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피난민 (2)
아포칼립스 D-2, 2029. 4. 12.(목) 오후, 정령치 생존 벙커 일대.
동주는 오승현, 심원기 교수에게 생존 벙커를 운영하며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비상 상황을 점검하고, 기술적 문제를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수전해 시스템은 잘 가동하고 있다. 충분한 전력을 생산하고 있어, 사용한 드론 전부를 충전하고도 여유가 있다.
최용석, 고재철에게는 초소를 순찰하며 피난민 무리의 상황을 살펴달라고 부탁했다. 동주는 직접 정령치 터널 위 언덕으로 올라가 망원경을 들고 주변을 다시 살폈다.
남원에서 고기삼거리, 그곳에서 다시 고기댐까지 이르는 도로가 여전히 차량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사이사이로 피난 행렬이 끝도 없이 늘어섰다.
오늘 새벽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인파다. 어림잡아도 오만 명가량이 지리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고리봉 정상 부근은 물론 정령치까지 이르는 능선과 등산로 주변까지도 피난민들이 가득 차버렸다. 생존팀이 쳐놓은 철책 바로 앞까지 텐트가 들어서 있다.
그런데도 고리봉을 넘어 정령치 방향으로 오는 사람의 줄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더는 텐트 칠 곳을 찾지 못하자, 이제는 능선 아래의 위험한 비탈면까지 개간하며 애쓰고 있다.
구례 쪽도 마찬가지다. 노고단 길이 차량으로 꽉 들어찬 지 오래다. 만복대로 오르는 다섯 갈래의 등산로 곳곳에 피난민들이 줄지어 오르고 있다.
이제 만 하루밖에 남지 않아 차를 버리고 걸어서 올라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만복대를 넘어 정령치까지 이르는 등산로와 능선엔 사람이 누울만한 공간만 있으면 바로 텐트가 쳐지고 있다.
이곳 능선에도 생존팀이 쳐놓은 철책 앞까지 수천 개의 텐트가 늘어서 있다.
그때 최용석이 급하게 동주를 찾았다. 정문 쪽 초소로 뛰어 내려가 상황을 살폈다.
물통을 든 서른 명가량의 피난민이 철조망 앞에 서서 큰 소리로 물을 달라고 한다. 마치 물을 맡겨놓기라도 한 듯 당당하다.
물만 담아서 다시 돌아갈 테니, 철책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며 떼쓰고 있다. 만약 계속 막아서면 철조망을 끊거나 넘어오겠다며 위협까지 했다.
동주는 생존 벙커로 돌아가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평소라면 인도적 차원에서 물을 제공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와 다름없는 상황이다.
저들에게 물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그 소문이 퍼져 이 일대에 있는 피난민이 다 이곳으로 몰려와 물을 달라 아우성칠 것이다. 거기다 물 이외에 다른 것까지 달라고 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곳 정령치 주변에는 고기댐이 있어 그곳에 가면 충분한 물을 구할 수 있다. 저들은 고기댐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게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가까운 우리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때 후문 쪽에서도 피난민들이 물을 달라고 아우성이라는 보고다. 갈수록 난처한 상황이다.
저 많은 사람 모두에게 물을 제공할 여력이 없다. 고기댐으로 가면 식수를 구할 수 있기에 단호히 거절하기로 했다.
다만, 고기댐까지 갈 수 없는 노약자나 임산부에게는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물을 제공하기로 했다.
길게 줄 선 노인과 아이들에게 500mL 생수병 하나 채울 만큼의 물을 제공했다. 점점 줄이 길어지고 있다. 다행히 이 물이라도 얻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소요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제와 달리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바람마저 선선해 완연한 봄 날씨다. 그 때문에 커다란 소행성이 내일 지구와 충돌한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텐트를 쳐 생활할 공간을 가진 사람들은 준비한 식량으로 식사하거나,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과 달리 텐트 자리를 찾지 못한 피난민들은 철조망 앞으로 몰려와 이걸 치워달라고 아우성이다.
군복을 입고 총까지 찬 생존 팀원에게 돌을 던지며 야유까지 하고 있다. 철조망 뒤로는 지뢰가 있다고 설명했지만 믿지 않으려 한다. 저들이 언제 무력을 행사할지 알 수 없다.
후문 쪽 도롯가에 있는 피난민 중 일부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보고다. 방금 고리봉을 넘어온 수십 명의 무리 역시 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군부대를 기습해 총기를 탈취한 무리가 이곳 지리산 쪽으로도 들어온 것이다. 바짝 긴장해야 하는 상황이다.
동주는 각 초소에 그 사실을 알리고, 상대가 총을 들거나 철조망을 훼손하려 하면 위협 사격을 가하라고 지시했다.
