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결사항전 (11)
아포칼립스 D-3, 2029. 4. 11.(수) 오전,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일대.
최용석과 고재철은 따로 3대대 병사들과 모여 회의를 했다.
생사가 달린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있다. 자칫하면 옛 동료를 죽음으로 몰거나, 박석진 대대장이 처형당하는 걸 봐야 할 상황이다. 저들을 살리려고 투항했다가는 우리뿐만 아니라 나머지 생존팀까지 사지로 몰 수 있다.
“우리 때문에 박석진 중령이랑 동료들이 처형당하는 건, 난 도저히 못 볼 것 같아. 차라리 투항하는 게 어때? 설마 우릴 죽이기야 하겠어?”
어제 간신히 목숨을 건진 김원규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싸우는 게 능사가 아닌 것 같아요. 괜히 여러 사람 죽게 하지 말고,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게 그나마 살길 아닐까요?”
고재철 중위와 함께 온 노상문이 동조했다.
“박석진 중령은 이미 죽었을 거야. 1대대에 있는 친구 통해 들은 이야기가 있어.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저 녀석들이 얼마나 비열한 줄 알아?”
“······!”
“시위대에 발포 명령한 게 우리 대대장이라고 뒤집어씌운 놈들이야. 그러려고 3대대 본부도 공격한 거라니까. 저놈들 입에서 나온 말은 다 거짓말이야.”
고재철 중위가 격앙된 목소리로 반대의견을 말했다.
“저도 그 소문 듣긴 했는데, 그래도 우리가 직접 확인한 건 아니잖습니까? 만약 박 중령님이 살아계시기라도 한다면······.”
이수성이 반문했다.
“저놈들이 진짜 박 중령님을 데리고 왔다면 벌써 보여줬겠지. 내가 아까 계속 망원경으로 봤는데, 전동기 사장은 확인했지만, 대대장님은 보이지 않았어.”
최용석이 무거운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다른 곳에 숨겨둬서 못 봤을 수도 있지. 진짜로 공개처형 할 수도 있고. 하지만 우리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니까, 너무 마음에 둘 건 아닌 것 같아.
우리 때문에 죽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우리 일 아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야.
우리가 투항한다고 하더라도 우릴 살려둘 리도 없고.
게다가 우리가 투항해버리면 여기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냐고? 그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지 않아?”
“싸워서 이길 수만 있다면 당연히 버텨야지요. 하지만 진짜 우리가 이길 수 있냐고요? 저 병력이 쳐들어오면 이번엔 도저히 막지 못할 것 같은데······.”
김원규의 목소리엔 불안이 짙게 배어있었다. 이렇듯 3대대 병사들도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
약속한 한 시간이 다 흘렀다. 정령치 휴게소에서 전투 드론 한 대가 내려온다. 드론 위에 백기가 꽂혀 있다. 드론이 고기댐 상공에 다다르자 멈추어 섰다.
“난, 지리산 생존팀 대표 이동주다.”
동주는 스텔라가 운전하는 전투 드론을 타고 직접 협상에 나섰다. 외부 스피커에서 나는 동주의 목소리가 고기댐 주위에 크게 울려 퍼졌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강대주, 오기철, 임안나를 넘겨주겠다. 너희도 우리에게 전동기를 넘겨라.”
“좋다. 그런데 우리가 요구한 게 또 하나 있잖아?”
곽형규가 반문했다.
“형규야! 진짜 약속은 지키는 거지?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하면 물러나는 거다?”
동주는 친구였던 형규에게 사정하는 투로 말했다.
“물론이지. 우리야 목적이 달성되면 당연히 물러나지.”
“3대대 병사들은 너희가 박석진 중령의 모습을 보여주면, 바로 투항하겠다고 한다.”
“음······, 좋다. 그래 박석진 중령의 모습을 보여주지, 기다려봐.”
곽형규는 상대가 잔뜩 겁먹어 요구사항을 수용하자, 자기 계획대로 일이 술술 풀려가는 것 같아 흐뭇했다.
저들의 전력을 확실히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다.
형규는 상대가 이렇게 나올 걸 미리 예상했다. 그래서 남수혁과 준비해둔 게 있었다. 박석진을 3대대 본부 지하에 가두고 고문할 때 찍어둔 영상이 있다.
그 영상을 여러 각도로 편집하고 조작해, 마치 지금 심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을 만들었다.
형규는 동주의 드론에 박석진의 모습이 담긴 영상파일을 보냈다. 동주는 다시 그걸 생존팀 본부에 보내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영상은 잘 받았다. 그런데 이게 지금 모습인지, 아니면 예전에 찍어둔 건지 우리가 어떻게 아냐? 직접 보여주든지, 아니면 통화라도 하게 해줘야지.”
