. 그리곤 곧바로 담배를 물고는 긴 연기를 뿜어냈다.
“휴우!”
얼마나 지났을까? 흥분을 가라앉힌 기오성이 전화로 정마리아와 곽형규 그리고 김성철을 부른다. 이들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정마리아는 남수혁의 꼬락서니를 보고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매번 남수혁을 이렇게 개 패듯 하는 걸 더는 못 봐주겠다. 자기가 직접 나서서 싸울 용기도 없으면서······.
왕년의 싸움꾼 기오성은 이제 옛말이다. 높은 자리로 올라서면서 언제부턴가 지독하게도 몸을 사린다.
위험한 일은 모두 남수혁에게 맡겨놓고는 조금만 잘못되면 모든 책임을 그에게 떠넘기고, 이렇게 분풀잇감으로 삼는다.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이 상황에서 남수혁을 두둔하고 있을 순 없었다.
“이 새끼, 이거 어떻게 해야 되겠어?”
기오성이 남수혁을 어떻게 처벌할 건지 물었다. 정마리아와 곽형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들은 남수혁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다.
남수혁의 잘못은 곧 이들의 잘못. 남수혁을 어떻게든 살리려면 묘안을 내야만 한다. 남수혁이 실패를 만회할 수 있도록 반드시 도와야 한다.
김성철은 무슨 꿍꿍이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뭐라고 말 좀 해봐, 응?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정마리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수혁이가 적을 너무 얕잡아 본 게 잘못인 거 같아요. 저쪽이 뭘 준비한 건지, 미리 좀 알아봤어야 하는데······.”
“내가 그래서 이놈한테 가기 전에 신신당부했거든. 적을 잘 모르니까 조심하라고, 하아!”
기오성이 한숨을 푹푹 쉬어 댄다.
“저놈들한테 복수하려면 우선 그쪽 사정을 알아야 하니까, 수혁이 이야기도 좀 들어보시죠.”
정마리아가 남수혁이 변명할 수 있는 판을 깔아주었다.
“그래, 이야기나 들어보자. 도대체 저놈들이 뭐길래, 그렇게 당한 거야?”
남수혁은 코에서 흐르는 피를 옷소매로 닦아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두 번의 전투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적이 가지고 있는 각종 무기들 그리고 신출귀몰한 전투 드론 조종술에 대해서도.
“뭐라고? 그렇게 조종을 잘하는 놈이 있다고?”
“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드론을 가져가도, 그 두 놈을 이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거기다 아직 저쪽에선 움직이지도 않은 드론이 스무 대는 있으니까, 또 어떤 놈이 있을지도 모르죠.”
“음······, 3대대가 전투 드론부대를 가지고 있다 하더니만, 그 녀석들이 그곳에 붙은 모양이구먼.”
“거기다 대전차 지뢰니, 크레모아니 없는 게 없습니다. 3대대 쪽 병력이 많이 넘어간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김 중령! 자네 생각은 어때? 저쪽 전력 말이야.”
“3대대 본부에 있던 드론 부대 놈들 맞을 겁니다. 그때 투항하지 않고 튀었는데,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역시 그쪽이군요.
시내에 있던 잔류병들도 다 해산한 게 아니었어요. 일부가 그쪽에 넘어간 게 맞을 겁니다.”
“음······, 그럼 그쪽도 만만치 않다는 소린데. 다들 이야기 좀 해봐, 어떻게 해야 우리가 저길 빼앗을 수 있겠냐고?”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남수혁이 맥없이 패배하고 왔지만, 다른 누가 갔더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다.
김성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회장님! 그런 요새를 치러 가려면 우리가 적보다 화력에서 월등히 앞서야 하고, 제공권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이제 탱크도 몇 대 남지 않았고, 공중전에서도 확실한 우위가 아닙니다. 전면전을 해선 승산이 없다고 봅니다.”
“그럼, 이렇게 물러나자는 말이야?”
기오성이 눈을 부라리며 반문했다.
“아포피스가 떨어지면 그쪽이나 이쪽이나 다 살아남는 게 불확실한 상황인데, 굳이 거길 빼앗으려 힘 빼느니 우리 벙커에 더 신경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김성철은 내일 다시 공격하러 간다면, 자신의 부대원들까지 차출될 게 뻔해 전쟁 자체를 꺼리는 눈치다.
천 검사와 강대주에게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기오성이지만 마땅한 묘안이 없어 난감한 표정이다.
그때 계속 듣고만 있던 곽형규가 말을 꺼냈다.
“굳이 힘들이지 않고 적을 붕괴하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뭐,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거긴 우리처럼 서열이나 위계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여러 종류의 잡동사니들이 모여 있죠. 그걸 이용해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펴서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드는 거죠.”
“어려운 말만 하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봐, 응?”
곽형규는 자신이 고안해낸 이간책을 자세히 설명했다.
“으음······, 그럴듯한데.”
기오성은 나름 만족해하는 표정이다.
“이런 작전이 통하려면 말이죠,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가능한 전투 인원을 다 데리고 가야겠죠.”
“······.”
“저들은 분명 잔뜩 겁먹을 겁니다. 전쟁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흔들리게 될 테죠.”
“······!”
“음, 김 중령! 우리 형규 제안이 어때요?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저 녀석들이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올까요? 우릴 믿지도 않을 텐데······.”
곽형규가 대답했다.
“물론 쉽게 믿지 않겠죠. 그래서 충분한 선전을 통해 선동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건 제가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적의 약점을 파고드는 거죠. 그 부분은 제가 맡아서 해보겠습니다.”
“진짜 잘할 수 있겠어?”
정마리아가 걱정되어 물었다.
“하하! 제가 원래는 저쪽 편 아니었습니까. 저기 주축인 이동주나 강대주 다 제 손안에 있습니다. 녀석들의 약점을 다 까발려서 자기들끼리 싸우게 해야죠. 뭔가 허점이 드러나면, 그때 공격해도 늦지 않습니다.”
“좋아, 이대로 물러날 순 없지. 내일 벙커 작업자들 빼고, 공격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다 끌어모아 보라고. 드론도 모아 놓은 거 전부 다 끌고 가고, 알았어?”
“네, 회장님!”
남수혁은 가장 큰 소리로 대답했다. 대규모 지원군을 끌고 가 녀석들에게 복수할 걸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김성철은 자신의 부하들이 다칠 수 있어 탐탁지 않았지만, 여기서 혼자 발뺌할 순 없는 노릇이다.
곽형규는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난번 동주에게 당한 게 있어 와신상담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잘 됐다. 이번엔 기필코 녀석을 지옥으로 보내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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