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결사항전 (13)
아포칼립스 D-3, 2029. 4. 11.(수),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일대.
1시간 전, 지리산 생존 벙커 회의실.
동주는 생존팀 일행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자, 직접 나섰다.
“여러분! 우린 지금 서강파가 원하는 대로 춤을 추고 있는 겁니다. 저놈들이 쳐놓은 덫에 제대로 걸린 셈이죠. 그 덫이란 게 우리끼리 싸우며 분열하길 바라는 이간계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들은 호시탐탐 여길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빨리 전열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동주는 온 마음을 다해 일행에게 호소했다.
“현 상황을 정확히 직시하자는 오 교수님 지적이 맞습니다. 저들이 어제처럼 바로 공격하지 않고, 왜 이런 이간계를 썼을까요?”
“······!”
“저들은 우리 생존 벙커 설계도를 가져가, 자기들도 똑같이 만들고 있습니다. 전차포 공격으로는 우리 벙커에 타격을 줄 수 없단 걸 잘 알 겁니다.
결국, 보병을 이끌고 쳐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이기더라도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걸 아는 거죠.”
“우리가 강대주 일행을 보내지 않으면, 희생을 각오하고 바로 공격해 들어오지 않을까요?”
심원기가 동주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가 그들을 보내면 약속대로 쳐들어오지 않을까요?”
“······!”
“저들은 여전히 우릴 얕잡아 보고 있습니다. 고기댐 위에 탱크를 도열한 건 누구 작전인지 몰라도, 전술적으론 최악이죠.
배수진을 친 셈인데요. 앞은 호수고 그 뒤는 댐 아래로 떨어지는 절벽 같은 곳이죠. 우릴 겁주고 전차포 쏘기 좋은 곳을 찾아 자리 잡았지만, 전 패착이라고 봅니다.
“······!”
“저들은 우리가 선제공격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 거죠. 지금껏 계속 방어만 해온 걸 보고, 우릴 얕잡아 보는 겁니다.
게다가 오 교수님 말씀처럼 전면전을 하면 자신들이 전력 면에서 월등히 앞선다고 자신하는 거죠.
전 오히려 이걸 노려, 이번엔 우리가 먼저 치려고 합니다. 저 탱크부대만 무력화하면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새거든요. 저를 믿고 그리고 우리의 단결된 힘을 믿어주십시오.”
“그래도, 선제공격까지 했다가 실패하면, 그때는 정말 더 큰 일 나는 것 아닌가요?”
오승현 교수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적은 저희가 박격포를 가지고 있는 걸 아직 모릅니다. 어제 한 번도 안 썼기 때문에 그때 본 우리 무기가 전부일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박격포 하나만으로도 저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거기다 저놈들이 부린 이간계 덕분에 적진 깊숙이 폭탄을 보낼 묘안이 있습니다.”
동주는 강대주 일행과 전동기를 교환하는 척하면서, 어제 붙잡은 적 부상병들 몸에 폭탄을 설치해 보내는 전략을 설명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듣게 된 일행들은 충분히 희망을 걸어볼 훌륭한 작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다시 전의를 불사르기 시작했다.
동주는 3대대 부대원들에게도 작전 내용을 설명해 설득했다. 저들이 데리고 있는 3대대 병사들까지 구출하진 못하지만, 그들의 뜻대로 우리가 망가지는 걸 보고 있을 수 없다며 이들도 힘을 내기로 했다.
동주는 자신이 TNT 폭탄을 터트리거나, 적이 우리 쪽 드론을 공격하면 곧바로 박격포 공격을 개시하고, 드론 부대도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적진에 들어가 협상도 하고, 상황에 따라선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 위험한 임무를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었다. 이 작전을 구상한 스스로 모든 걸 떠안고 해결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드론 조종에 미숙한 동주 혼자서 갔다간 일을 망칠 수 있다. 협상과 적의 동태 살피는 일을 혼자서 다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 가망을 높이려면 조종술이 뛰어난 사람과 함께 해야 한다.
최용석에게 같이 가달라고 부탁할 순 없다. 그는 드론 부대를 지휘해 적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처음엔 상진에게 부탁할까도 했다. 그런데 강대주 일행과 전동기를 교환하는 일에 상진을 투입하기로 했다.
그 일도 드론 조종술이 뛰어나고 상황판단이 좋은 사람이 맡아야 한다. 인질 세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하고, 혹여 저들이 포박을 풀거나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라 드론 한 대로는 힘들다.
다행히 아버지를 구출하겠다는 일념에 위험한 일임에도 전민국이 자청했다. 어쩔 수 없이 스텔라에게 부탁할 생각으로 그녀를 찾았다.
“스텔라!”
“오빠!”
스텔라가 동주를 반갑게 맞는다.
“어려운 이야기인데, 아까 작전 회의 때 말한 것처럼 내가 직접 드론을 타고 갈 거야. 그런데 드론 조종을 해줄 사람이 필요해서······.”
“에이! 그런 이야기면 진작 나한테 했어야지. 내 생명의 은인인데, 내가 그 정도도 안 도와줄 거라 생각했어?”
스텔라가 웃으며 너무도 쉽게 승낙했다.
“아니, 너무 위험한 일이라. 저쪽에서 우릴 저격한다면 한순간에 끝장날 수 있거든.”
