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전쟁의 속내
아포칼립스 D-3, 2029. 4. 11.(수),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일대.
고기삼거리에 모인 서강파 패잔병들은 드론과 육공트럭에 탑승하며, 무등산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른다.
남수혁은 곽형규를 이끌고 생존팀 드론의 기관총 공격을 피해 숲길로 도망쳤다. 지난번 야간 전투 때 이용했던 길이다. 장대비를 맞으며 고리봉을 넘어 고기삼거리로 돌아왔다.
비에 젖은 데다 날이 쌀쌀해져, 추위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난 전투 때 다친 상처는 마치 썩어 문드러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흐물대고 아프다.
이런 육체의 고통은 어떻게든 견딜 수 있지만, 패배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는 쉬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다.
이곳에서 죽은 동료가 몇이던가?
불현듯 김필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행동대장에서 간부로 올라갈 좋은 기회를 잡았다며, 어찌나 좋아하던지. 교도소에서 나오자마자, 안에 있던 쓸만한 녀석을 소개하겠다며 신이나 하던 그 친구의 얼굴이 스쳐 갔다.
이제 그는 어디에 있을까?
아까 본 김두식의 얼굴도 스쳐 갔다. 3대대 본부를 점령하고 기뻐 환호성을 지르던 녀석의 모습이 선한데, 눈앞에서 폭탄 조끼가 터져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도 셀 수 없이 많은 부하를 전장에 버리고 도망쳐왔다. 그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지만, 이제 남은 시간이 없어 떠나야 한다.
무엇 때문에 저 지옥 같은 정령치를 빼앗으려 그리도 애를 썼던가?
천 검사와 강대주에게 복수하고 싶은 일념이 가장 컸다. 지금도 그 녀석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무리 위험하고 힘든 일이라도 당장 뛰어갈 것이다.
하지만 1대대 병력까지 총동원하고도 이렇게 처참히 패배하고 말았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무등산 레이더기지로 돌아가는 게 무섭다. 다시 기오성 앞에 서, 그에게 패배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게 너무도 두렵다. 정마리아를 볼 낯도 없다.
곽형규 역시 분노에 차 씩씩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엇 때문에 이 꼴이 되고 만 걸까? 왜 난 계속 저 이동주 녀석에게 밀리는 걸까? 예전엔 정말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는데, 갈수록 태산같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 세 명의 몸에 폭탄 조끼를 입혀 집어넣을 생각을 하다니! 설마 선제공격까지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분명 이간책이 상대를 꽤 괴롭혔을 텐데, 어떻게 불과 한 시간 만에 내분을 잠재우고 저런 작전을 펼칠 수 있단 말인가?
형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탱크에 타고 있던 김성철도 용케 살아남아 고기삼거리에 도착했다. 자신의 탱크와 부대원 대부분을 잃어 몹시도 화가 난 상태다.
이제 돌아올 사람은 다 온 듯하다. 부상자를 가득 태운 육공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세찬 바람을 뚫고 끝도 없이 내리고 있다.
하필 웬 폭풍이란 말인가?
어수선한 날씨가 전쟁에서 참패한 병사와 지휘관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 긴 행렬이 폭풍우 속으로 사라져 간다.
*
무등산 레이더기지에 도착한 남수혁 일행은 기오성의 집무실로 가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도대체 얼마나 잃은 거야?”
기오성이 침착하게 물었다.
“탱크 6대, 지프 3대, 육공트럭 3대, 드론 12대, 사상자는 50명가량입니다.”
남수혁이 메모해온 종이를 보며,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저쪽은?”
“잘은 모르지만, 드론 몇 대 떨어진 정도 같습니다.”
“뭐, 뭐라고? 그렇게 판판이 깨지고 온 거야?”
기오성이 한심하다는 듯 떫은 표정을 짓는다.
“죄송합니다.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남수혁이 또 맞을 것 같아 잔뜩 움츠리고 있다.
“이봐, 김 중령! 수혁이 하고 형규야 민간인이니까 그렇다 치고, 자넨 군 지휘관이잖아! 아무리 저쪽에 3대대 병력 몇 명이 숨어들어 갔다고, 이렇게 깨지고 올 수 있는 거야?”
기오성이 김성철을 노려보며 묻는다.
“박격포까지 있을 줄은 몰라서······. 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면전을 해선 승산이 없다고요. 거기다 저놈들 협박하는 작전이 오히려 기회를 준 셈이 돼서······.”
김성철은 패전의 책임을 곽형규와 남수혁에게 떠넘기고 있다.
“형규야! 너,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더니 이게 뭔 꼴이냐?”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쪽 화력이 그렇게 셀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곽형규는 고개를 푹 숙이며 풀 죽은 표정이다.
“아니다. 널 탓하려는 건 아니야. 그동안 너가 우릴 위해 많은 걸 해줬는데, 이 정도 가지고······. 다들 나가 봐!”
남수혁은 집무실을 나서며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전투보다 피해가 더 커, 기오성이 노발대발하며 몽둥이까지 들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너무도 침착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넘기는 것이다.
왜일까?
남수혁과 곽형규는 곧장 정마리아에게 가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다.
