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선동
아포칼립스 D-2, 2029. 4. 12. 밤 11시, 정령치 생존 벙커 일대.
정령치 터널 위 초소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스텔라가 동주에게 말을 건넨다.
“오빠! 저 사람들이 철조망 넘어서 달려오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음······, 어떻게 할까?”
동주는 오히려 스텔라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서강파 애들은 우릴 죽이려고 했지만, 저 사람들은 그건 아니잖아. 우리가 저 사람들을 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렇겠지?”
“오빠도 총까지 쏠 생각은 없었구나!”
“응, 그럴 순 없지.”
“난 또, 아까 오빠가 위협 사격하라고 그러고, 지뢰까지 묻으라고 하니까 정말 넘어오면 쏘려나 했지.”
“그럴까도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서······. 하! 힘들다.”
옆에 있던 스텔라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다독인다. 동주는 매번 힘든 결정을 해야 해서 많이 지친 상태다.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뱉고는 속마음까지 말하고 말았다.
“오빠! 그럼 차라리 이렇게 싸우지 말고, 우린 그냥 벙커로 들어가버리면 어때?”
“그건 너무 위험해. 우리가 두더지처럼 숨어들면, 저쪽은 사냥꾼 노릇을 하려 할 거야. 연기를 피워 두더지가 스스로 나오게끔 한단 말이지.”
“······!”
“처음엔 문을 부수겠다고 협박하겠지. 하지만 수류탄으론 어림 없잖아?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설 거야. 그러다 환기구나 관정을 발견하면 어떨 것 같아?
거길 막아버리거나, 파괴하겠다고 위협하겠지! 우리가 끝까지 버티면, 마지막엔 홧김에 저질러 버릴 거야. 그땐 생존 벙커가 무용지물이 돼. 꼼짝없이 갇혀 죽는 거지.”
“아, 그렇겠구나! ······오빤 정말 대단한 거 같아. 나야 오빠랑 같이 한 게 며칠밖에 안 돼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동안 오빠 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랐어. 오빠 없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니까.”
스텔라는 존경의 마음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동주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스텔라! 내가 더 힘내야겠지?”
동주도 스텔라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아이! 오빠도 좀 쉬고 그래, 오늘 여기 경계는 내가 설 테니까 누워서 좀 쉬어.”
“그나저나, 네 이야기 좀 해봐. 도대체 너 정체가 뭐냐?”
동주는 스텔라와 함께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어온 탓에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된 듯했다. 그래서 좀 더 편하게 물을 수 있었다.
“정체는 무슨, 난 스텔라고 오빠를 이렇게 잘 따르는 이쁜 여인이지, 호호!”
스텔라가 말을 돌리며 이야기하길 꺼린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장난기가 밴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며,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남자 친구 없어?”
동주가 대뜸 스텔라에게 물었다.
“아, 아니, 없는데······.”
“아, 그래. ······너처럼 예쁜 애가 남자 친구가 없다니, 이상하다!”
동주는 스텔라의 모든 게 궁금해졌다. 볼수록 예쁜 그녀의 얼굴에 빨려드는 느낌이다. 그녀에겐 투박하지만 정감이 가는 미묘한 매력이 있다.
“오빠는 은수 언니랑 사귀었다며? 내가 이미 호구조사를 해봤지.”
“응, 맞아.”
“어쩐지, 그때 은수 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남다르다 했어. 아직도 마음이 남았나 보지?”
스텔라는 궁금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주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의도한 대로 쉽게 정리되는 게 아니잖아. 처음엔 마음고생도 했지. 하지만 지금은 많이 정리된 것 같아. 그런 상념에 빠질 여유도 없고, 하하!”
동주는 어쩐 일인지 은수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걸 떠올렸다. 이젠 진짜 헤어지긴 했나 보다.
“오빠, 내일이면 우리가 다 죽을 수도 있는데, 두렵진 않아?”
