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는 마지막으로 환생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시안달리아
작품등록일 :
2021.12.09 11:36
최근연재일 :
2024.03.27 21:40
연재수 :
454 회
조회수 :
51,084
추천수 :
1,681
글자수 :
2,688,677

작성
22.05.16 21:05
조회
114
추천
4
글자
21쪽

약속의 고리 (6)

DUMMY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사절단이 다시 프리온으로 돌아가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백위경은 왕궁에서 송별회를 열어 주겠다는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프리우스 지부 내 연회관에서 작은 송별회를 열었다.


프리우스의 기사들이 대부분이었고, 왕국기사단의 기사들과 사절단의 업무에 도움을 준 양식 있는 귀족들도 초대 받았다.


이번 송별회의 특별한 손님이라 함은 단연 레시스 공작과 공작부인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근신 중이긴 했으나 이번만큼은 특별히 외출을 허락 받았다.


그 두 사람이 연회관에 들어선 순간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클레멘은 아랑곳 않고 부모님을 이끌며 귀빈실에서 기다리는 백위경에게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근신은 곧 풀릴 거야."


마주 앉은 클레멘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모님과 헤어져 연회관으로 돌아온 클레멘은 지친 듯이 빈 테이블 하나를 잡고 앉았다.


나는 클레멘의 앞으로 따뜻한 차를 한 잔 가져다 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귀족들이 이전보다 더 아버지를 지지하겠지. 거의 유일한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레이몬드 왕자는 이번 일이 모두 마무리되면 프리온으로 유학 올 거라서."


"엑······."


놀란 나머지 마시던 차가 잘못 넘어가서 나는 몇 번 기침을 했다.


클레멘의 뒤에 서 있던 칼리아가 내게 조용히 손수건을 건네 주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한 후 품 속에서 내 손수건을 꺼냈다.

얼마 전부터 꼭 신경 써서 챙기고 있다.


"레이몬드 왕자가 프리온으로 유학이라고?"

"응······."


클레멘이 복잡한 표정으로 백위경이 있는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백위경은 창가 근처에서 레시스 공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두 사람 다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할아버지가 제안한 거야. 귀족들은 레이몬드 왕자를 국외추방시키고 싶어했는데, 국왕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을 수 없으니 반대하고 있었거든.

할아버지는 레이몬드 왕자가 추방되면 아버지, 레시스 공작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예 없어질 거라는 걱정이 드셨나봐."


"그래서 유학을? 대체 뭘 가르치시려고?"


"그건 청위경과 의논해 본다고 하셨어. 왕자는 데난이 아닌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프리온에서 지내는 게 분명 편하진 않을 거야."


프리온의 사람들에게도 편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으음, 하고 신음소리를 흘렸다.

레이몬드 왕자를 잘 알진 못하지만, 백위경과 아버지가 그를 다시 뜯어 고치기란 무척이나 힘들 것 같다.


"너희 아버지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네."

"음······."


클레멘이 곧장 동의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녀는 차를 한 모금 마실 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좀 다른 걸 깨달은 것 같아."

"다른 거?"


"레이몬드 왕자와 궁정마법사장을 따르던 귀족들이······ 불리한 순간이 오자 순식간에 편을 바꾼 것을 봐 버렸잖아. 심경이 복잡할 만하지."


나는 재판장에서 본 레시스 공작을 떠올렸다. 그건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던가.


"아버지는 좀 더 신중하게, 천천히 지지세력을 넓혀 가겠다고 했어. 그리고 혈통을 무기로 삼지 않겠다고.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레시온 왕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하셨어."


"아, 그건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네."


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사절단으로서 온 백위경도 마음 속 응어리가 조금은 풀린 것 같다.


"앞으로 갈 길이 멀긴 하지만, 맞아. 지금은 잘된 일이지.

아, 그리고 말야. 내가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반가워 하시면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시겠대."


클레멘은 그렇게 말하며 무척 기뻐했다.


그러다가 곧, 재미있는 일이 떠올랐다는 듯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질색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지 뭐야. 그런 일 재미 없다면서. 내가 옆에서 잔소리 할 때 짓는 표정이랑 완전히 똑같았어."


"너 외교관하면 아주 잘하겠는데."


