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방송 중 테이블에서 악귀가 기어 나와
고작 딱 하루, '내일' 일어날 일만 알 수 있는 초능력! 그 초능력이라도 갖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섬뜩한 사건이 계속 벌어진다면, 그것은 초능력이 아니라, 재앙이다.
양주가 서운한 내색을 전혀 안 했지만 점점 폐인이 되어갔다. 얼굴이 점점 푸석해지고, 흰머리가 갈수록 늘어났다. 재수 없는 일과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이 맞았다.
그는 횡단보도에 서있다가 술 취한 청년이 몰던 전동 킥보드에 치여 다리에 깁스까지 하게 됐다. 그동안 꾹, 꾹 참았던 분노와 설움이 한꺼번에 폭발하려는 순간, 청년이 오히려 화를 내며 양주를 자극했다.
"뭐야, 재수없게! 아재, 자해 공갈단이야?"
청년이 사과는커녕 계속 시비를 걸었다. 양주가 삼촌 뻘이나 되건만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툭, 툭 찌르면서 욕까지 했다. 결국 양주가 욱해서 청년의 멱살을 세게 움켜잡고 숨통을 조였다.
"뭐야, 씨발! 지금 나 쳤어? 너 오늘 뒈졌어!"
청년이 덤벼들자 양주는 유도 기술인 '업어치기'로 그를 땅바닥에 메다꽂아버렸다. 그 일로 경찰서까지 들락날락하는 신세가 됐다.
그 후, 양주는 목발을 짚고서도 매일 스튜디오로 나왔다. 행여 안 나오면 방국장이 온갖 구실을 갖다붙이면서 씹어대고, 이번 개편 때 자신을 짜르는 명분으로 삼을 게 분명했다.
방국장이 얼마나 야비한 인간인지를 알고, 또 직원들이 뒤에서는 그를 욕하면서도 앞에서는 맞장구 쳐줄 것을 아니까 더럽고, 치사해도 오밤중에 다리까지 절뚝이면서 심야 생방송에 나온 것이었다.
양주를 볼 때마다 경인은 마음이 심란했다.
“남작가님, 오늘은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왜요? 됐어요"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그럼, 톡으로 보내요"
양주가 껄렁하게 대꾸했다. 경인은 못 들은 척하고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금방 도착했다.
"타세요"
"됐다는데, 왜 이렇게 질척거려?"
양주가 시비걸듯 반말을 하더니 택시를 지나쳐가려고 했다. 그러자 경인이 다짜고짜 그에게 팔짱을 꼈다.
"화를 내든 욕을 하든 택시 안에서 하세요. 다 들어주고, 받아줄게요"
양주는 화를 내려고 인상을 구기면서도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서로 항상 눈을 치켜뜨고 말다툼을 벌이던 사이였는데, 느닷없이 스킨십을 하고 있으니 무척 낯설고 신기했다.
"빨리 타세요"
양주가 택시 뒷자리에 앉을 수 있게 경인이 부축을 해줬다. 경인의 머릿결과 얼굴에서 향긋한 냄새가 밀려오자 양주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무뚝뚝한 성격에 감정이 무뎠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다.
택시가 목적지에 거의 왔을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내 초라한 모습 보면서 즐기고 싶었나 보네"
택시에서 내린 후, 양주가 또 껄렁하게 말했다.
“다른 작가가 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시야에서 멀어지는 택시를 쳐다보며 경인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관심 없어요"
양주가 건성으로 대꾸하고 집으로 절뚝절뚝 걸어갔다.
“솔직히 많이 놀랐어요. 신청곡 때문에 저한테 따지고, 화내는 분이 정작 더 큰 문제에는 침묵하고,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여서요”
양주가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정말 뒤끝 작렬이네. 왜? 지금이라도 내가 사과할까요? 까짓 거 뭐, 사과하면 되지. 내가 무릎 꿇고 사과할게요"
양주가 목발을 팽개치고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몸의 중심을 잃어서 뒤로 벌렁 넘어졌다.
"내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땅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웃집 창문에 하나, 둘씩 불이 켜졌다.
“방국장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 보이지 말고, 맞서세요!”
"작가 따위가 무슨 힘이 있다고 국장한테 맞서? 어? 장난해?!"
양주가 비아냥거리며 소리쳤다. 경인의 얼굴로 빗방울이 하나, 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행자와 PD는 여러 번 바뀌었지만, 남작가님은 그대로 프로그램을 지켰잖아요. 16년 전에 <밤으로의 긴 여로>를 기획하고, 구성한 것도 남작가님이었고요"
"그 따위가 뭐 중요해?"
