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아포칼립스(Apocalypse, 시즌 1 최종화)
아포칼립스 D-1, 2029. 4. 13. 정령치 생존 벙커 일대.
오후 3시, 생존 벙커 정문.
동주는 이대로 있다간 저 피난민들에게 포위돼 초소에 있던 우리 팀원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모두 컨테이너 성벽 뒤로 후퇴하라고 지시했다.
초병들이 주변에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모두 성벽 안으로 들어오자, 해자 위에 만들어둔 철로 만든 다리를 들어 올려 컨테이너 성벽에 고정했다. 터널 위 참호에는 동주와 스텔라, 최용석, 고재철, 장영수가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고리봉 쪽에서 연달아 폭발음이 들렸다. 지뢰 제거가 더디자, 지뢰밭에 수류탄을 던진 것이다. 수류탄이 폭발하면서 그 부근에 묻은 대인지뢰까지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이 우리 참호나 컨테이너 성벽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면 우리 일행도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수류탄 사정거리 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저격하거나, 아니면 이쯤에서 후퇴해야 한다.
아포피스가 떨어지기까지 이제 1시간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동주는 전원 후퇴해 벙커 안으로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벙커 위 참호에 있던 동주 일행은 줄을 타고 정문과 후문으로 내려간 뒤 신속히 벙커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생존 팀원이 벙커 안으로 들어오자, 그래핀으로 만든 철문을 닫았다. 밖은 곳곳에 설치해둔 CCTV 영상을 통해 확인했다.
오후 3시 30분.
고리봉과 만복대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지뢰를 모두 제거하고 어느새 정령치 터널 위까지 밀려왔다.
정문과 후문 쪽 도로를 타고 올라온 피난민들은 컨테이너 성벽 앞에 폭 5m, 깊이 2m가량의 넓은 해자가 있고, 그 아래 날카로운 창들이 꽂혀 있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생존 벙커로 다가가는 길은 터널 위에서 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방법뿐이다.
역시나 날렵한 녀석들이 줄을 타고 성벽과 정문 사이 광장으로 내려왔다. 그리곤 해자를 건너려고 만들어둔 철 다리를 건너편으로 내려, 일행이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게 했다.
피난민들이 우르르 성벽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래핀 소재로 만든 벙커문은 어떻게 해도 열 방법이 없었다.
무리들 중 소총을 든 녀석 하나가 개머리판으로 문을 세게 치며, 열지 않으면 이걸 폭파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생존팀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거기 몰려와 있던 일행을 모두 컨테이너 성벽 밖으로 내보낸 뒤, 정문과 후문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기 시작했다.
“콰광, 쾅, 쾅, 쿵, 쿠궁!”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연달아 난 뒤 검은 먼지구름이 벙커 위로 치솟는다.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피난민들은 이제 벙커문이 박살 났겠지 하는 기대로 다시 광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그래핀으로 만들어진 정문과 후문엔 여러 개의 얇게 패인 자국만 남았을 뿐 별다른 변화가 없다.
낙담한 피난민들은 다른 출입구가 없는지, 주변을 살피고 있다. 이들은 생존팀이 설치해둔 여러 대의 CCTV를 발견했다.
무리 중 한 녀석이 화가 났는지 총으로 CCTV 기기를 쏴 부숴버렸다. 그 앞에서 욕설을 퍼부으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한 엄마가 아이를 들어 그 얼굴을 CCTV에 비춘 후 제발 아이만이라도 넣어달라고 울며 호소한다. 갓난아이를 들춰 맨 젊은 여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빌며 애원했다.
보고 있던 생존팀 일행은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때 저 멀리에서 번쩍하는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섬광이 너무나 강렬해 그걸 바라본 사람은 한동안 시력을 잃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포피스가 드디어 대기권에 들어선 것이다. 지구의 대기와 부딪쳐 발생한 엄청난 열에너지가 빛으로 드러난 게 바로 이 첫 섬광이다.
그로부터 수초 후 남쪽 지평선 아래로 다시 번쩍하는 섬광이 일었다. 이제 아포피스가 지구와 충돌한 것이다.