“걱정하지 마! 오빤, 협상이나 집중하라고. 상대 움직임은 내가 살필 테니까. 내가 신호 주면 주저하지 말고 바로 격발기 누르고, 알았지?”
“응······!”
“오빤, 다 좋은데 그 마음이 약한 게 문제라고······!”
“하하! 그래, 고맙다 스텔라. 이번엔 다를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동주는 준비를 마치자, 전투 드론을 타고 스텔라와 고기댐 상공으로 갔다. 드론에 백기를 꽂았지만, 언제 적의 대공포 공격이 있을지 모른다. 한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다행히 적의 공격은 없었다. 동주는 계획한 대로 술술 교환 협상을 진행했다. 옆에 있던 스텔라는 적의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적의 드론 부대는 다섯 대 정도만 공중에 대기 중이다. 나머지 드론들은 고기삼거리 운봉마을과 고기댐 뒤편 도롯가에 나누어 대기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게 이번에 적이 가져온 벌컨포구나!
얇은 포신 6개가 둥그런 원형 지지대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태다. 포신 옆에는 탄약을 적재하고 연발 발사 때 자동으로 공급해주는 탄약공급통이 보인다. 수천 발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지프 뒷좌석에 장착된 녀석의 위용이 어마어마하다. 겁이 덜컥 나는 수준이다. 게다가 사수가 망원조준기로 이곳을 노려보고 있다. 저 녀석이 발사되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예상대로 두건을 씌운 세 사람의 정체에 의문을 가지는 눈치다.
그래 얼굴을 보여주지!
상진과 민국이 김두식 일행의 두건을 벗겨냈다. 녀석들이 모두 놀란 눈치다. 강대주 일행을 기대했는데, 웬걸 동료 행동대장인 김두식과 그 부하들이다.
천무용은 어젯밤 다섯 명의 서강파 부상병들을 일일이 심문해, 그들의 조직 내 위치와 업무를 확인했다. 가장 서열이 높은 녀석이 김두식이었다. 남수혁 휘하로 강창배와 동급인 행동대장이다.
동주는 폭탄 조끼를 입힐 사람으로 김두식과 그 부하 두 명을 골랐다. 인간방패에서 더 나아가 인간폭탄으로 사용하려 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저걸 터뜨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저들이 폭탄 조끼 때문에라도 물러난다면, 더 이상의 공격을 포기한다면, 터뜨리지 않고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공격태세를 보이면 그땐 어쩔 수 없다. 전시상황에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치명적인 방법이라 포기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기회다.
이들이 폭탄 조끼 입은 걸 발설하거나, 동료에게 신호를 보내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입에는 재갈을 물리고, 얼굴에는 두건을 씌웠다.
출발하기 전, 허튼짓하면 그땐 바로 폭탄을 터뜨리겠다고 충분히 위협했다. 죽기 싫어서라도 반항하지 못할 것이다.
동주가 이들 셋과 전동기를 교환하자고 제안하자, 상대가 한참 뜸을 들이더니 수락했다.
우선 저 세 사람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우릴 치려고 하는 속셈이겠지. 너희들 뜻대로 되진 않을걸!
동주는 전동기를 확보하자, 곧바로 김두식 일행의 몸에 부착된 TNT 폭탄을 보여주며 적을 위협했다.
게다가 실은 서강파 조직원 5명만을 데리고 있었지만, 적이 그 숫자를 모르니 최대한 부풀려 마치 9명을 데리고 있는 것처럼 허풍을 떨었다. 본진에 인질로 6명을 더 데리고 있다고 하니, 더더욱 섣불리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작전에 제대로 걸려든 듯하다. 녀석들이 어쩔 줄 몰라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벌써 김두식 일행 곁에서 멀어지려고 조금씩 뒷걸음치는 녀석들이 보인다. 저기 곽형규와 남수혁 역시 몸을 피하는 눈치다.
겁나겠지! 어제 산비탈이 무너지는 걸 본 사람은 내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테니까. 우리가 가진 폭탄이 어느 정도 위력인지 충분히 느꼈잖아!
먼저 상진과 민국이 전동기를 태워 본진으로 돌아갔다.
다행이다. 이제 우리만 조심히 빠져나가면 된다. 저 폭탄은 어떻게 하지? 그냥 여기서 터뜨리고 내뺄까?
망설여졌다. 저 세 사람 목숨만 빼앗는 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게 된다.
꼭 이렇게 잔인한 방법을 써야만 한단 말인가?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불편하고 힘들었다.
그때 벌컨포의 움직임을 포착한 스텔라가 전투 드론을 기동하기 시작했다. ‘부웅’ 갑자기 위로 솟구치고 있다. 적이 쏜 벌컨포 총성이 고막을 찢으려 한다. ‘위잉, 위잉’ 스텔라가 적 포탄을 피하려고 곡예비행을 하고 있다.
그래, 네 녀석들이 가만있는 게 이상하다 했다.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다.
동주는 과감히 무선 격발기를 눌렀다. 세 명의 몸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졌다. 반경 50여 미터 내에 있던 사람들이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커다란 화염과 검은 구름이 주변을 다 삼킬 무렵, 약속대로 우리 팀 박격포가 탱크를 때리기 시작했다.
고기댐 일대는 그렇게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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