나와 클레멘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녀가 뛰어난 외교관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백위경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리란 것도, 레시스 공작이 자신의 딸을 무시하지 못하리란 것도.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나요?"


우리가 있는 테이블 앞으로 부채로 얼굴의 반을 가린 귀부인이 불쑥 나타났다. 얼굴을 볼 필요도 없었다.


클레인의 어머니, 레시스 공작부인이 메이드 에트나를 뒤에 거느리고 서 있다.


공작부인은 벨다인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 입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든 채, 입가를 부채로 가리고 우리를 내려다 보는 자세 또한 그때와 똑같았지만,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아, 어머니······."

"안녕하세요, 부인."


나는 조금 긴장하며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공작부인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얼굴에 시선이 와 닿는 게 따가울 지경이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클레멘도 웃음기를 거두고 긴장한 얼굴로 나와 공작부인을 번갈아 본다.


"아직 조금 시기상조인 것 같긴 하지만······."


공작부인이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접었다.

부채 뒤로 드러난 얼굴은 생전 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엘드리안 정도의 가문이라면 교제 상대로는 부족함이 없겠죠."

"예······?"


이게 무슨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은 공작부인은 후후, 하고 웃으며 나를 이상할 정도로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엘드리안 군, 혹시 이미 정해둔 약혼자가 있나요? 아직이라면 제가 청위경께 정식으로 문의드리도록 하죠.

앞으로 우리 왕국과 프리우스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두 가문이 이어지는 게······."


"어머니!"


클레멘이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질렀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돌아볼 정도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클레멘은 정말로 곧 폭발할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있다.


"그만해요,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고요······!"

"아니라고? 너 집에서는 항상 이 애 이야기만 하면서······."


"그만!"


클레멘이 앳된 비명을 지르자 공작부인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가, 무례하게, 이런 말들을 내뱉는 공작부인을 클레멘이 무서운 기세로 낚아챘다.


"미, 미안, 리브. 나중에 이야기 하자. 방금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줘."


얼굴이 새빨개진 클레멘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아주 빠른 속도로 그렇게 말하고는, 공작부인을 끌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클레멘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지도 못했다.


나 역시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느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브의 깊은 후드가 절로 내려와 얼굴을 가려 주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가라앉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클레멘이 집에서 항상 내 이야기만······ 아니, 아니.

그야 내가 은월 기사대에 가겠다고 해서 그런 거지. 그만 생각하자.


나는 심호흡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용소의 자연 마력이 결계에 미치는 영향을 수치로 환산하는 방법이라든가.


그걸 수치로 환산하면 술식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니 상주 마법사들이 관리하기가 훨씬 수월해지겠지.

그러려면 용소의 마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관찰해서 분석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마력의 접촉법>에 나와 있는······.


"리브? 시끄럽던데 무슨 일이야?"

"······관찰 및 기록 술법을 약간 응용해서 용소 내에 설치해 놓으면."


나는 중얼거리면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들어올렸다.


슈렌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방금 뭐라고? 용소?"

"······아무것도 아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보다 훈련은 끝난 거야?"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슈렌에게 물었다.


"아, 끝났지."


슈렌은 연회장의 가장자리에 놓인 식탁 쪽을 가리켰다.


참석자들이 식사할 수 있도록 한편에 긴 식탁과 의자들을 놓았는데, 웨딘이 거기 앉아 저녁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인들이 음식을 가져다 주는 걸 거절하지 않고 전부 받아든다.


"무리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웨딘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은월기사대의 훈련에 참가하고 있었다.


봉인소를 관리하는 마법사들과 달리, 성법사들은 기사들의 후방에서 전투에 휘말리는 일이 자주 있다고 한다.

임무에 함께 움직이는 일도 많다고.


"그렇지만 스승인 그레인 성법사가 너를 한 사람의 성법사로 인정한 이상, 우리 은월 기사대에서는 그 의견에 존중하여 받아들인다."


웨딘, 슈렌과 함께 은월 기사대의 집무실에서 은위경을 만났을 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

웨딘의 자격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의미였다.


"성법사에게 요구되는 건 그것뿐이야. 나머지 자질은 가능한 오랫동안 생존하여 임무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그 말은 어쩐지 섬뜩했다.

웨딘 역시 그렇게 느낀 듯이, 눈에 띄게 어깨가 긴장하고 얼굴이 굳었다.


