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결사항전 (10)
아포칼립스 D-3, 2029. 4. 11.(수),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일대.
오전 10시.
심원주로부터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서강파 지원부대가 고기삼거리에 집결하고 있었다. 먼저 구례 쪽에 있던 강창배가 일행을 이끌고 이곳으로 왔다.
다음으로 탱크와 지프 그리고 대규모 병력을 실은 육공트럭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다. 공중엔 드론 택시가 떼 지어 날고 있었다.
어제 정령치 휴게소를 공격했던 부대보다 훨씬 많은 장비와 인력이 고기삼거리에 집결한 것이다.
동주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원군이 올 것이라곤 예상했지만, 이 정도 규모로 몰려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다. 어제보다 훨씬 힘든 하루가 될 것 같다.
동주는 서둘러 박격포를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오늘은 드론을 조종할 수 있는 성인이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출동하기로 했다.
몸이 성치 않은 은수도 싸우겠다고 나섰다. 신은혜, 임안나도 함께 하겠다고 자원했다. 드론 운전 경험이 있던 신수경은 첫날부터 함께했었다. 오기철도 잘 걷지는 못하지만, 드론 운전은 문제없다며 참전하겠다고 한다.
전차포보다 사정거리가 긴 박격포는 뒷산 구릉에 포진했다. 적이 도보로 침투할 수 있는 등산로 곳곳에 대인지뢰와 클레이모어를 설치해두었다. 비상시엔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도록 드론도 준비를 마쳤다.
서강파 무리가 고기삼거리에서 산악도로를 타고 올라오고 있다. 어느새 고기댐 부근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곳에 멈추더니 탱크를 댐 위에 정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음, ······저곳이라면 전차 포탄이 이곳까지 바로 날아올 거리다.
설마 했는데······. 아! 고기댐 아래쪽을 막았어야 했나?
산사태를 만들어 어디를 막을지 몇 번이고 고민했었다. 전차포 사정거리를 고려해 최대한 아래쪽에 잡아야 했다.
하지만 고기댐까지 오르는 길은 완만해 큰 절벽이나 경사면이 없다. TNT 폭탄으로 낮은 산비탈을 무너뜨릴 경우, 적이 쉽게 흙을 걷어내고 넘어올 것 같아 포인트를 잡을 수 없었다.
고기댐 윗부분과 주변에 너른 공간이 많아, 그곳에 탱크가 늘어서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떠올렸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저기에선 우리 생존 벙커가 한눈에 들어온다. 상대를 직접 보면서 표적을 정해 집중포화를 날릴 수 있게 된 거다.
우리 드론부대는 적의 드론과 싸우기도 전에 전차포 공격부터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정거리 내에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적 탱크를 교란할 수 있는 박격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그때 적 드론 한 대가 백기를 휘날리며 정령치 생존 벙커로 다가온다.
우선 대화를 하겠다는 생각이군! 과연 누가 올까?
드론이 정령치 주차장 앞 공중에 멈추어 섰다. 드론에 장착된 스피커에서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가 들린다.
“아, 아! ······난, 곽형규다. 아마 알 사람들은 다 알 거다, 내가 누군지. 난 오늘 서강파를 대표해서 이 자리에 섰다. 내가 자청해서 이렇게 온 건 더 이상의 피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동주와 상진은 놀라 까무러칠 뻔했다. 곽형규 저놈이 뻔뻔하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낯으로 이곳에 온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은수는 곽형규의 목소리를 듣고 소름이 쫙 끼쳤다. 그 지하실에서 겪었던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죽음의 공포, 치욕스러운 사건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순간 쓱 스쳐 갔다.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 저 드론을 향해 기관총을 쏘고 싶다.
동주는 마음을 가다듬은 후 곽형규에게 드론에서 내려와 대화하자고 제의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니 내려가는 건 어렵고, 이 자리에서 우리 요구 사항을 전달하고 돌아가겠다. 만약, 우리 제안을 듣고 싶지 않다면 바로 철수하겠다. 어떤가?”
굴욕이다. 이건 협상이나 대화가 아닌 그저 일방통보 아닌가?
맘 같아서는 당장 저 드론을 요격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자존심을 세워 녀석을 공격하거나 쫓아낸다면, 전쟁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멀리 나가기 위해서 물러날 때도 있는 법.
“좋다. 제안이 뭔지 들어주지.”
동주는 쩌렁쩌렁한 육성으로 곽형규에게 대답했다.
“두 가지다. 첫째, 우리 서강파 일원이었던 강대주, 오기철, 임안나를 우리에게 넘겨주면 서강파는 이 싸움에서 바로 빠지겠다.
그냥 공짜로 달라고 하면 염치없겠지! 그 대가로 우리가 데리고 있는 전동기를 돌려주겠다. 이 싸움은 너희가 그들을 받아줘서 벌어진 일이란 건 잘 알고 있겠지.”
아! 교묘하다. 일부러 내리지 않았던 거군. 다 듣도록 스피커로 말하겠다 이거구나!