이번은 첫 번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온 세상이 색을 잃어 그저 하얗게만 보인다. 피난민들은 주변이 너무 밝아 눈을 질끔 감고, 바닥에 엎드린 뒤 깊숙이 머리를 박고 있었다.
생존 벙커에 있던 동주는 모두 각자의 방으로 가, 준비한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대지진을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뜻하지 않게 피난민들 아이 스무 명가량을 받게 됐다. 각 방에서 어린아이 한 명씩을 돌봐야 할 상황이다.
각 방의 외벽은 대지진의 진동에 견디도록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플라스틱 폼 소재로 마감했다. 침대와 책상 등은 움직이지 않도록 컨테이너에 용접해 고정해 두었다.
벽면이나 1층 침대 안쪽에 여러 개의 안전벨트를 부착해, 대지진 때 튕겨 나가지 않도록 몸을 고정할 수 있게 했다.
모두들 벨트를 매고 앉았다. 동주는 동아, 신은혜 그리고 스텔라와 한 방을 사용한다. 어깨끈을 붙잡은 동아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동주는 옆으로 팔을 뻗어 동아의 손을 잡았다.
다들 겁에 질린 표정이다. 아까 맨 처음 생존팀을 향해 걸어온 여자아이를 동주 일행이 맡았다. 옆자리에 앉은 소녀는 엄마, 아빠 생각에 울먹인다. 동주는 소녀에게도 팔을 뻗어 서로 손을 꼭 잡았다.
그때, 순간 온몸이 하늘로 붕 뜨는 느낌이다. 생존 벙커 전체가 마치 놀이공원에 있는 바이킹에라도 탄 것처럼 공중에 떠올랐다가, 다시 순간 푹 떨어지고 말았다.
잠깐 숨을 내쉬는 찰나에 또다시 붕 하고 떠오른다.
‘와장창’ 무언가가 부서지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대지진을 대비해 모든 걸 잘 꽂아두고, 묶기도 하며, 잘 담아두었지만 모두 헛일이었다.
무언가가 떨어지고, 부서지며, 흔들리다 날아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주위는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컨테이너에 부착했던 침대, 책상, 에어컨, 난방기기 모두 떨어져 부서지거나, 흔들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생존 벙커 전체가 계속해서 위, 아래,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안전벨트에 매달려 있지 않았다면 어디론 가로 날아가, 벽이나 다른 곳에 부딪혀 크게 다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얼마나 흔들고 또 요동쳤던가? 지진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동주는 무전기를 들어 인명피해가 없는지 물었다.
다행히 각 방에 있는 안전벨트가 제 역할을 해주었다. 이수성이 날아온 비품에 맞아 팔을 다치고, 신은혜, 임안나가 멀미와 두통을 호소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의외로 아이들은 잘 견디고 있다.
밖에 있던 피난민들은 대지진 충격파 때문에 허공으로 높이 떴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몸을 가누지 못해 이리 넘어지고 저리 쓰러졌다. 땅이 갈라지고 산이 무너져 내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파랗던 하늘은 노랗게 변하더니, 금세 빨갛게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우수수 비처럼 내렸다.
자세히 보니 이건 물방울이 아닌 암석 파편이었다. 아포피스 충돌 때 그 충격으로 부서진 소행성과 지구 지표면의 조각인 셈이다. 이것이 충돌 충격으로 대기권 주위까지 튀어 올랐다가 이제 비처럼 지상으로 떨어진 것이다.
완두콩 만한 크기의 이 파편은 너무나 뜨거워 사람이 맞으면 그 충격으로 크게 다칠 뿐만 아니라 화상까지 입게 된다.
바위나 큰 나무 밑에 있지 않으면 이 파편에 맞아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여기저기에서 암석비로 인해 불길이 치솟고 있다.
지리산 일대는 지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온 산에 불길이 치솟아, 마치 화산이 터져 용암이 흐르는 듯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
진도 10이 넘는 대지진으로 도시의 건물은 대부분 넘어지거나 무너지고 말았다. 암석비로 곳곳에 화재가 발생해 그곳도 불바다가 되었다.
