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결사항전 (9)
아포칼립스 D-3, 2029. 4. 11.(수),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일대.
오전 5시.
동주는 스텔라가 모는 스텔스 드론을 타고 적들의 움직임을 살피러 갔다. 남수혁 부대가 있는 고기삼거리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마을 곳곳에 사람의 열이 감지됐지만, 다들 잠들어 있는지 움직이지 않는다. 탱크나 육공트럭, 지프도 모두 정차되어 있을 뿐이다.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눈치가 아니다.
산길을 좌, 우로 살피면서 구례 쪽 도계쉼터로 갔다. 강창배 부대원들 역시 잠들어 움직임이 없다. 우리 쪽에서 기습할 것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는 듯하다.
“오빠, 쟤들 이렇게 놔둘 거야? 그냥 확 다 쏴버려야 하는 거 아니야?”
스텔라가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사자처럼 눈을 부릅뜬 채 코를 실룩거리며 물었다.
남원 쪽 고기삼거리에 있던 부대는 민간인들이랑 뒤섞여 민가에서 자고 있기에 공격할 수 없었지만, 이곳 도계쉼터에 있는 녀석들은 텐트나 차량에서 잠들어 있기에 지금 스텔스 드론으로 공격하면 전멸시킬 수 있다.
그럼 이 녀석들이 오늘 다시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놈들이 철수하지 않고 아직 여기에 있는 건 재차 공격할 마음이 있다는 거다.
그 싹을 자르자는 스텔라의 제안은 얼핏 보면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지극히 실전적인 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술적으론 문제가 있다. 바둑으로 치자면 소탐대실(小貪大失)이 될 수 있다.
지금 저들 몇 명을 도륙해, 저들이 다시는 우릴 공격할 수 없도록 무력화하는 전 일견 전술적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적을 기습해 몰살한 걸 서강파가 알게 되면, 그때 저들이 어떻게 나올까? 복수심에 불타올라, 협상이나 대화는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이다. 사생결단을 하고 달려들 게 뻔하다.
특히, 저들은 우리가 전력 면에서 열세라 계속 방어만 할 뿐 선제공격 하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래서 이처럼 태평하게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믿음을 고작 잠자는 몇몇 조직원을 잡는 데 사용해 깨버리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다.
그런 믿음이 깨지면, 저들은 우리 선제공격에 대비해 훨씬 강도 높은 방비를 할 것이다. 우릴 더는 얕잡아 보지도 않을 테고.
때를 기다리는 강태공의 인내가 필요한 시기다. 동주는 스텔라를 설득해, 저들을 공격하지 않고 기지로 돌아왔다.
아포피스가 떨어질 때까지 이제 고작 이틀 남았다. 서강파가 우릴 공격한다면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다. 무등산으로 돌아갈 타이밍을 잡아야 해서 여기서 오래 있을 여유가 없다.
시간이 우리 편인 이상 어떻게든 지연전술을 써야만 한다.
아포피스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이미 세상 모든 게 바뀌고 있다. 새벽부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새떼가 창궐해 어수선하기 그지없다. 어디론가 떠나는 새 무리가 하늘을 덮을 정도이니, 대환란의 전조임이 분명하다.
햄 통신을 통해 전 세계 곳곳 화산들이 대폭발하고, 쓰나미가 밀려온 사실을 알게 됐다. 일본 후지산, 아이슬란드 파그라달스팔(Fagradalsfjall)이 폭발했고, 남태평양 해저화산 폭발로 쓰나미가 일어 주변 나라의 바닷가를 강타했다.
아포피스가 근접하자 지구가 녀석을 끌어당기고, 덩치가 큰 아포피스도 지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나 보다. 잠자던 화산을 깨우고 급격한 기후변화와 쓰나미를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도 백두산이나 한라산이 폭발한다면, 아포피스가 떨어지기도 전에 이곳이 불바다가 될 수 있다. 백두산이 대폭발을 일으켜 용암을 분출할 경우 한반도 각지로 돌덩이 같은 화산재가 떨어지고 잿더미에 덮이게 된다.
날씨가 급변하고 있다. 태풍이 북상하는 느낌이다. 어제부터 먹구름이 쫙 깔리더니 이미 태양이 떠올랐을 아침인데도 구름에 가려 어둑어둑하다. 짙은 먹구름이 빠르게 움직이는 걸 봐서는 언제 폭우가 쏟아질지 모른다.
날씨도 우릴 돕는다. 오늘 하루만 어떻게든 버티면 된다.
* * *
기오성은 이른 새벽부터 모든 전투원에게 지리산 공략을 위해 출동하라고 명령했다.
무등산 레이더기지를 지키고 있던 탱크 다섯 대가 이번 전투에 직접 나선다. 레이더기지 대공방어용 KM167A3 20㎜ 벌컨포도 두 대의 지프에 장착해 출전한다.
여기에 더해 12.7㎜ K6 기관총을 장착한 지프 세 대, 드론 10대 그리고 서강파와 1대대 병사 60여 명을 태운 육공트럭이 줄지어 무등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실로 엄청난 군세다.
이들은 남수혁이 모는 지프 뒤를 따라 전동기가 발포 플라스틱을 생산했던 남원 화학공장으로 갔다. 이미 발포 플라스틱은 충분히 생산해 벙커 공사에 투입했다.
