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생존 준비 (1)
아포칼립스 D-3, 2029. 4. 11.(수)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 일대.
동주는 곧바로 회의를 소집해 물자확보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계속된 전투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날씨가 급변하고 새떼들이 떠나는 걸 봤기에 다들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장성과 담양에 있는 서강파 물류창고에 다녀오겠습니다.”
강대주가 맨 먼저 방안을 말했다.
“네? 그곳은 이미 물자가 바닥난 곳 아닌가요? 게다가 서강파가 뭘 남겨놓았을 리도 없고······.”
천상진이 반문했다.
“제가 그곳 담당자여서 잘 압니다. 지하에 비밀 창고가 있는데, 거긴 저랑 몇 사람만 아는 곳이죠. 자금 세탁하면서 숨겨둔 것들이 많거든요.
돈 같은 건 이제 필요 없지만, 원래 그곳이 쌀 비축 창고여서 뭐라도 남아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제발 뭐라도 있어야 할 텐데요. 또 다른 아이디어가 있을까요?”
동주가 일행에게 물었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다. 그때 김정현이 말을 꺼낸다.
“음······, 서강파가 생존 티켓이라며 벙커 입장권을 팔아 물자를 확보했다고 들었습니다. 다급하니 우리도 오늘, 내일 물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 보는 게 어떨까요.”
“좋습니다. 혹시 떠오르는 사람이라도 있으신가요?”
동주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김정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광주에서 손꼽히는 부자라, 재력가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음······, 광주백화점 대표인 성광조, 그 사람을 데려오면 물자는 따라오게 될 겁니다.”
“아! 그분도 유통 쪽이나 관광, 레저 쪽을 꽉 잡고 있죠!”
동주도 익히 들어 아는 인물이다.
“지금 함양에 있는 자기 클럽하우스에 있을 겁니다. 거기가 산악 골프장으로 유명한 곳이거든요. 듣기로, 거기에 생존 시설을 만들어 두고 물자를 잔뜩 쟁여두었다고 합니다. 제가 가서 한 번 이야길 해보죠.”
“고맙습니다. 김 대표님!”
“전 군부대를 돌면서 전투식량과 다른 물자를 확보해보겠습니다.”
최용석이 이번에도 앞장서 나섰다. 3대대 병사들이 가져온 전투식량을 맛보고 일행들은 모두 극찬을 했었다.
전투식량에 들어간 볶음밥과 반찬인 볶음김치, 소시지, 미트볼 모두 한 끼 식사로는 충분한 영양과 맛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후식으로 맛있는 초코볼과 파운드 케이크까지 들어있다.
특히 지퍼백 위쪽에 있는 플라스틱 고리를 잡아당기기만 하면 발열이 일어나, 약 8분 뒤면 따뜻한 식사 한 끼가 완성되니 그 편의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유통기한이 3년이나 되기 때문에 생존팀으로는 이보다 더 좋은 식량은 없을 듯하다.
“좋습니다. 다들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그중에서 하나만 성공해도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장대비가 내리고 있지만, 시간이 얼마 없으니 바로 출발하시죠.
다들 무전기 꼭 챙기시고요. 일행들 안전이 우선이니, 위험이 따르면 언제든지 우선 피하십시오. 아시겠죠?”
“네!”
지리산 정령치 휴게소에 있던 드론들이 일제히 떠올랐다. 동주도 스텔라가 모는 전투 드론에 김정현을 태우고 함양을 향해 출발했다.
오늘과 내일 충분한 물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벙커 생활이 힘들어질 수 있다. 어둠 속 쏟아지는 장대비를 뚫고 가는 드론들의 모습이 너무도 장엄하게 보인다.
저들이 임무를 잘 완수하고 돌아와야 할 텐데······.
저 멀리 함양 골프장의 불빛이 보인다. 전기공급이 끊어진 지 꽤 됐는데, 저곳은 여전히 훤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골프장까지 오르는 산악 도로에는 이 빗속에도 차량 행렬이 끝도 없이 줄지어 있었다. 승용차 밖에까지 피난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휘발유나 경유 공급이 끊어진 지 오래인데, 어떻게 차를 운행하는지 궁금했다.
전투 드론이 조심스럽게 클럽하우스 옥상에 있는 드론 주차장에 착륙했다. 넓은 주차장 한편에 커다란 드론 다섯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곳에서 손님을 맞거나 화물을 실어나르는 용도로 쓰는 드론인 듯하다.
정장 차림의 남자 직원 세 명이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와 있다. 동주는 드론에서 나와 그들에게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이들이 우리 일행을 안으로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클럽하우스 1층으로 갔다. 으리으리한 클럽하우스 로비가 나왔다. 마치 여전히 골프장 영업이라도 하는 듯, 프런트에는 여직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동주 일행은 1층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대기했다. 얼마 후 여비서가 이들을 2층에 있는 회장실로 안내했다. 성광조가 김정현을 반갑게 맞이한다.
이곳 골프장은 해발 700m가량 고지대에 있다. 30만 평 규모의 골프장 맨 위쪽에 큰 규모의 클럽하우스, 레스토랑, 4층 규모의 콘도, 부대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광조는 자신이 운영하던 광주백화점과 마트에 있던 물품을 이곳으로 옮겨와 지하 창고에 가득 채워 넣고 아포피스를 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 성광조의 가족 이외에도 직원 가족까지 50여 명이 머물고 있어 이들 모두를 지리산 생존 벙커로 초대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다.