동주는 계속 박석진이 살아있다는 명확한 증거를 요구했다.
“좋다. 우리가 준비해보지. 대신 그건 시간이 좀 걸리니까, 먼저 강대주 놈부터 교환하자.”
형규는 박석진이 이미 사망한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에게 그의 생존 사실을 알려줄 방법은 없다.
어차피 당장 3대대 병사들이 투항하는 것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다. 우선 강대주 일행부터 챙겨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면 된다.
그 이후엔 전차포를 쏴서 실컷 분풀이하는 거지. 포탄도 잔뜩 실어왔으니. 불벼락 맛을 보면 쟤들도 정신이 번쩍 들겠지. 투항하지 않고는 배길 방법이 없을걸.
형규는 부하들에게 전동기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서강파 조직원 세 명이 전동기를 끌고 왔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초췌한 모습이다.
동주도 생존팀에 연락해 강대주 일행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정령치 휴게소에서 두 대의 드론이 내려온다.
“자! 저 드론에 강대주, 오기철, 임안나가 타고 있다. 드론이 착륙하면 그들을 넘길 테니 너희도 전동기를 넘겨라.”
“걱정 말고, 어서 강대주나 넘겨!”
두 대의 드론이 고기댐 공터에 착륙했다. 드론 문이 열리고 천상진과 전민국이 내렸다. 이들은 각자의 드론에 태우고 온 사람들을 밖으로 끌고 나왔다. 머리엔 두건이 씌워져 있고, 몸통과 손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다.
‘음······, 저들이 강대주 일행을 강제로 제압한 걸까?’
“자! 어서 전동기를 넘겨라.”
동주가 곽형규에게 서둘러 교환하자고 재촉했다.
“음······, 그런데 뭔가 수상한데, ······왜 얼굴은 가린 거지? 얼굴을 보여줘야 전동기를 보내주지.”
곽형규는 임안나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감지했다. 긴 치마를 입어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체적인 골격이 어쩐지 어색하다. 여성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얼굴을 보여달라고 말 한지 꽤 됐는데, 동주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런 꼼수가 우리한테 통할 줄 알았어? 어서 두건 벗겨봐!”
동주가 탄 드론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던 상진과 민국이 다가가 이들의 머리에 씌워진 두건을 벗겨냈다.
아니! 강대주가 아니잖아! 저 녀석들은 누구지?
옆에 있던 남수혁은 깜짝 놀랐다. 서강파 행동대장 김두식과 그 수하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어젯밤 전투에 참여했던 남수혁의 부하들이다.
모두 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상진과 민국은 재빨리 그들 뒤로 가 권총을 겨누고 섰다.
“강대주 일행을 넘기기 전에 우선 협상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들을 데려왔다.
어젯밤 너희가 버리고 간 부상자 9명을 우리가 치료해서 잘 모시고 있었지. 그중에서 세 사람 데리고 온 거다.
자! 이 세 명을 넘길 테니까, 전동기를 넘겨라. 너흰 수지맞는 장사 아닌가?”
동주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지금까진 겁먹은 듯 저자세로 일관했었다. 그런데 저 세 사람의 얼굴이 드러나자,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다.
으윽! 남수혁 이 자식, 다들 죽었다고 딱 잡아떼더니만, 결국 거짓말이었어.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다니!
곽형규, 남수혁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우선 서강파 조직원과 1대대 부대원이 모두 보는 앞에서 부상당한 부하 9명을 버리고 온 게 만천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창피해 얼굴을 들지 못할 상황이다.
게다가 전동기 한 명과 이들 동료 셋을 교환하자는 동주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이 없다.
동주 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면 안 되는데······.
그리고 남아 있는 부하 6명 문제가 남게 됐다. 서강파가 전동기, 박석진을 인질로 삼아 요구한 것처럼, 저들도 우리 조직원을 인질로 삼을 수 있다. 심지어 인간방패로 쓸 여지까지.
왠지 혹 떼려다, 되려 큰 혹을 붙인 느낌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곽형규가 남수혁에게 넌지시 물었다. 남수혁이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지금 저 자식들 공격해서, 저 세 명 구출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한참 고민하던 형규가 공격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음······, 그러면 저 세 명도 다치게 되니까, 차라리 인질교환한 뒤에 공격하는 게 어때?”
남수혁은 김두식 일행을 안전하게 구출한 뒤에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음······,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형규는 동주의 계략 때문에 잠깐 궁지에 몰리긴 했지만, 금방 역전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좋다. 네가 잔꾀를 부렸다 이거지. 하지만 그것도 이게 마지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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