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는 마지막으로 환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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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9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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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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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과 요람 (3)

DUMMY

나는 일레니아를 바라보았다.


흰 얼굴에는 모래에 휩쓸린 잔상처들이 가득했고 하나로 높이 묶은 머리카락은 쓸어내릴 때마다 검은 모래가 떨어졌다.


옷 주머니와 가방 속에서도 모래를 털어내던 일레니아는 내 시선을 느끼고 나를 마주본다.


내가 땅 속에 묻히는 환영을 보았다던 은위경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역시 일종의 예시였던 걸까.


일레니아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투레하가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묻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구해줘서 감사아으으으."


내 감사의 마음은 일레니아의 갑작스러운 볼 잡아늘리기에 볼품 없이 찌그러졌다.


"뭐, 뭐하는 거예요!?"


나는 얼얼한 뺨을 붙잡고 억울함에 가득 차, 일레니아에게 항의했다.


"슈렌이 종종 하길래 어떤 느낌인가 했더니, 이런 거구나."

"그게 무슨 느낌인데요?!"


으으으, 아파라.


얼마나 아픈지 순간적으로 눈물이 새어나오면서 몸의 다른 통증들이 싹 날아가 버렸다.


일레니아가 핫핫 웃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거침 없이 다가온 손이 내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머리카락 사이에 있던 검은 모래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감사 같은 건 필요 없어. 동료잖아.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구."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어째서인지 억울한 마음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좋아, 여기가 어딘지 알아내 보자. 준비 됐어, 리베릭?"


일레니아는 산뜻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혀 안됐어요······."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조금 움직였는데 아직도 모래가 우수수 떨어진다. 대체 어디까지 들어간 거야, 이거.


"흔들어 줄까?"

"······괜찮아요."


일레니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한 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숨을 들이켰다.


마력이 풍부한 장소인 것은 금방 알아차렸다.


은은한 붉은 빛이 사방에 감돈다.

특별한 광원이 없어도 주변을 어렴풋이 볼 수 있는 건 그 덕분이었다.


"음.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모르겠는데."


일레니아가 막막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어느 방향을 돌아봐도 온통 어둡기만 하다.


나는 천천히 모든 방향을 살펴본 후, 마지막으로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가요."


그렇게 말하며 손 안에 약간의 마력을 끌어모으자, 작은 빛이 나타나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빛은 주변을 밝게 비추며 우리의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일레니아의 놀란 얼굴이 환하게 비쳐 보였다.


"이쪽? 왜? 뭔가 있어?"

"마력이 이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아마도 불의 샘이겠죠."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일레니아도 나를 쫓아왔다.


빛 덕분에 더 넓은 곳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모래가 뒤덮인 텅 빈 공간뿐.


"불의 샘이 이런 곳에 있다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요. 전 그냥 마력의 흐름을 느낄 뿐이라서."


한편으로는 불의 샘에 다가가도 될지 걱정스럽지만 달리 갈 곳도 없다.

최소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있겠지.


"······음."


일레니아가 신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 보니 검이 없었다. 텅 빈 검집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당황해서 바라보는 내 시선에 일레니아는 턱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까 모래에 휩쓸리는 바람에 놓쳐 버렸나봐. 슈렌이 절대 놓치지 말라고 했었는데."


아. 나는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나를 구했을 때, 나를 양팔로 끌어안았을 때 그 손엔 검이 없었다. 그래서 나를 붙잡을 수 있었다.


"뭐, 괜찮아요. 투레하도 있고, 저도 있으니까. 검을 쓸 일은 없을 거예요."


나는 불안해 하는 일레니아를 애써 안심시켰다. 일레니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여기 없는 거지?"

"아마도요. 애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은위경!"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고함소리에 몸을 들썩일 정도로 놀랐다.


은위경을 부르는 목소리는 작게 메아리치다가 곧 사그라들었지만, 일레니아는 멈추지 않았다.


"슈렌 이 바보 녀석!"


이건 아무래도 개인적인 감정이 듬뿍 들어간 거 같은데.


"웨딘······!"

"그, 그 정도면 됐어요!"


