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사또 육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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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이오복
작품등록일 :
2021.12.09 20:42
최근연재일 :
2022.03.30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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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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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0화

DUMMY

멀어져 가는 박소헌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기분은 뭘까···.’


뭔가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면서도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호감이 있던 사람에게 애인이 있음을 알게 된 느낌이랄까, 고백하기도 전에 차인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으으으!”


고개를 휙휙 털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하기야 간질간질한 마음이 있었다고 한들 어쩌겠나,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나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


‘얼른 돌아나 가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에서 눈을 떼고 뒤돌아 한걸음 옮겼을 때였다.


퍽!


“···억!”


“아이고!”


누군가와 세게 부딪치며 뒤로 넘어졌다.


“아야야······.”


땅바닥에 부딪힌 엉덩이를 살살 쓸었다. 꼬리뼈의 안위를 확인하며 앞을 바라보자 나와 부딪친 상대도 대차게 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저기 괜찮으세요?”


커다란 보따리를 등에 멘 남자는 넘어지면서 손을 잘못 짚었는지 손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내 손목!”


“그 일단 저를 붙잡고 일어나 보실래요?”


상태를 살펴보고 의원에 데려다 줄 요량으로 남자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 세웠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오히려 갑작스러운 봉변을 당한 쪽은 나였지만, 나는 멀쩡했으니까 내가 챙길 수밖에.


“손목 말고 다른데 다치신 덴 없죠?”


남자가 붙잡고 있는 손목 말고 여기저기를 눈으로 꼼꼼히 훑었다.


“아이고, 아이고!”


그렇게 많이 아픈가?


잠깐 욱신거리고 아프긴 하겠지만 그게 저 정도인가. 남자의 반응이 하도 격해서 절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뼈라도 부러졌나?’


그러면 당연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프세···!”


“아이고, 내 정신 좀 보게! 내 짐!”


다시 한번 괜찮으냐 물어보려던 순간, 남자는 갑자기 팍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보따리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당황스러운 상황에 넋을 놓고 눈만 끔벅거렸다.


“아이고, 내 벼루! 내다 팔아야 할 물건들을 어쩌나!”


남자가 풀어헤친 보따리 속에는 금이 가고 깨진 벼루가 잔뜩 있었다. 아무래도 나와 부딪혀 넘어질 때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저런···.’


손목도 다치고, 장사해야 할 물건도 망가지고 남자의 처지가 몹시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 치료비 정돈 내가 내주자.’


뒤를 도는 순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도 과실이라면 과실이겠지.


“저기···.”


그런 생각을 말하기 위해 남자의 어깨를 짚으려 할 때였다. 보따리를 살피던 남자가 팩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응?’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쩍 벌려야 했다.


“나리, 이제 이걸 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어···?”


“나리가 앞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제게 부딪혀서 이리된 것 아닙니까!”


내가 부딪혀서 그렇게 됐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만 뻐끔거리고 제대로 된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예? 거기다 저는 손목까지 다쳤으니 이 피해를 도대체 어쩌실 겁니까, 예!”


“내가 부딪혔다니! 그쪽이 와서 부딪친 거잖아! 그래서 나까지 넘어진 거고.”


“아이고, 사람들 여기 좀 보시오! 여기 이 나리가 불쌍한 양민을 등쳐먹으려 하네!”


남자는 억울하다며 땅을 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허······.”


남자의 행동에 말문이 막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여기 돈 많은 나리가 불쌍한 양민을 등쳐먹는다!”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그것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뭐야, 뭔 일이야.”


“아니 글쎄, 저기 저 나리가 저 치를 등쳐먹으려 한다는데?”


“저 나리가 부딪혀 넘어지는 바람에 내다 팔아야 할 물건들이 못쓰게 됐다는구만.”


“그런데 그냥 도망가려 하는 거야?”


좀 전까지 텅 비었던 거리는 남자의 소란으로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나 아니라고!”


상황이 나에게 좋지 못하게 흘러갔다.


“저 남자가 나한테 와서 부딪친 거야! 나도 넘어졌다고, 오히려 내가 피해자라고!”


손사래를 치며 해명을 했지만, 사람들이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더 하다며 수군거렸다.


“아니야, 나 아니란 말이야······.”


모두가 나를 의심하는 이런 상황은 겪어본 적이 없어 당장에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거, 저 치가 나리에게 냅다 부딪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주변을 둘러싼 사람 중 하나가 나서며 물었다.


“그건! 아니, 없었어···.”


박소헌과 나 말고는 아무도 없던 거리였다. 그마저도 박소헌이 떠난 뒤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러니 남자와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을 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봤소!”


내 무고함을 증명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에 고개가 축 처지려는 찰나, 구원자가 등장했다.


“내가 아까 있었던 일을 보았소.”


아까 상황을 본 사람이 있다고?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살짝 의아하긴 했지만, 박소헌과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그사이 사람이 지나가는 걸 못 본 것일 수도 있겠다고 여기기로 했다.


어쨌든 저 사람은 내 무고함을 증명해줄 증인이었다.


“그쪽이 정말 보았소?”


“그렇소. 내 아주 똑똑히 보았지.”


그래, 어서 말해줘!


“저 나리가···.”


봉변을 당한 것은 내 쪽이라고!


“저 나리가 일부러 부딪치는 것을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뭐?”


목격자의 거짓 진술에 뒷목이 뻐근해지고 억울함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아니야! 아니라고! 나 아니란 말이야!”


억울하다고 여기저기 붙잡고 외쳐도 믿어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허어 참, 원래 높으신 분들이 더 한다니까.”


“쯧쯧, 우리 같은 것들 벗겨 먹겠다고 저게 다 무슨 추태람···.”