"말했잖아, 근성 하나는 합격점이라고. 너무 걱정할 것 없어."


나는 슈렌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웨딘의 각오도.


송별회는 평화롭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계속되었다. 복식도 분위기도 왕궁에서의 만찬회와 비할 바 없이 자유로웠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회관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했다.

사절단 대부분이 내가 여기 남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 따뜻하고 관심 어린 조언들을 많이 받았다.


"웨딘을 잘 부탁해, 리브."


그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한 번 꽉 끌어안아 주었다.


물의 아르바트인 그는 왕궁의 만찬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곳 지부에서 열리는 송별회는 마음 편하게 즐기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웨딘이 들으면 오히려 자기가 할 일이라고 화를 낼걸요."

"그렇겠지."


그레인은 쿡쿡 웃으면서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는 웨딘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케이크나 과자 같은 디저트를 하나씩 먹어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레인의 얼굴에는 스승으로서 제자를 걱정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저 녀석, 화를 잘 내지만 그만큼 스스로에게도 상처가 남아. 아프면서도 또 아픈 줄 모르고 화를 내지.

그러니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익혀야 해. 리브 네가 옆에 있으면서 붙잡아 주면 좋겠다."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그레인은 웨딘의 가족에게 은월 기사대에 대한 것을 직접 전해줄 생각이라고 말하고는, 그에게 돌아갔다.


"다른 기사대의 내부의 일에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 부분은 확실히 규정을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성인도 아니잖습니까."


둥근 식탁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아버지, 은위경, 그리고 백위경이 둘러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식탁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는 조금 커져 있고 은위경은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앉아 있다.


백위경은 그 사이에서 웃고 있으면서도 다소 난감해 했다.


"은위경이 맡은 임무가 특수하다는 건 이해하고 있지 않나, 청위경. 상당 부분 재량이, 그것도 빠른 결정이 필요한 일들이 대부분이지.

은위경, 자네도 할 수 있는 부분에선 청위경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면 어떤가?"


"그렇게 하겠다고 이미 대답했습니다."


은위경이 담담하게 대답한 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버지는 그 담담한 표정에 약간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단순한 양보가 아니라 규정에 추가해야······."

"아버지?"


어른들의 대화에 함부로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은월 기사대에 속하게 될 나와 웨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리브."


아버지는 조금 당황한 듯 나를 돌아보았고 백위경은 반가워하는 얼굴을 했다.


"아, 리브. 연회는 즐기고 있니?"

"네, 백위경.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중인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나는 식탁의 앞으로 다가가며 조용히 물었다. 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기사단의 근로 규정 대부분은 성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어. 미성년자가 일하기 좋은 곳은 아니지. 난 그냥 너희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제안을 한 것뿐이야."


"내가 보기엔 그저 청위경이 불안하고 걱정되어서 그러는 것 같다."


백위경이 빙긋 웃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하아, 하고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술이나 한 잔 기울이면 좋겠다만 내일 아침 출발이니······. 이거라도 더 마시게, 청위경. 자네가 준 이 찻잎, 향이 아주 좋더군."

"감사합니다······."


백위경이 따라준 맑은 향차가 아버지의 빈 찻잔에 채워졌다. 차를 마신 후 아버지는 한결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여기는 신경 쓰지 말고 연회를 즐기렴. 좀 있다가 윌튼 사무장이 왕궁에서 온 선물들을 나눠 줄 거다."

"네, 가 볼게요."


아버지는 괜찮다며, 가 보라는 듯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조금 안심하며 은위경과 백위경에게 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떠났다.


카론 레시스 국왕은 지부의 송별회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온갖 물건들이 가득 채워진 마차를 선물로 보내왔다.

좋은 무기와 갑옷들에 책, 보석 같은 귀중품, 유리잔 같은 물건들도 있었다.


기사들은 필요한 물건들을 골고루 나누어 가졌고, 나 역시 책 몇 권을 챙겼다.

기사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물건들이라 편안하게 챙길 수 있었다.


길고도 아쉬운 밤이 조용히 지나가고,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난 나는 지부의 앞마당에서 슈렌과 함께 아버지가 짐을 싣는 걸 도왔다.