더는 이곳에 병력을 둘 필요가 없다. 여기 남아 있던 서강파 병력도 함께 하기로 했다. 지리산 생존팀을 압박할 목적으로 전동기도 데리고 간다. 이번에는 부대를 둘로 나누지 않고, 오직 남원 방면으로만 총공격해가기로 했다.
오전 10시.
곽형규, 김성철이 이끄는 지원군이 고기삼거리 운봉마을에 도착했다. 구례 방면에 있던 강창배는 남수혁의 지시로 오전 일찍 이곳으로 와 지원부대와 합류했다.
곽형규는 패잔병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동안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모두 크고 작은 부상으로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장비들도 하나같이 망가져,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구례 쪽에 있던 탱크는 궤도 고장으로 이곳까지 함께 올 수 없었다. 포탄도 다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버리고 왔다. 운봉마을에 있던 남수혁의 탱크 한 대가 합류해 총 6대의 탱크가 이번 공격에 참여한다.
이번 전투의 승패는 탱크 부대의 위치를 얼마나 잘 잡느냐에 달려있다.
정령치 휴게소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양쪽 산악도로가 막힌 상태다. 산비탈이 무너져 내리면서 길을 막아버린 탓에 탱크가 그 너머로 올라갈 방법이 없다. 부득이 그 아래쪽에 위치를 잡아야 한다.
곽형규와 김성철은 이 여섯 대의 탱크가 동시에 정령치 휴게소를 타격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밤새 지도와 인공위성 사진을 살폈다.
고기삼거리에서 정령치 휴게소 방향의 오르막 산악도로는 좁아서 탱크가 줄지어 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길이 구불구불한 데다 앞에 여러 조그만 산들이 가로막고 있어 그곳에서는 직접 정령치 휴게소를 타격할 수 없다.
지난번 흥분한 남수혁의 지시로 타격한 것처럼 비슷한 방향을 잡아 무작정 포를 쏠 순 있지만, 지리산 생존팀에게 충분한 위협이 될 수 없다.
이번엔 무엇보다도 저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어야 한다. 고민 끝에 탱크 집결 장소를 고기댐으로 잡았다.
정령치 휴게소에서 남원 방향으로 내려다보면, 맨 먼저 눈에 띄는 게 고기댐이다. 널따란 저수지다 보니 숲과 능선 가운데 도드라진다.
그 댐에서 정령치 휴게소가 산악도로로는 5km가 넘는 거리지만, 직선거리로는 약 2.5km에 불과해 탱크 사거리 3km 내에 위치한다.
이곳에 탱크가 늘어서면 정령치 휴게소에선 육안으로도 그 기세를 확인할 수 있다.
댐 위에 자리 잡은 6대의 탱크 역시 앞쪽에 큰 저수지만 있을 뿐 시야를 가리는 게 없기에 생존 벙커를 정밀 타격하거나, 공중에 떠 있는 드론과 매복지에도 직접 전차포를 쏠 수 있다.
물론 대지진에 견디도록 설계된 생존 벙커라, 전차 포탄이 떨어진다고 해서 쉽게 파괴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도 전차포의 위력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위용만 보더라도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게 분명하다.
게다가 남수혁과 강창배 부대가 가지고 있던 드론 15대와 이번에 새롭게 출격한 10대의 드론 총 25대가 동시에 공중으로 떠오르고, 지상엔 20㎜ 벌컨포까지 있으니, 저들은 분명 승산 없는 전투라 여길 것이다.
이때 적의 약점을 파고든다면 분명 사분오열돼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 터, 그때 적의 방어가 소홀한 틈을 타 맹공을 퍼부으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 * *
동주는 아침부터 분주히 방어대책을 수립했다. 적의 지원군이 올 것을 대비해 지상과 공중 방어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적이 쳐들어온다면, 아포피스가 오기 전 마지막 전투가 될 터. 오늘 하루만 버텨내면 되기에 쓸 수 있는 모든 무기를 투입하기로 했다. 정보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드론을 이용한 정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제는 적이 우리의 화기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대전차 지뢰와 산사태를 준비해 성공을 거뒀다.
이제 적은 우리가 3대대로부터 많은 무기와 장비를 받아 무장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제는 3대대가 합류한 사실을 숨길 목적으로 일부러 박격포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늘은 더 이상 숨길 이유가 없으니, 적이 쳐들어온다면 이 박격포를 잘 이용해 무찔러야 한다.
동주는 고재철 중위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박격포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상의했다. 이 박격포를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고재철과 함께 온 3명의 군인 그리고 군에서 포병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장재건이다.
우리가 보유한 KM30 4.2인치(107mm) 박격포는 사정거리가 6km에 분당 20발을 쏠 수 있다. 박격포탄이 적의 탱크를 명중한다면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비록 박격포 한 발로 탱크가 파괴되지는 않더라도 그 기세를 꺾기에는 충분하다.
다만 이 박격포가 300kg이 넘게 나가기 때문에, 한번 위치를 정하면 전투 중에는 옮기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신중하게 위치를 선정해야만 한다.
‘올 테면 와봐라. 이번에는 이 박격포로 혼쭐을 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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