빨갛던 하늘은 이제 지표면에 있던 모든 게 불타면서 생긴 그을음으로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다.
그 순간 아포피스가 충돌할 때 발생했던 충돌 음파가 이곳까지 밀려왔다. 고막을 다 찢어놓을 듯하다. 이어서 엄청난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릴 기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생존 벙커에서 대지진을 견디느라 다들 지칠 대로 지친 기색이다.
남은 CCTV 중 작동되는 걸 살펴보니, 밖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지옥이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온 산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그 시체는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얼마 뒤면 다 재로 변할 것 같다. 땅도 하늘도 다 검게 그을려 모든 게 시커멓다.
어느새 생존 벙커의 온도가 35도를 넘고 있었다. 각 방에 있는 에어컨을 가동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는 전력 소비가 너무 커 위험하다.
동주는 생존팀 일행에게 회의실과 식당으로 모일 것을 지시했다. 2층에 있는 회의실과 식당은 리퍼 컨테이너를 개조한 곳이라 자체적으로 온도를 조절할 수 있다.
그곳 아래 1층과 위 3층 역시 리퍼 컨테이너로 식품 보관 창고이다. 우선은 비상시를 대비해 전력을 최대한 아끼고자, 당분간 이곳에 모여 생활하기로 했다.
지진이 계속 발생하고 있어 다들 벽면의 고리에 안전벨트를 연결하고, 쥐죽은 듯 몸을 움츠리고 있다.
식사는 비스킷과 두유로 간단히 해결했다. 공포에 떨다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진 민호에게는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투약해 잠들게 했다.
지진이 크게 일어날 때마다 불이 깜박깜박 꺼졌다가 다시 켜지는 걸 반복하고 있다. 수전해 시스템으로 충분한 전력을 확보했지만, 지진 충격으로 내부 설비에 이상이 생긴 듯하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다 불에 타거나 산사태에 휩쓸려 죽었을 것 같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이 숨 쉬고, 같은 물을 마시며 다를 게 없는 삶을 영위했었는데······. 한순간에 그들은 널브러진 시체가 되거나, 타고 남은 재가 되고 말았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거나, 안도할 수 없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도 문제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버린 것은 아닌지, 마치 선택받은 선민인 것처럼 행세하며, 이 상황을 권리처럼 누리려 한 것은 아닌지, 이렇게 살아남은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제 얼마 뒤면 남쪽 바다에서 밀려온 해일이 한반도를 휩쓸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나라에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심원기가 햄(HAM) 통신을 해보려 했으나, 이미 터널 밖에 세워둔 안테나가 부서져 아무런 전파도 잡지 못했다. 세상과 단절된 상태다.
지금은 온 천지가 불바다라 기온이 급속히 오르고 있지만, 조만간 햇빛을 가린 그을음 때문에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혹독한 겨울이 다가올 것이다.
어둡고 좁은 동굴 속에서 기나긴 겨울을 보내야 한다. 그 긴 겨울 동안 생존 벙커가 버텨주어야 그나마 이런 삶도 유지할 수 있다.
아포피스가 떨어진 지금 이 순간, 생존 벙커를 마련한 그간의 노력 덕에 목숨은 구했지만,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너무도 많다.
공룡이 소행성 충돌로 한순간에 멸종하고 만 것처럼, 인류도 오늘 이 순간 멸종 위기를 맞고 말았다. 우리가 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인류로 남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앞선다.
수십억 인류가 오늘 그 생명의 빛을 잃고 말았다. 그들을 대신하거나, 그들을 밀치고 얻어낸 삶이 아니다. 밀려오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거창한 명분도 내세울 원칙도 없다. 솔직히 살고 싶어서 시작한 일.
죽음의 화신 아포피스가 불러낸 저 멸망을 박살 내고, 내 끝내 살아남으리라. 우린 끝내 멸망을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 새로운 시대를 열리라.
- 작가의말
아쉽지만, 113화를 끝으로 1부를 마치고자 합니다.
지난 4개월여 동안 이 작품과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좀 더 재밌고 멋진 이야기가 담긴 2부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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