오후 내내 도시에서 온 피난민들이 이곳 지리산 쪽에 발을 디뎠다. 이제 정령치 주변 능선과 도로는 물론 산비탈과 바위 위까지 빼곡히 텐트가 들어섰다. 텐트를 치지 못한 피난민들은 앉을 공간만 있으면 그곳에 짐을 풀기 시작했다.
저 많은 인파가 서강파 녀석들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철조망 너머에 있는 사람들도 원래는 모두 선량한 시민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생존이라는 문제가 걸리자, 너무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심지어 칼부림이 나기도 했다. 고리봉 쪽에선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누구도 경찰 역할을 하려 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죽인 사람은 버젓이 칼을 들고 태연히 그곳에 머물렀다.
법이 없는 곳에선 힘이 곧 법이다. 여럿이 뭉치면 그 자체가 힘이 된다. 어느새 피난민들 사이에 여러 무리가 형성돼, 각자 나름의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무리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서열이 정해지고, 지배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권력자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마치 스카우트하듯 좋은 자리나 조건을 제시해, 힘 좀 쓰거나 무기를 가진 피난민을 끌어당겼다. 자길 따르지 않는 피난민은 강제로 그 구역에서 쫓아냈다.
무리 집단끼리의 다툼도 벌어지고 있었다. 강한 세력끼리는 서로 눈치를 살필 뿐 전면전은 피했다. 하지만 자기보다 약한 무리는 어떻게든 짓밟고 약탈하고 만다.
총을 든 무리가 주변에 있는 약한 무리의 식량을 빼앗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어린아이들이 많은 데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서슴치 않고 그 부모를 때리고 식량을 빼앗았다.
주변에서 항의하자, 공중으로 총을 쏘며 겁을 준다. 다들 무서워 자리를 피하고 있다.
우리를 계엄군이라 여기는 몇몇은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존팀이 도울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리가 이 철책을 넘어가는 순간, 경계가 허물어져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저 많은 사람이 우리 쪽으로 뛰어들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생존팀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다. 처음엔 우릴 계엄군으로 보고 조심했었다. 하지만 태도가 점점 바뀌어 갔다. 우리가 계엄군이 아니란 걸 알게 된 눈치다.
서강파가 이곳을 빼앗으려 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간 데다, 노인과 아이도 있는 걸 보고는 우리가 민간인이라는 걸 확신하게 된 거다.
자기보다 좋은 조건에서 아포피스를 맞는 걸 그냥 바라만 볼 수 없는 이들이 있다. 그저 가족과 오붓하게 그리고 담담히 이 대환란을 맞이하러 온 보통 사람들을 선동해, 그들에게 생존팀을 향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너희만 살겠다는 거냐?’
저들의 팽배한 시기와 분노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총기로 무장한 세력이 여러 무리를 모아 무언가를 논의하는 모습도 보인다. 저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 불안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피난민들과 눈치 싸움을 하며 길고 긴 하루를 보낸 듯하다. 밤이 오면 저들 중 야망이 있는 무리가 이곳을 치러 올지도 모른다.
동주는 지난 서강파와의 전투에서처럼 스텔스 드론을 띄우기로 했다. 두 대 중 하나가 격추되는 바람에 이제 한 대만 남아 있다.
지금 저들은 서강파와 같이 탱크나 기관총으로 무장한 세력이 아니다. 고작해야 소총이나 수류탄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화력 면에서는 전혀 겁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많은 사람이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왔을 때가 문제다. 우리가 쳐놓은 철조망과 지뢰를 모두 파괴하고 넘어올 때에는 막을 방법이 없다. 어떻게든 오늘 밤을 무사히 넘겨야만 한다.
초소가 늘어 2시간 동안 보초를 선 후엔 바로 잠을 청해야 한다. 우리 인력으로는 3교대를 해야 해서, 4시간 뒤면 다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밤 10시.
동주는 스텔라와 함께 정령치 터널 위 초소에서 경계를 서고 있다. 남원 쪽을 바라보니, 마치 반딧불이가 하늘 가득 들어차 빛을 내는 듯하다. 텐트에서 새어 나온 불빛으로 온 산이 울긋불긋 물들었다.
멸망을 앞두고 있지 않았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이 또 있을까?
도로에 줄지어 서 있는 차량의 붉은빛이 고기댐에서 남원까지 쭉 연결돼,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구례 쪽 만복대 주변도 온 산에 형형색색 꽃이 피었다. 동주와 스텔라는 이 황홀한 광경에 취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밤하늘엔 어젯밤보다 훨씬 커진 아포피스가 꼬리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다. 광주나 남원 같은 도시에는 불빛이 사라지고, 이제 멀리 보이는 높은 산 정상 부근에는 여지없이 작은 불빛들이 가득하다.
과연 높은 산으로 피하면 아포피스 충돌 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당장 살아남더라도 그 이후를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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