“두렵지. 그저 생각을 멈추려 노력하고 있을 뿐이야. ······어찌 보면 무척 짧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무척이나 길었던 인생 같아. 수많은 얼굴이 떠오른다. 오늘 밤이 그래서 더 특별한 것 같아.”
“나는 말이야, 내일 죽는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해본 게 없거든. 아무것도 가져보지 못했고.”
스텔라의 목소리가 축 처져있다. 서러워 당장에라도 눈물을 왈칵 쏟아낼 분위기다. 그렇게 강하게만 보이던 녀석이 지금은 울먹이는 어린아이처럼 애처롭게만 보였다.
“너도 파란만장한 삶이구나! 언제 기회 있으면, 우리 소주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눠야 하는데, 그치?”
“헤헤! 진짜 술 사줄 거야?”
“물론이지, 우리 스텔라가 날 얼마나 도와주었는데!”
동주와 스텔라는 서로 마주 보며 따스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멸망을 앞두고 술 약속을 하다니! 정말 재밌는 발상이다.
저 멀리 교대를 위해 은수와 태호가 올라오고 있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됐나?
스텔라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2시간이 금방 흘러가 버렸다. 동주는 은수와 태호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생존 벙커로 돌아왔다.
이제 저 둘의 모습을 보아도 별다른 마음의 동요가 없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도 쉽게 변하는 것인가? 아니면 스텔라가 있어서일까?
어느 순간 스텔라의 얼굴과 미소가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점점 커지면서 은수의 얼굴과 자리를 밀어내고 있는 것만 같다.
아포칼립스 D-1, 2029. 4. 13. 정령치 생존 벙커 일대.
새벽 1시.
동주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쾅’하는 폭발음 때문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음, 이게 무슨 소리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옷을 입고, 벙커 밖으로 나갔다. 주변에 화약 냄새가 물씬 났다.
무슨 일일까?
동주는 무전기를 들고 상황을 보고해달라고 요청했다. 스텔스 드론을 몰고 있던 고재철이 응답했다.
고리봉 쪽에서 한 무리가 철조망을 끊고 넘어와, 정령치 쪽으로 오다 지뢰를 밟았다고 한다. 동주는 재빨리 터널 위 초소로 달려갔다.
약 100여 미터 앞에 발목이 잘려나간 녀석 하나가 쓰러져 있고, 주변에 그 무리의 모습이 보였다.
“야, 씨발 놈들아! 여기에 왜 지뢰를 묻냐고? 여기가 휴전선이라도 되냐? 우리가 뭐 적군이라도 되느냔 말이야!”
화가 난 일행 한 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까지 해대고 있다.
“여기 다친 사람이 있으니까 어서 도와주세요, 네?”
다른 일행은 부상자를 돌보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보초를 서고 있던 장재건과 장영수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저들과 초소 사이에 수십 발의 지뢰가 묻혀 있다. 밤이라 우리도 지뢰를 피해 그곳까지 갈 방법이 없다.
부상자가 계속 비명을 질러 댄다. 고통이 극심해 견디기 어려운 상황인 듯하다. 새벽 고요한 대기를 찢고 들려오는 비명 때문에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동주는 지뢰 때문에 그쪽으로 넘어가 도울 방법이 없다며, 부상자를 데리고 돌아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피난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여러분! 저놈들은 계엄군이 아닙니다. 우리랑 똑같은 민간인이라고요. 원래 정령치 터널이 있던 곳인데, 저놈들이 거길 차지하고 벙커를 만든 겁니다. 원래 저놈들 것이 아니라고요.”
군대에서 입는 노란 깔깔이를 걸친 녀석이 계속 언성을 높인다.
“이렇게 지뢰를 묻어놓은 것도 저놈들이에요. 왜 그랬겠어요? 자기들만 살겠다는 거죠. 여기 있는 우리는 다 죽어도 좋다는 놈들입니다.
이렇게 보고만 있을 겁니까? 우리 권리를 찾아야죠. 저 안에 있는 식량이나 물은 우리랑 다 같이 사용해야 하는 겁니다. 저놈들이 다 독점할 순 없는 거라고요.”