가지고 가야 할 수많은 선물 때문에 아버지의 짐은 여기 도착할 때보다 두 배는 더 늘어나 있었다.

공용 짐수레의 가장 안쪽에 아버지의 짐이 가득 들어찼다.


짐 싣기가 끝난 후, 출발을 기다리는 마차 앞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 루웬과 클라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와 선물들을 맡겼다.


슈렌 역시 여러 통의 편지를 건넸고, 아버지는 편지들을 품 속에 잘 보관한 뒤에 우리 둘을 와락 끌어안았다.


깜짝 놀랐지만 아버지가 등을 꽉 끌어안고 있어 움직이지 못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온기가, 슬픔과 아쉬움이 전해져 온다.


"너희들이 잘 해내고 무사히 돌아오리라 믿는다."

"걱정 마세요."


슈렌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버지는 씩 웃으며 슈렌의 얼굴을 문질렀다.


"슈렌, 뭐든지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마라. 혼자 책임지려고도 하지 말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네, 알겠습니다."


슈렌은 아버지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 너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나를 내려다 보았다. 따뜻한 손이 이마를 덮은 내 머리카락을 조금 쓸어넘겼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네······."

"둘이 협력하고 의지하면 못 해낼 일이 없을 거다. 경험은 좋은 자산이지만 다른 사람의 경험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군. 밤새 해도 모자를 것 같은데."


아버지가 우리 둘을 바라보며 아쉬운 표정으로 겨우 말을 줄였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는 이미 충분한 조언을 해 주었고, 그걸 기억하고 실천하는 건 우리 몫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자주 연락해라. 편지를 기다리고 있으마. 네 어머니의 심경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나."


아버지는 애써 웃음 지었다.


"참, 그렇지. 애쉬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애쉬에게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정원의 한편에 느긋하게 누워 있던 애쉬가 아버지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아버지는 한쪽 무릎을 낮추고 앉아 애쉬와 시선을 맞췄다.


"항상 신경 써 주는 것엔 감사하고 있어. 앞으로도 리브를 잘 부탁한다, 애쉬."


애쉬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버지는 그의 은빛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놀랍게도 애쉬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짐을 모두 실은 후, 나는 지부의 마당에 모여 있는 사절단의 사람들 사이를 돌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백위경과 윌튼 사무장, 그리고 그레인, 사절단의 기사들과 사용인들까지.


여기까지 오는 내내 나를 태워 주었던 라니아도 프리온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은월 기사대의 임무 대부분은 말을 탈 필요가 없거나, 말을 타기엔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라니아에게까지 인사를 하고 난 뒤 돌아서자, 클레멘과 웨딘, 슈렌이 가까이에 있었다.


웨딘과 슈렌은 목걸이 같은 것을 쥐고 뭔가 이야기하고 있고 클레멘이 나를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리브, 손."

"손?"


얼결에 손을 내밀자 클레멘이 내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이건······."


나는 손바닥 안을 들여다 보았다.


여덟 장의 꽃잎을 가진 작은 꽃, 루클레미아를 형상화한 금속 장식과 그 바깥을 감싸고 있는 고리였다. 그리고 긴 가죽끈이 연결되어 있다.


"대단한 건 아니야. 그냥 멋진 선물을 받았으니 나도 뭔가 선물을 해 주고 싶어서. 모두에게 똑같은 걸 나눠줬어. 나도 가지고 있고."


클레멘이 자신의 목에 걸린 같은 장식의 목걸이를 살짝 들어보였다.


"팔찌를 하든 목걸이를 하든 주머니에 넣든 가지고만 있어줘. 그러면 기쁠 거야."


웨딘과 슈렌이 가지고 있던 게 이거구나.

이제 보니 이걸 목걸이로 찰까, 팔찌로 할까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알겠어. 고마워, 클레멘."


나는 클레멘이 준 목걸이를 소중하게 쥐고는 품 속에 넣었다.


"응,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얼굴이 발그레한 클레멘이 내 손을 꼭 쥐었다. 나는 조금 웃었다.


"아버지, 어머니와도 그런 약속을 했어. 한꺼번에 지키면 되겠다."


클레멘은 소리 내어 웃더니 짓궂게 말했다.


"그럼 난 도착하는 곳마다 기념품 하나씩 보내달라고 할까."