어쩔 수 없이 성광조에게 남은 식료품을 제공해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광조 역시 이번 아포피스 충돌 이후를 버티려면 막대한 물자가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곤란하다며 거절했다.
그때 동주가 성광조에게 물었다.
“우리가 오면서 보니까 골프장까지 오르는 도로에 차들이 가득 차 있던데, 보셨어요?”
“이야기는 들었어요. 피난민들이 서울 쪽으로 올라가다가 길이 막혀서 이제 높은 산 쪽으로 오르고 있다고 하데요.”
“만약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몰려오면 혹시 대책이 있으실까요?”
“음······, 그래서 우린 골프장을 폐쇄하고, 정문엔 바리케이드까지 쳐두긴 했죠.”
그때 직원 하나가 다급히 회장실 문을 두드린 후 들어왔다.
“회장님! 저희 골프장 불빛을 보고 사람들이 이쪽으로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정문 앞에서 문 열어달라고 난리입니다.”
“뭐, 왜 우리 보고 문을 열어달라는 거야?”
“막무가내로 골프장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겁니다. 이곳에 텐트를 치고 싶다면서요.”
“하, 참!”
동주가 우려했던 일이 그대로 벌어지고 말았다. 아까 공중에서 본 차량 행렬들이 이 골프장을 향한 것이었다. 벌써 수백 대의 차량이 골프장 정문 앞 너른 공터에 가득 차 있었다.
“회장님! 저 차들이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들어오는 건 시간 문제 같습니다. 저들이 다 들어오면 분명 이곳에 있는 물자를 탐내겠죠. 여기 있는 인원으로 막아내실 수 있겠습니까?”
동주가 다급히 성광조에게 물었다.
“음······.”
“게다가 이곳 시설은 소행성 충돌 때 발생하는 폭열이나 대지진을 견디지 못합니다. 아무리 식량이 많아도 무용지물인 셈이죠.”
그때 ‘콰광’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우자, 도로에 줄지어 섰던 차들이 끝내 정문을 부수고 밀고 들어온 것이다.
성광조는 급히 통유리창으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 정문이 뚫리자 그곳으로 줄지어 차들이 들어오고 있다.
우비를 뒤집어쓴 피난민들도 무리 지어 골프장 안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들어오는 차가 끝도 없다. 벌써 백여 대 남짓 차량이 들어왔는데, 그 뒤로도 들어오는 차량의 줄이 끊이지 않는다.
골프장에 들어선 피난민들이 비를 피하려 클럽하우스 문을 열어달라고 아우성이다. 언제 저들이 폭도로 변할지 모른다. 겁이 덜컥 난 성광조는 황급히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동주 일행도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만약 저들이 폭도로 변해 공격이라도 한다면,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위험이 있다. 옥상에 있는 드론까지 빼앗으려 할 게 뻔하다.
동주는 성광조에게 서둘러 결단내릴 것을 재촉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비축해 둔 비상식량을 제공할 테니 가족을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동주 일행은 기꺼이 승낙하고, 서둘러 드론에 짐을 싣자고 제안했다.
지하 창고에 내려가 보니 엄청난 양의 식료품과 생필품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성광조가 가리킨 건 재난대비로 일가견이 있는 일본에서 직접 수입해온 비상식량이다.
영하 30℃에서 동결건조해 수분을 극한까지 제거한 다음 오래가는 캔에 탈산소제를 넣어 보관함으로써 음식의 맛은 물론 색, 향기, 식감까지도 25년 동안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제품이다.
이 비상식량은 뜨거운 물만 넣으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지만, 물이 없을 때는 건조상태 그대로 먹을 수도 있다.
거기다 보존 기간은 5년으로 짧지만, 인기 레스토랑의 음식에 전혀 뒤지지 않는 맛으로 유명한 비상식량도 있었다. 일본에서 맛있기로 이름이 난 명품 아키타 소고기를 레드와인에 넣어 요리한 ‘비프스튜’ 등 다양한 메뉴의 비상식량이다.
지하 보관소에서 옥상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지하에 있던 비상식량을 옥상으로 올리는 작업이 시작됐다.
옥상에는 드론을 이용해 이곳까지 식자재를 운송할 때 사용한 플라스틱 소재 대형상자가 있었다. 그 크기가 20피트 컨테이너의 약 1/3 크기라 상당한 양의 짐을 실을 수 있다.
동주 일행은 이곳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30개들이 박스 단위로 포장된 비상식량을 차곡차곡 담았다.
다음으로 통조림, 건빵, 건조식품 등 다양한 비상식량을 옥상으로 옮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폭도들이 클럽하우스에 쳐들어오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식량을 옥상으로 옮겨야 한다.
동주 일행이 타고 온 전투 드론과 골프장에서 운용하는 드론 5대가 먼저 약 500kg가량의 비상식량을 실어 지리산 생존 벙커를 향해 출발했다.
직원들이 클럽하우스 문을 잠그고 버티고 있지만, 언제 그곳마저 뚫릴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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