“에휴, 쯧쯧쯧···.”


상황을 봤다는 목격자까지 모든 일이 내 탓이라고 말한 덕분에 이곳에서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 없었으니까.


“거 나리, 배울 만큼 배우신 분이 그러시면 아니 되지요.”


“···.”


“어디 할 게 없어서 지들 같은 힘없는 양민을 잡으신답니까.”


“나 진짜 아닌데···.”


내 울먹거림은 사람들의 소음 속에 조용히 묻혔다.


“보아하니 지체도 높으신 분 같으신데, 질질 끌지 마시고 대장부답게 보상해주시지요.”


중재하던 남자의 말이 끝나자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서 옳소 하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진짜 내 탓 아니란 말이야···.’


눈썹은 여덟 팔자로 축 처지고 오리 주둥이처럼 입이 튀어나온 내 옆으로 넘어졌던 남자가 다가왔다.


“나리.”


그 남자는 한 손으로는 내 손을 붙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그러실 수도 있지요.”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저 입에 튀어나올 말이 내게 좋은 말이 아닐 것임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주둥이를 막아 버리고 싶다.


“나리 같은 분들께 어디 저희가 사람으로나 보이겠습니까? 뭔 일을 당해도 입 다물고 꾹 참아야지요.”


이 새끼 지금 나 멕이는 건가?


“어쩌겠습니까, 저같이 힘없고 아무것도 없는 이들이 참아야지요.”


“허······.”


그것 외에는 달리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제가 장사를 못하고,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새끼들 배 좀 곯으면 되는 것이지요.”


아저쒸! 아니, 아저쒸가 거기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돼!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사람들의 반응이 더 거세졌다.


“지체 높으신 양반이라 뻗대는 거야 뭐야.”


“우리 같은 놈들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으시다 이거지.”


톡, 톡


물기 어린 눈으로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내 어깨를 남자가 다시 한번 두드렸다.


“나리, 우리 좋게 넘어갑시다.”


그러고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내가 많은 건 안 바라요. 내 손목 치료비, 망가진 벼루 값, 일을 못 하는 동안의 생계비, 정신적 위로금? 뭐 이 정도.”


“지금 내가 그걸 다 배상하라는 거야?”


“내가 다 나리를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나리 앞길 막고 싶지 않아서.”


남자는 내 옷을 툭툭 털며 정리해주는 척을 했다.


“지금 나리한테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이야 다 아실 테고, 이런 상황에서 관아라도 가게 되면 어쩌겠습니까.”


“그게, 뭐 어쨌다고.”


“쯧, 이렇게 이해를 못 하셔서야.”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지체 높으신 나리께서 불쌍한 양민 하나 잡겠다고 자해 공갈을 하셨다, 오히려 본인이 피해를 보았다며 역정을 내신다.”


꿀꺽


침을 삼키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게 퍼지면 어찌 되겠습니까.”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나리야 양반 되시니 처벌은 안 받으실지 몰라도 이게 명예롭진 않으실 텐데요.”


명예


양반님들이 참 좋아하는 거다. 뒤로야 못된 짓 다 하고 다니더라도 망나니가 아닌 이상에야 앞에서는 고고한 척 행동한다.


이 아저씨 말만 따라 처벌은 안 받을 수 있어도, 불명예는 계속 따라다닐지 모른다.


‘그리고 난 사또지.’


나타난 증인조차도 내 편이 아닌 상태에서 관아로 간다, 그래서 내가 사또인 게 밝혀진다.


아마 명성이 왕창 깎일 것이다.


“···뭘 원하는데.”


“우리 나리 이제야 말이 통하시네. 걱정마십시요. 저는 많이 안 바랍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만 보이도록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다.


‘손가락 다섯 개?’


의미 모를 행동에 고개를 갸웃할 때 남자가 속삭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오십 냥.”


오, 오십 냥?!


“그거면 됩니다, 나리.”


“오십 냥이라니, 그건 너무···.”


“스읍, 함께 관아로 가시렵니까?”


이곳에 떨어진 뒤로 단 한 번도 그렇게 큰돈을 써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나갈 때마다 군것질 한 번씩 하고 똘복이랑 영이와 준이, 칠칠이 간식 좀 사주고, 책이나 종이 좀 사고.


아, 그래 책이랑 종이는 조금 가격이 나가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지금은 그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오십 냥까진 없어···.”


“에휴, 그럼 얼마 갖고 계십니까. 나리 연치도 어려 보이시고 특별히 그것만 받고 넘어가겠습니다.”


내키지 않는 몸짓으로 품 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를 낚아채 가며 소리쳤다.


“아이고, 이제 다 끝났습니다! 여기 나리가 사과하셨습니다!”


남자의 말에 사람들이 아까와는 다르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잉? 뭐랴?”


“나리께서 사과하셨다는데?”


“그래? 언제?”


“아이, 그래도 사과했다니 다행인감.”


사람들은 사과만 하면 다냐, 진작에 그럴 것이지, 보상을 해줘야지 말 뿐이냐며 수군거렸다.


“자, 다들 조용히 하시오! 그러다 나리께서 마음 상하시겠소.”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입이 한순간에 다물렸다. 남자의 처지에 공감하며 욕을 할 때는 언제고, 마음이 상한다 하니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입을 다문 것이리라.


“나는 사과를 받았으니 그걸로 만족하오. 그러니 다들 말들 보태지 말고 어서 갈 길 가시오!”


훠이훠이 하는 손짓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리, 다음부턴 조심하십시요?”




돈주머니를 위로 던졌다 받은 남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보따리를 챙겨 들고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허······.”


나는 남자가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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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122화 22.03.27 107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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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101화 22.03.06 117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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