귀 안이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일레니아의 팔을 붙잡고 나서야 그녀는 일행의 이름을 부르는 걸 멈췄다.


"우린 여기가 어딘지 정확히 모르니까, 이렇게 부른들 대답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몰라요. 그게 진짜 우리 일행인지도 알 수 없고."


"흐음······."


"바깥 세상과 물리적인 법칙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공간인지도 아직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누군가를 불러도 목소리가 어디까지 도달하는지, 제대로 퍼져 나가는지 확신할 수 없고······."


눈을 깜박이며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일레니아를 마주 보면서, 말을 멈췄다.


"아냐, 이해했어. 이게 전부 꿈이나 환각 같은 걸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렇죠."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레니아는 이런 상황을 이전에 한 번 겪어본 적 있어 괜찮다면서, 다시 씩씩하게 나아갔다.


이전의 그곳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상 속이었지만, 뭐 아무렴 어때.


나는 약간 포기한 채로 일레니아와 함께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투레하!"

"우왓!"


일레니아의 손에서 불덩어리 하나가 예고 없이 발사되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갑자기 뭐하는 거예요!"

"저기서 뭔가가 부르고 있는 것 같았거든."

"저번에도 그래서 은위경께 혼나지 않았어요!?"

"아, 음. 미안······."


일레니아의 머쓱한 사과에 어쩐지 내 다리에 힘이 풀렸다.


화르륵.


"리베릭, 저걸 봐!"


고개를 돌리자, 아주 먼 곳에서 불꽃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설마, 정말로 뭐가 있어서 일레니아가 던진 투레하에 반응한 건가?


작게 일렁거리던 불꽃은 곧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순간, 일레니아가 내 팔을 확 잡아 끌었다.


"위험······!"


화악!


일레니아가 내 앞을 가로막자마자 불의 파도와 같은 것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일레니아가 불꽃을 둘러 막아낸 덕분에 나는 옷깃 하나 그을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지나간 불의 파도는 주변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작은 불씨들을 사방에 퍼트려 놓았다.


내가 만들어낸 빛의 구체는 파도 속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으나, 작은 불씨들이 빛의 역할을 대신했다.


작은 불씨들이 비추는 주변의 풍경은 방금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


일레니아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투레하를 흩어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어떤 집의 마당에 서 있었다.


검은 바위로 만들어진 기둥, 바닥, 그 위에 다시 바위를 얹은 오래된 집이었다.


지붕 아래에는 말린 음식들이 걸려 있고 문과 창문에는 불꽃을 형상화한 복잡한 장식들이 새겨져 있었다.


반쯤 열린 문 안으로 누군가 살고 있는 듯한 방 안의 모습도 엿보인다.


마당을 두른 담장은 크고 작은 돌을 엮어 만들었고, 마당 한켠에는 검은 바위들이 비석처럼 세워져 있다.


키르칸트의 불의 아르바트 거주구에서 보았던 집과 완전히 똑같았다.


"키르파······."


일레니아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굳어졌다.


거침없이 담장 밖을 나가자, 비슷한 양식의 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말도 안돼."


일레니아를 쫓아 담장 밖으로 나오던 나는, 담장의 작은 돌 하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가락 끝이 닿자마자 돌은 형태를 잃고 검은 모래로 부서져 버렸다.


역시.


씁쓸한 기분으로 손을 떼자 일그러졌던 돌이 다시 모래를 끌어모아 형태를 갖췄다.


이건 그저 기억에 불과하다. 키르파의 기억.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이! 거기 누구냐!"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나도 일레니아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일레니아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으려다가 검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골목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낯선 사내는 횃불을 들고 우리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의 불의 아르바트였다.


검은 가죽 갑옷에, 붉은 띠 장식이 들어간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검도 차고 있었다.

지금의 자경단과 비슷한 모습이다.


"누구야, 정체를 밝혀!"


사내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며 위협적으로 외쳤다. 사내의 다른 손은 검 손잡이 위에 올라가 있다.


"아, 저기, 우리들은······."


당황한 일레니아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어떻게든 설명하려 애썼으나, 나는 그녀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우리를 보는 게 아니예요."

"뭐?"