"우리 둘이 맞서면, 방국장도 작가를 교체하지 못할 거예요”
'우리 둘'이라는 말이 양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의 얼굴 위로 빗줄기가 쏟아졌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잔머리 굴리지 말고 까놓고 말해. 그럼, 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그래요, 까놓고 말할게요. 나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 난! 본사로 다시 돌아가야 돼요. 그러려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면 안 돼요. 지금처럼 계속 관심을 받아야 된다구요”
"내가 없어도 관심받을 텐데... 워낙 잘난 사람이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마음이 약해지고, 흐트러질 때마다 긴장감을 갖게 해준 사람이 있어요. 남작가님이에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밤하늘에서 번개가 치더니 고막이 찢어질 듯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도와주세요”
경인이 애원했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세차게 쏟아졌다. 두 사람의 턱과 손가락 끝으로 빗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그날 밤 생방송 전에 경인은 방국장과 담판을 지었다. 경인이 세게 나오자 방국장은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그렇잖아도 내가 걔한테 안 되겠다고 말했어. 3개월만 일하고 영국으로 유학 간다지 뭐야. 방송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미친 거 아냐?"
그날, 경인은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방송했다.
다음 날, 경인이 오토바이를 몰면서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뒤에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 헬멧을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군화를 신고 있었다.
잠시 후, 경인과 은선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전망대에 서있었다.
“내일 주말이라 나 생방송 안 하는데... 뭐할 거야, 내일?”
"오랜만에 아버지한테 가려고..."
“아빠한테?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경인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는데도 은선이 얼굴까지 빨개질 정도로 무척 당황했다.
"다음에... 다음에 같이 가"
“그냥 한 말이야”
경인이 은선의 볼을 살며시 꼬집었다. 그가 안심이 됐는지 해맑게 웃었다. 노을빛에 두 사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 * * * * * * * * *
사랑보다 행복의 유효 기간이 훨씬 더 짧다. 행복한 일상을 질투하듯 경인에게 소름 끼치는 일이 벌어졌다. 그날도 청취자와 전화 연결이 됐을 때, 어김없이 미스터리한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으스스했다.
사방에서 원한 맺힌 악귀들의 오싹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테이블 밑에서 악귀들이 하나, 둘씩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헉! 뭐야! 저리 가!"
순식간에 악귀들이 경인을 에워쌌다.
"야! 쟤 왜 저래?"
방국장이 부스 안을 쳐다보며 짜증을 냈다.
"쟤 오늘, 상태 안 좋아보이니까 다들 긴장해"
악귀들은 사라지지를 않고 경인을 계속 에워싼 상태로 매섭게 노려보았다. 섬뜩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청취자의 목소리가 무척 밝았다. 경인은 악귀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면서도 무서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연씨, 좋은 일이 있나 봐요?”
"네. 그저께 젤리를 잃어버렸거든요"
“젤리요? 먹는 젤리?”
"아뇨. 제가 키우는 강아지요. 젤리를 잃어버려서 한숨도 못 잤는데, 아까 어떤 고마운 아저씨한테 전화가 왔어요. 젤리가 혼자 방황하는 걸 보고 자기가 데려 갔으니까 찾으러 오라고요"
그 순간, 어디선가 비릿한 피 냄새가 밀려왔다. 이윽고 경인의 눈앞으로 피로 얼룩진 애완견의 사체가 보였다. 이어 얼굴에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가 20대 여자의 목을 조르는 모습도 생생하게 보였다.
"끅! 억!"
경인은 그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아서 숨이 막혔다. 너무 무서운 상황이라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이 말을 해줘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는데 악귀들이 소름끼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연씨, 단발머리에 파마했죠?"
"네? 그걸 어떻게?"
“가지 말아요!”
경인이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방국장이 긴장해서 안절부절못했다.
"네? 어디를요?"
“그 남자한테요”
"네? 왜요?"
“다연씨가 위험해져요”
그 말을 듣더니 청취자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감에 넘친 목소리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남자 친구랑 같이 갈 거예요. 남자 친구가 격투기 선수라 걱정 안 해도 돼요. 혹시 조기태 알아요?"
“못 가요! 갑자기 방송 출연 섭외가 들어와서 남자 친구가 못 간다고요! 그 사람이 '여기로 와라, 저기로 와라' 그러면서 약속 장소도 계속 바꿀 거예요. 애완견도 이미 죽었어요!"
경인이 도발적인 멘트를 해대자 부스 밖에 있는 방국장이 펄쩍펄쩍 날뛰었다.
"야! 마이크 내려! 빨리 마이크 내리고 노래 내보내!"
양주도 걱정이 되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요? 젤리가 죽었다고요?"
애완견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청취자가 돌변했다. 잠시 후, 청취자가 쓴웃음을 짓더니 차갑게 말했다.
"오경인씨, 그 말에 책임지게 만들어 줄게요!"
그 따위 말이 경인의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청취자는 자신이 잔인하게 살해될 때 사력을 다해 애원하고, 반항하게 될 것을 모른 채 지금 펄쩍펄쩍 날뛰면서 미리 힘을 낭비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연쇄 살인범은 어디엔가 꼭 있다. 그들의 자녀들은 어떤 삶을 살까?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서로 연인이 되는 경우가 없을까? 만약 연인이 될 경우, 그들의 사랑은 아름답고 행복할까? 혹시 그들 중에 아버지의 살인 본능을 물려받은 자녀는 없을까?
- 작가의말
절박한 경고에는 공포와 불행, 슬픔을 감지하는 초월적 기운이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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