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드디어 알파테스트
※ 번외편은 읽지 않고 넘기셔도 되는 내용입니다.
* * * * *
이번 1대 정령왕의 부활 사건이 일으킨 파장은 해당 행성 내부에서만 맴돌지 않았다. 정령들의 생활토대인 이면세계는 물론, 행성과 관계 있는 하급신들의 이목마저 집중시켰다.
"그게 말이야, 방구야? 정령왕이 왜 가사상태에 빠져?"
"맞아, 맞아! 아무리 여러 개로 조각났어도 그 놈의 본질은 정령왕이었어! 한 마디로 행성의 어엿한 대변자다~, 이 말이야!"
"뻥치려거든 좀 그럴 듯하게 쳐라."
급기야 해당 영역을 사이좋게 아우르고 있던 선계의 천신들 중 몇몇은 은밀하게 긴급회동까지 벌였다.
- 노동과 개척의 신, 오그나드(Ognard)
- 공정과 판결의 신, 우그딧(Ugdit)
- 야생과 축산의 신, 호라돈(Horadone)
- 치료와 정화의 신, 큐리타프(Quritaf)
- 연금과 요리의 신, 고메인(Gomerain)
- 지식과 교육의 여신, 숄라네이사(Shola-neisa)
- 격려와 위로의 여신, 밀레나(Milena)
이들 중 회의 주최자인 오그나드는, 본인이 여러 경로를 통해 아름아름 획득한 정보들을 다른 신들과 공유했다. 비록 하나같이 부정확한 정보들이었으나, 아쉬운대로 풀어놓은 것이라 하겠다.
"마, 마족? 마계에 있는 그 역겨운 그거?"
"와~, 심지어 예사 잡놈도 아니야? 대악마의 직계자로 추정?!"
"엥, 그럴 리가? 엔마노는 내가 직접 확인했었다고! 걔 존재력이 우리 영역에 잠시 나타났다가 곧바로 지워졌었다니깐? 뭐? 걔 아냐? 딴 놈이라고?”
루머라는 게 으레 그렇듯, 회의장 분위기는 곧이 곧대로 믿는 무리와 그렇지 않은 무리로 양분됐다.
"그게 정말 사실이면 완전 큰 일 아니냐?"
"에이, 내가 생각엔 그냥 뜬소문 같은데? 상급신들께서 가만 계시는 거 봐봐. 마족이었으면 당장 나서시지 않았을까?"
"아냐, 우그딧. 천계에서 직접 주관하기로 해서 손놓고 있는 걸 수도 있어."
"쯧쯧, 근거 없는 이야기잖아. 그런 거 막 믿으면 안 된다."
"야, 잘 생각해봐, 호라돈. 솔직히 마계 마족이 아니면 정령왕이 쪽도 못 쓰고 얻어터졌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어?"
"치, 마족은 무슨. 어떤 자애로운 상급신께서 사도를 한 명 파견하셨나 보지."
"흥, 퍽이나다! 그렇게 신경써주시는 분이 계셨으면 우리가 몰래 작당질을 했었겠냐?!"
"이쒸! 고메인! 너 또 대놓고 나 무시하지 또, 또! 나 완전 빈정 상했다?"
"내가 뭐 없는 말 했냐? '이프리티아(Ipritia)' 님이 본보기로 제재 받은 이래로는 상급신들조차 몸 사리고 있잖어!"
모처럼만의 회동이 비생산적인 시간낭비로 변질될 조짐이 나타나자, 우락부락한 체구의 오그나드가 즉시 중재에 나섰다.
"자자, 그만, 그만. 우리가 지금 모인 목적은 원인규명이 아니야. 난데 없이 출현한 끔찍한 변수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거지. 일단 그거에 집중 좀 하자."
"그래, 확실히 네 말대로 우리끼리 말다툼하고 있을 땐 아닌 거 같아."
"좋아, 특별히 봐줌."
그의 막연한 희망처럼 분위기가 말끔히 환기됐으니, 이 다음은 본격적인 의견나눔을 이끌어낼 순서였다.
"어이, 숄라."
"응? 나 왜?"
"네가 볼 적엔 정령왕을 제외한 나머지 카드들만으로 라호나바스를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아? 일단 자잘한 다른 문제들을 다 떠나서 말야."