“우······, 나쁜 놈들, 우우!”
주변에 있던 피난민들이 호응하며 생존팀에게 야유를 퍼붓는다.
“여러분, 여기 있는 지뢰만 제거하면 우리가 저 벙커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저기 가면 우리도 훨씬 안전하게, 음식도 충분히 먹을 수 있다고요.”
“옳소!”
“우리가 이 지뢰를 제거할 테니까, 여러분 도와주십쇼!”
그 무리는 모두 엎드린 뒤 가지고 있던 긴 대나무로 앞쪽을 두드리며 전진하고 있다.
이놈들이 계획적으로 지뢰를 제거하려다 다친 거구나! 잘못하면 이쪽이 뚫리겠는데.
“경고합니다. 여러분이 계속 지뢰를 제거하면, 우릴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대응 사격을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더 이상 경거망동하지 말고 돌아가세요.”
동주가 큰 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낮은 포복 자세로 지뢰를 찾고 있는 녀석들은 멈추지 않는다. 그 뒤에 선 선동가는 여전히 생존팀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콰앙!”
대나무를 내리치자 지뢰 하나가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낮은 포복으로 전진하던 무리는 깜짝 놀라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도 다친 사람이 없다. 저들이 이렇게 전진해 나가면, 결국 지뢰를 다 터뜨리고 길을 뚫게 된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
동주는 저격수인 장영수에게 대나무를 들고 전진하는 녀석들 앞으로 총을 쏘라고 지시했다.
‘탕, 타당, 탕’
장영수가 쏜 총알이 대나무를 맞추고 일행의 머리 바로 앞에서 튀었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총까지 쏘니, 이들이 덜컥 겁을 먹고 멈추었다.
“다시 한번 경고한다. 너희가 아직도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가 본데. 이건 엄연히 공격행위다. 우린 너희에게 어떤 공격도, 해코지도 한 적이 없다. 너흰 왜 우릴 공격하는 거지? 왜 우리 것을 빼앗으려 하냐고!”
“우우······,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 춰.”
피난민들이 야유와 욕을 뱉어낸다.
“너희가 멈추지 않으면 우린 자위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너흴 죽음으로 몰고 싶지 않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그땐 어쩔 수 없다.
우리가 기관총 사격을 하면, 너희는 물론 그 뒤에 있는 무고한 사람들까지 모두 죽는다. 마지막 경고다, 돌아가라.”
동주가 다시 한번 단호하게 경고했다.
“무슨 궤변이냐! 여긴 우리 모두의 땅이지, 너희 것이 아니야. 여기 지뢰만 없어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발 뻗고 잘 수 있는데. 너희가 차지하고 있는 땅이 왜 다 너희 것이냐고? 왜 우릴 막느냐고!”
동주는 저 선동가 녀석 입부터 막아야 할 것 같아, 영수에게 위협 사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영수가 깔깔이 녀석의 발밑을 겨냥해 총을 쏘았다.
“탕!”
선동가는 총소리와 함께 자신의 발 바로 앞에서 총알이 튀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고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굳고 말았다.
“탕!”
영수가 쏜 총알이 다시 선동가의 몸에 더 가깝게 날아왔다. 겁을 덜컥 먹은 선동가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무, 물러나겠다. 그만, 그만 해라!”
선동가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철책 너머로 쏜살같이 뛰어갔다. 대나무를 들고 있던 무리도 천천히 일어나더니 다시 철책 너머로 돌아간다.
“휴우!”
동주와 장영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이 계속 버텼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지뢰가 터지고, 생존팀이 위협 사격을 하는 통에 주변에 잠들어 있던 피난민들이 모두 깨어나 이 상황을 목격했다.
생존팀에 돌을 던지고, 욕을 퍼부으며 적개심을 보이는 이들이 늘었다. 야유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저 녀석의 선동이 어느 정도 먹힌 셈이다.
불안한 긴장의 연속이다. 군중의 분위기에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생존팀을 점점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눈빛이다. 싸늘하고 매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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