"아, 그건 좀 힘들겠는데······."

"농담이야, 보내주면 기쁘겠지만."

"노력해 볼게."


나는 클레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음에 만나는 건 언제가 될까. 분명 서로 많이 변해 있을 것이다.


클레멘이 붉어진 얼굴로 눈을 깜박이며 시선을 돌렸다.


"아, 그리고, 어제 그 일 말인데······."


그 일······.


무슨 일이었지,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어젯밤에 클레멘이 공작부인을 끌고 나간 뒤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이 다시 붉어지는 것 같다.


"어머니가 좀, 갑자기 너무 앞서 가서, 아니, 그게······."

"뭔가 오해하셨나봐. 그치?"


나는 당황해서 말을 잘 잇지 못하는 클레멘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나를 겨우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 응······.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었어."


클레멘이야말로, 어젯밤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몹시도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 상냥한 마음에는 항상 구원 받는 느낌이다.


나는 어제의 일 덕분에 봉인소의 결계에 대한 그럴듯한 대책이 떠올랐지만 굳이 이야기하진 않았다.


"아가씨, 곧 출발합니다."


칼리아가 클레멘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녀는 본래 레시스 공작가의 메이드이지만, 클레멘이 학교를 마칠 때까지 함께 프리온에 머무르게 되었다.

클레멘의 원래 메이드였던 미아는 조금 시원섭섭한 눈치였다.


"칼리아, 클레멘을 잘 부탁해요."


칼리아는 나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라면 프리온까지 돌아가는 길에도 클레멘을 잘 지켜줄 것이다.


"프리온에서 잘 지내, 클레멘. 가능한 자주 연락할게."

"응, 꼭 그래야 해!"


클레멘은 내게 손을 흔들고는 칼리아와 함께 마차로 향했다.


나는 웨딘, 슈렌과 함께 사절단의 행렬이 지부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백위경과 아버지가 눈 인사를 보내고, 클레멘이 마차의 창문을 열고 마지막까지 우리를 돌아보았다.


사절단의 행렬이 여전히 길었기 때문에 시내의 혼잡을 고려해 문 바깥까지 배웅하지 못하는 것은 내심 아쉬웠다.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사절단의 마지막 말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마법사는 마지막으로 환생한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휴재 안내 : 3월 30일 토요일, 4월 1일 월요일 24.03.27 1 0 -
공지 연재 안내 : 월, 수, 금, 토 22.06.10 263 0 -
454 바위와 늪의 길 (4) 24.03.27 8 0 14쪽
453 바위와 늪의 길 (3) 24.03.25 7 1 13쪽
452 바위와 늪의 길 (2) 24.03.23 8 1 15쪽
451 바위와 늪의 길 (1) 24.03.22 8 1 14쪽
450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6) 24.03.20 8 1 14쪽
449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5) 24.03.18 9 1 14쪽
448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4) 24.03.16 10 2 15쪽
447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3) 24.03.15 9 2 14쪽
446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2) 24.03.13 10 2 15쪽
445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1) 24.03.11 10 2 14쪽
444 폐도의 리베릭 (6) 24.03.09 11 2 14쪽
443 폐도의 리베릭 (5) 24.03.08 12 2 13쪽
442 폐도의 리베릭 (4) 24.03.06 11 2 13쪽
441 폐도의 리베릭 (3) 24.03.04 14 2 13쪽
440 폐도의 리베릭 (2) 24.03.02 12 2 14쪽
439 폐도의 리베릭 (1) +1 24.03.01 10 2 14쪽
438 재생 (9) 24.02.21 16 2 16쪽
437 재생 (8) 24.02.19 14 2 13쪽
436 재생 (7) 24.02.17 10 2 14쪽
435 재생 (6) 24.02.16 11 2 15쪽
434 재생 (5) 24.02.14 10 2 14쪽
433 재생 (4) 24.02.12 10 2 13쪽
432 재생 (3) 24.02.10 11 2 14쪽
431 재생 (2) 24.02.09 12 1 12쪽
430 재생 (1) +1 24.02.07 18 2 13쪽
429 파멸 (4) 24.02.05 15 2 16쪽
428 파멸 (3) 24.02.03 11 2 15쪽
427 파멸 (2) 24.02.02 11 2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