주최자에게 이름 불린 아담한 체구의 여신은, 본인의 찰랑찰랑한 앞머리를 뒤로 쓰윽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글쎄? 안 그래도 여기 오기 전에 그놈 동태 좀 살펴봤는데, 현재 머물고 있는 행성의 힘도 벌써 거진 다 빨아먹었더라. 덕분에 행성은 완전 빈사상태고."
"한 마디로 장담 못하겠단 뜻이지?"
"응. 다소 불완전할 지언정 1대 정령왕도 반드시 합류시켜야 해. 난 그게 최선이라고 봐. 가능하면 가사상태의 조각까지 싹싹 긁어 모아서 합쳐주면 더 좋겠지만."
"끄응... 이렇게 된 이상 정령왕을 박살낸 놈의 정체를 반드시 확인해봐야겠군."
"나도 동감이야. 만일 정말로 마족이라면, 라호나바스랑 서로 대판 싸우게끔 유도하는 편이 좋을 거 같거든."
“나도 찬성~!”
“근데 우리 중 누가 신탁을 내리지? 현세 개입 가능한 사람?”
“””......”””
그들은 곧 무능한 본인들의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여기 모인 참석자 중에 근신처분 받지 않은 천신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야, 너도?"
"응, 나도..."
"하아.... 왜 죄다 이 모양이냐?"
처벌 수위가 하나같이 높아서 현세로 개입할 수단이 영 마땅치 않았다.
"쩝, 미안. 난 이제 8백 년 동안은 어떤 간섭도 못하게 된 처지라..."
"하핫, 넌 나보다 양반이다야. 난 옛날옛적에 편법쓴 거까지 싹 털려서 자칫 추방형 떨어질 뻔 했었다니까?”
”히잉~, 난 앞으로 5천 년 동안은 쥐죽은 듯이 있으라고 태양신께서 직접 엄포까지 놓으셨어."
"크흐흐흐, 5천 년? 햐~, 그래도 나보다 바닥이 있었구나? 난 권능 사용금지 2천 년, 현세 개입하다가 걸리면 마계로 추방이래."
가만듣고 있던 오그나드가 문득 주위를 훑어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니, 니들은 대체 무슨 짓거릴 그동안 해왔던 거냐? 혹시... 이번에 내가 특별감사 받은 것도 설마... 야! 내가 니놈들과 어울렸기 때문에 덤으로 걸린 거였냐?"
"...우에헤헤헤, 그나저나 우리가 이렇게 생고생하는 걸 필멸자들이 알랑가 몰라~. 그치, 그치?"
"맞아, 맞아."
"갑자기 말 돌리지 마, 이것들아!"
"헤헷~!"
"......"
주최자 오그나드도 말문이 막혀 어쩌지 못하는, 너른 푸념에 넋두리만 겹겹이 쌓여가는 상황. 이런 답답함을 못 이긴 숄라네이사가 기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에잇, 이대론 밑도 끝도 없겠어! 우리 당장 '마야키니(Mayakini)'를 끌고 오자!"
"음? 갑자기 마야키니는 왜?"
"걔랑 '아드퍼드로스(Adfordros)'는 꼼수 쓴 거 용케도 안 걸렸잖아?!"
"헛?! 진짜?!"
"어머? 다들 몰랐어? 아무튼 걔네들은 신탁 정돈 지금도 무난히 내릴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데려와서 심하게 압박과 강요... 아니, 부탁하자! 이왕 하는 김에 파마도 확 꼬셔서 자세한 내막도 좀 알아보고!"
그녀가 알려준 사실에 다른 천신들의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근신 처분 등으로 인해 자신들의 소식통이 얼마나 비루해질 수 있는가를 새삼 체감한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곧 엄한 요점에 쏠려졌다.
'진짜로 안 걸렸다고?!'
'뭐야? 우리만?! 재수없게 우리만?!'
'아니! 마야키니는 그렇다손 치겠는데, 아드퍼드로스 그 놈은 어째서? 어떻게? 왜 안 걸렸어?'
'부조리해! 이건 특별감찰관들의 농간이야!'