“만약, 너희가 이들을 내주지 않으면, 서강파는 그 책임을 물어 바로 여기에서 전동기를 참하고, 오늘 너흴 응징하겠다.”
으윽! 이간질에 살해 위협까지, 교활한 놈! 우리 단합을 무너뜨리려는 속셈이다. 우리가 서강파에서 넘어온 강대주, 오기철을 쉬이 믿지 않는다는 걸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거기다 자신들의 공격에 대한 명분 쌓기까지.
“둘째, 여기 3대대 병력이 숨어든 걸 잘 알고 있다. 최용석, 고재철 중위 맞지? 너흰 군인 신분으로 항명하고, 심지어 반란을 꾀한 죄를 달게받아야 한다. 하지만 너희가 자수하고 넘어오면, 이번에 한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
‘음······!’
“만약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포로로 잡고 있는 3대대장 박석진 중령과 너희 동료들을 이곳에서 공개처형 하겠다.”
으윽! 이놈들이 우리 핵심 전력인 3대대 병사들까지 흔들고 있다. 사면초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놈들인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자! 우리 쪽 제안은 모두 전달했고. 참! 내 친구 상진인 잘 있는지 모르겠네. 여기 사람들은 서강파가 왜 이렇게 미친 듯 복수하려 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까? 우리 천 검사님! 잘 계신가요. 하하하!”
비열한 놈! 이곳저곳 막 들쑤시는구나!
“자! 한 시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말씀드린 분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않으면, 그때는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뒷일은 말 안 해도 아시겠죠?”
곽형규가 최후통첩을 하고 드론을 몰아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가 던진 돌은 지금껏 지리산 생존팀이 견지해온 화합이라는 호수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말았다.
적의 위세에 눌려 잔뜩 겁을 먹은 몇몇 사람은 강대주 일행을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천 검사가 서강파와 원한을 져서 저들이 이렇게 공격하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서강파가 왜 이리도 집착하는지 의아하게 여겼던 이들이 이제 천무용 형제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동주는 먼저 강대주, 오기철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쪽 의도가 뭔 것 같아요?”
“이건 정마리아 머리에서 나왔을 거예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펴서 우릴 이간질하고, 결속을 무너뜨릴 목적인 거죠. 이렇게 모여 논쟁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만큼 대비가 약해져 위험합니다.”
강대주는 적의 이간계라며, 무시하고 단호히 대응할 것을 요구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이 저쪽 상황을 가장 잘 아니까 먼저 묻는 거예요. 진짜로 전동기나 박석진을 죽일까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말 죽일 겁니다. 우리도 잡혀가면 마찬가지고요.”
“음······.”
“기오성은 절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아요. 아마 조직원들 다 모인 데서 우릴 공개처형 할 겁니다. 서강파가 지금까지 이렇게 유지되어 온 건, 그런 원칙 하나는 확실히 고수했기 때문이죠.”
“알겠습니다. 빨리 회의를 마치고 우리도 준비해야겠죠!”
동주는 대화를 마치고 다른 생존팀이 모여 있는 벙커 회의실로 갔다. 그곳에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곽형규가 떠벌린 통에 천무용 형제는 토론에 참여할 수 없게 돼,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다.
“서강파가 저렇게 목숨 걸고 죽어라 달려드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는데, 이제 다 알았잖아요. 다 저 강대주 일행과 천 검사 때문 아닙니까? 우리가 계속 고생해온 게 다 저 사람들 때문이라고요. 이참에 저들을 내주고 전쟁을 끝냅시다.”
오승현 교수가 가장 강력하게 강대주 일행을 내주자고 주장했다.
“맞아요. 저들은 애초에 우리 생존팀이 아니었다고요. 굴러 온 돌일 뿐이죠. 목숨이 달린 문제니만큼, 의리니 명분이니 따질 때가 아니라고요.”
심원기도 오 교수의 말에 동조했다.
“제발 저의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눈앞에서 아버지가 처형 당하는 걸 볼까봐 전전긍긍하던 전민국이 울먹이며 애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지금까지 목숨 걸고 함께 싸워왔는데, 이제 와서 내쫓아 죽음으로 몰다니요. 그리고 쟤들이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장재건이 반대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맞아요. 전동기 사장님한테는 미안하지만, 저놈들은 우리 벙커를 빼앗으려 기만술을 펴는 거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병력이 부족한데, 싸울 사람을 스스로 내주는 건 진짜 아닌 것 같아요.”
은수가 장재건과 뜻을 같이했다.
“저, 탱크 부대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우리가 힘이 있다면야 당연히 맞서 싸우지요. 그런데 어제와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명분만 내세웠다가, 가족들이랑 여기 있는 사람 다 사지로 몰 건가요?”
오 교수가 언성을 높여가며 반박하고 나섰다.
전쟁을 피하려면 저들을 보내야 한다는 무리와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보낼 수 없다는 무리로 나뉘어 치열히 다투는 바람에, 쉽게 결론 나지 않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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