“일은 무슨 일, 이기든 지든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그러는 거지.”
정마리아가 퉁명하게 대답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져도 목적을 달성했다니요?”
“이번에 김성철 부대를 다 끌고 갔잖아. 탱크고 뭐고 거의 전멸한 통에, 이제 김성철에게 부하라고는 몇 안 남았어. 우리로서는 가장 눈엣가시처럼 걸리는 게 김성철의 세력이었는데, 이참에 쟤들이 싹 정리해준 셈이지.”
“아하! 그런 큰 뜻이 있었군요.”
남수혁이 눈을 반짝인다.
“게다가, 인원 초과로 누굴 솎아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번 전투에서 불필요한 녀석들 다 제거돼 이제 이곳도 여유가 생긴 것 아니야!”
“음······.”
“기오성은 애초부터 저 벙커에 별 욕심 없었어. 그래서 직접 전투에 나서지도 않았잖아.”
“······!”
“오직 무등산 벙커 생각뿐이야. 이 벙커를 튼튼하게 만들어, 여기서 살아남는 게 최우선인 거지. 아포피스가 떨어진 뒤에 얼마나 오래 벙커에 있어야 할지 아무도 모르잖아! 식량문제 때문에 애초부터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갈 생각이 없던 거야.
지리산 벙커를 빼앗으면 그쪽으로 인원을 보내 좋고, 빼앗지 못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면 불필요한 녀석들 다 제거한 셈 치겠다는 속셈이지.”
정마리아는 기오성이 전쟁을 벌인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하아! 우리 누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런 큰 뜻을 알았으면, 진작 저한테 귀띔해주셨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곽형규와 정마리아는 이번 패배로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어 못마땅한 표정이다. 반면 눈치 없는 남수혁은 당장의 걱정을 덜어서인지 뭔가 홀가분해진 느낌이다.
* * *
동주는 서강파가 고기삼거리에서 철수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아! 다행이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구나.
저들도 계속 전쟁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이미 많은 부대원을 잃었고, 사기도 떨어졌을 게 분명하다. 지금쯤 지리산 생존 벙커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여길 것이다.
이제 아포피스가 떨어지기까지 채 48시간도 남지 않았다. 전쟁 때문에 준비하지 못한 것들, 긴 칩거 생활을 견디기 위해 살피고 확인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놈의 일은 나에게 떨어지질 않는군!
먼저, 남은 서강파 부상자 두 명을 추방했다. 치료가 끝나기도 했지만, 이곳에서 더 오래 머물다가는 무등산 레이더기지까지 돌아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서둘러 출발해야 서강파와 합류해 돌아가거나, 아니면 스스로 길을 찾아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 쪽 부상자들을 살폈다. 천무용과 오승현은 드론이 추락할 때 머리를 다쳐 병상에 누워 있었다. 둘 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라 며칠 쉬면 좋아질 듯하다.
오기철은 오늘 드론을 직접 조종했을 정도로 회복 속도가 빠르다. 비록 절뚝거리긴 해도 이제 혼자서도 걸을 수 있는 상황이다.
전동기는 화학공장에서 서강파 무리에 대들다가 맞아, 온몸에 타박상을 입은 상태였다. 전민국은 아버지가 무사 귀환했지만, 공중전이 급박해 서로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다.
전투가 한참 진행 중일 때, 전동기는 드론 은거지에 서서 안타깝게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는 전투가 끝나고 드론이 착륙하자마자 뛰어가 아들을 껴안았다.
전민국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아버질 세차게 안았다. 이들 부자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동주는 뿌듯했다.
가장 좋지 않은 건 복부에 총탄을 맞은 나갑주다. 어제까지 자가호흡을 하지 못해, 삽관한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태호 아버지 김창수의 후원으로 벤틸레이터(Ventilator, 인공호흡기)까지 확보하길 천만다행이다.
어제까진 의식도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전투가 끝나고 와보니 다행히 미약하지만, 의식이 있다.
눈동자의 움직임이 있고, 손도 미세하게 움직여 의사표시를 하려 한다. 내일이면 자가호흡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목에 심은 관도 빼낼 계획이다.
장기손상이 심해 앞으로 한 달 이상 병상에 누워 치료를 받아야 한다. 얼마나 건강이 회복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전쟁통이라 신경 쓰지 못했는데, 신수경의 아들 민호의 발작도 심각한 상태였다. 답답한 벙커에 갇혀 계속되는 굉음과 진동에 놀라 폐소공포증이 악화된 듯하다.
태호가 진정제를 놓아 간신히 발작을 멈추게 했다. 앞으로 계속 약에 의존해야 한다면 그것도 큰일이다. 무언가 좋은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식량과 물자도 더 끌어모아야 한다. 예상했던 인원보다 10명 이상이 더 늘었다. 3대대 병사들이 들어와서다.
이들이 없었다면 서강파와의 전쟁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과 함께 살면서 소모되는 식량을 살폈더니, 지금까지 비축한 것으로는 1년을 채 버티기 어렵다는 결론이다.
오늘과 내일 남은 시간 동안 식량 확보를 위해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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