오그나드가 나서서 다른 모두의 등을 떠밀었다. 숄라네이사의 의견이 훌륭한 돌파구임을 그 역시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좋아, 나도 숄라를 따라 마야키니한테 가겠어. 너흰 아드퍼드로스를 책임지고 끌고와...가 아니라 정중히 데려와줘."
"맡겨두라고, 오그나드!"
"그래, 이렇게 떼로 몰려가면 까짓 꺼 걔네들 상대 못할 것도 없지!"
번뜩이는 그들의 눈빛만 봐도, 차후에 벌어질 강압적인 실력행사와 대화장면이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우리만 X될 순 없어!'
참으로 눈물겨운 우정이 아닐 수 없었다.
* * * * *
죽음을 맞이한 필멸자들의 사후세계는 어떻게 정해질까?
보통은 그들 생전의 믿음과 그 행실에 기반하여 갈린다. 한 마디로 해당 신의 권역 밑에서 심판을 받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들은? 아니면 평생에 걸쳐 박쥐처럼 온갖 잡신을 떠받든 사람들의 경우엔 어떠할까?
그들은 저승사자들에게 인도되어 염라국을 거친 뒤에 운명이 판가름나는데, 만약 그들의 삶 가운데 어떤 신을 모독한 사건이 있다거나 하면 관할권이 즉시 변경되어 끌려가게 된다.
관할권 변경은 악마(또는 마족)와 엮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조사를 할당받은 천사가 영혼의 기억을 읽고서 유죄를 선고하게 되면, 그 필멸자의 영혼은 해당 악마(또는 마족)가 속한 곳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 판결을 막을 방편은 오직 한 가지. 영혼에 새겨진 기억 중에 악마와 얽힌 모든 걸 깨끗이 도려내는 것뿐이었다. 빠른 이해를 돕자면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는 외과수술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런 수술의 난이도가 으레 최고조를 자랑하듯, 섬세한 영혼을 건드리는 수고 또한 그보다 몇십 배 더 어려웠으면 어려웠지 결코 널널하진 않았다.
더욱이 이 작업에 능수능란한 존재를 섭외하는 일부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힘을 지닌 격조 높은 존재의 머릿속에겐 이미 ‘악마=지옥’ 또는 ‘마족=마계’란 대입방정식이 자리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반강제적으로 루카스와 관련된 영혼들에게 그 귀찮은 노고를 행사할 예정인 중품천사 아리사엘이, 극심한 노이로제를 절규와 함께 표출하는 모습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터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
선계의 천신들이 애꿎은 친구들에게 갖은 압박을 가하고 있던 그 시각.
중품천사 아리사엘은 대천사 가브리엘의 개별영역이자, 최근엔 그녀의 개인업무공간으로써 활용되고 있는 공간 내에서 까칠한 비명을 터트리는 중이었다.
“아~ 쪼옴!!!”
- 투타타타타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던 그녀의 손가락이 다시 한 번 움직이며 허공에 뎅그러니 놓여진 자판들을 연타했다.
- 떼대대대대댕! 땡! 때-앵-!
"아! 왜에?! 어으씨! 진짜!!!"
그러나 몇 번이고 반복해봤자 되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신경다발을 온통 곤두세우는 강력한 경고음과 오류 알림창들 뿐이었다.
- 띵-!
<< 경고 : 입력된 글자수가 보유권한의 최대치를 초과했습니다. 권한조정은 상위 관리자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 때댕-!
<< 오류 : 전송불가! 허용되지 않은 대상입니다. 권한이 부족합니다. ::: ChannelBusinessException: ErrNJS000197, Object Target is not found in ...... >>
- 땡!
- 때대대댕!!
- 띠딩! 땡-!!!!
수많은 오류 메세지는 중품천사조차도 급발진하게 만들었다.
"으아아아아아! 관리자 권한이라며! 특별히 신경써서 관리자 권한을 부여해줬다며어어!!!"
고래고래 성질부리는 아리사엘에게선 이전의 고고함을 도무지 엿볼 수 없었다. 마치 천사가 어떤 몰골로 타락을 시작하는가에 대한 구체적 예시와도 같았다.
"제일 낮은 이따위! 관리자등급이면! 아예 안 준 것만! 못하잖아!!! 도대체 이전과 뭐가 달라! 뭐가 다르냐고오!!! 으아아아아!!! 가브리엘니이이이이임아아아아아!!!"