내 시선을 따라 일레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일렁이는 횃불의 범위 안으로 또 다른 사람이 한 걸음씩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흰색 바탕의 기사 제복에 붉은 자국이 묻어나 있다. 한손에 든 검에서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붉은 머리카락은 하나로 땋아 오른쪽 어깨 아래로 내려 보내고, 그 아래 제복 상의에 새겨진 프리우스의 문장은 피에 젖어 있다.


앳된 얼굴에 핏자국을 가득 묻힌 채, 그녀는 광기에 어린 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우리는 그 얼굴을 너무나 잘 알았다······.


"······엄마."


공포에 질려, 일레니아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뭐야, 메, 메리안? 너 메리안이냐?"


당황한 사내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횃불을 앞쪽으로 기울인 순간, 메리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안돼!"


일레니아의 비명소리만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케 했다.


내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도 없는 속도로, 메리안은 사내의 목을 베어 버렸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주인을 잃은 횃불이 공중에 높이 떠올랐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목이 잘린 사내는 쓰러질 듯 무릎을 꺾고 그대로 멈췄다. 숨이 끊어진 순간이었다.


그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더니, 이윽고 검은 형체로 변했다.


그건 내가 재의 사막에서 보았던 바로 그 형체였다.


"이, 이게 대체······?"


일레니아는 창백한 얼굴로, 골목길 사이로 사라지는 메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혼란과 공포만이 가득했다.


"어, 엄마가 왜?"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나는 고함을 지르면서 일레니아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일레니아는 끔찍한 충격에 창백하다 못해 새파래 보였다. 이대로 기절할 것만 같다.


"저건 칼라드라예요! 칼라드라는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어요. 메리안, 적위경의 모습을 취한 것에 불과해요.

적위경이 이럴 리 없어요, 절대로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


갈곳을 잃은 눈동자에 조금씩 내 얼굴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이성을 되찾도록 기다려 주었다.


메리안이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그건 일레니아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애쉬가 분명히 말했어요. 15년 전, 칼라드라가 여기 있었다고."


그러고 보면 그 이후 마셀라와 마주치고, 그들을 쫓아가느라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나는 애쉬와 은위경이 이야기했던 내용을 일레니아에게 전해 주었다.


"칼라드라."


말 없이 이야기를 듣던 일레니아의 눈 속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있는 건 모두 15년 전의 기억이에요. 우리는 개입할 수 없죠.

하지만 칼라드라가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보고, 사람들에게 전할 수는 있을 거예요."


나는 일레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레니아는 후우, 하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각오를 굳힌 표정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응. 가자, 리베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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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 바위와 늪의 길 (1) 24.03.22 8 1 14쪽
450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6) 24.03.20 8 1 14쪽
449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5) 24.03.18 9 1 14쪽
448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4) 24.03.16 10 2 15쪽
447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3) 24.03.15 9 2 14쪽
446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2) 24.03.13 10 2 15쪽
445 기사의 왕국, 수로의 왕도 (1) 24.03.11 10 2 14쪽
444 폐도의 리베릭 (6) 24.03.09 11 2 14쪽
443 폐도의 리베릭 (5) 24.03.08 12 2 13쪽
442 폐도의 리베릭 (4) 24.03.06 11 2 13쪽
441 폐도의 리베릭 (3) 24.03.04 14 2 13쪽
440 폐도의 리베릭 (2) 24.03.02 12 2 14쪽
439 폐도의 리베릭 (1) +1 24.03.01 10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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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 재생 (8) 24.02.19 14 2 13쪽
436 재생 (7) 24.02.17 10 2 14쪽
435 재생 (6) 24.02.16 11 2 15쪽
434 재생 (5) 24.02.14 10 2 14쪽
433 재생 (4) 24.02.12 10 2 13쪽
432 재생 (3) 24.02.10 11 2 14쪽
431 재생 (2) 24.02.09 12 1 12쪽
430 재생 (1) +1 24.02.07 18 2 13쪽
429 파멸 (4) 24.02.05 15 2 16쪽
428 파멸 (3) 24.02.03 11 2 15쪽
427 파멸 (2) 24.02.02 11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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