- 펑! 퍼펑! 쿠아아앙!
"끼잉, 낑!"
그만 화를 참지 못하고 실험지역 일부를 날려버리던 그녀는, 파괴의 여파가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강아지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보며 뜨악했다.
"앗! 미안, 브레드! 일부러 네게 해코지하려던 건 아냐!"
가브리엘의 배려로 아리사엘의 임무를 보좌하게 된 브레드가 꼬리를 말고 구석에 숨었다.
"끼잉..."
"정말 미안! 내가 잘못했어! 무서워 하지마!"
"왕, 왕-!"
"진짜로 안 할께!"
"헥헥헥헥..."
덕분에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최악을 상정하며 거친 흥분을 삯혔다.
"후우우욱... 후우우우우... 꾹 참아야 해. 이깟 일로 불순종의 죄를 짓고 처벌 받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흥! 내가 이대로 타락할까 보냐?! 내가 이대로 지옥에 떨어져 대적자 루치펠의 역한 얼굴을 매일같이 마주볼까 보냐고오오!!! 후욱, 후우우~. 후욱...."
그리곤 당금의 문제와 그 한계를 극복할 방안을 이성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단 시스템을 통해서 경멸스러운 그 마족 놈에게 메세지 발송하는 건 절대불가로 확인됐어. 그렇다고 내가 직접 접촉하는 꼴을 다른 동료들에게 들켰다간 일이 매우 심각해지니까 무조건 기각. 음... 동료들의 이목을 피하려면 무조건, 무조건 차세대 시스템을 이용해야만 한다는 건데..."
아리사엘은 레이첼의 추격을 따돌린 뒤에 어떤 섬에서 홀로 떠도는 루카스를 한껏 주시하며, 어떻게든 우회방안을 떠올리기 위해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끙... 그래도 이력삭제 권한정도는 있었으니까... 시스템상으로, 시스템상으로 안전하게... 무조건 안전제일로... 시험운용 중임을 핑계 삼는다면, 아주 큰 잘못이 아닌 이상 사용이력 지우다가 걸려도 중징계를 받진 않을 것이고..."
좀처럼 창조적인 방편이 떠오르지 않던 그녀의 시선은, 75인치 크기의 영상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제 업무에 열심인 브레드에게로 물끄러미 옮겨갔다.
참고로 바리온(루카스의 인간시절)의 반려견이었던 브레드에게 부여된 주요 임무는, 시도때도 없이 창조주께로 향하는 루카스의 기도를 다른 천사들이 인지하기 전에 재빨리 낚아채는 일이었다.
"에잇! 마음 같아선 브레드를 확 파견시켜서 신탁을 전달ㅎ... 어?! 엇, 파견?"
웅얼웅얼 투덜대며 메신저 투입을 가정하던 그녀의 머릿속이 순간 번쩍했다.
"아, 그래! 그거야, 대리자! 대리자 선정! 엄밀히 따지면 나도 알파테스터잖아! 나라고 대천사님들처럼 시험삼아 '판관'을 선정해선 안 된단 규정은 없었어! 까짓꺼 저지르고 보자!"
이런 적절한 꼼수가 대단히 흡족스런 그녀는, 루카스를 끊임없이 모니터링하는 브레드 곁에 나란히 앉으며 습관처럼 그의 풍성한 머리털을 쓰다듬었다.
"아, 맞다! 그런데 판관은 최대 몇 명까지 지정할 수 있었지? 품계마다 제약사항이 따로 있었긴 했는데... 흐음... 나름 관리자로 분류됐고 하니, 일반사용자보다는 범위가 관대할 거 같기도 하고..."
문득 의문이 떠오른 그녀가 노려본 시선의 끝자락엔, 여느 법률서 못지 않게 심히 두꺼운 책자 십수 권이 뎅그러니 쌓여 있었다.
"쯧, 나도 대천사님들과 같이 슈퍼 관리자 권한만 있었어도! 저 무식한 두께의 안내책자는 안 읽어도 됐을건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은 중품천사의 입술 위로 묵직한 아쉬움이 맴돌았다.
- 작가의말
본편은 5분 후로 예약해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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