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체된 정체성 (4)
* * * * *
바스코르디아는 상급신의 꾸중을 각오하고서 모든 영체를 화신체 속으로 밀어넣었다.
'까짓 꺼 내가 욕 좀 먹고 만다!'
다시 깨어난 바스코르디아가 깜짝 놀라 왕왕 울리는 귓가를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영체를 화신체에 완벽하게 깃들이면, 마리오네트(Marionnette, 줄인형)를 다루듯 원격으로 조종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거라고 예상은 했었으나,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였다.
'아니, 뭐가 이리 시끄러워?!'
이 소음의 원인은 파죽지세로 방어를 뚫어내려 하는 적장들과, 반대로 이것을 악물고 버티려는 교왕의 고함 때문이었다.
- 진격하라! 타미아르의 용사들이여! 진격하라!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막아라! 어떻게든 저지해! 시간을 벌란 말이다!”
- 나 칼리드 구르파샨의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저 가마에 가장 먼저 닿는 전사는! 천부장의 지위와 더불어 금덩이로 가득 채운 짐마차 5대를 하사하겠노라!
”성전 기사들이여! 여신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견뎌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너희의 신앙을 행동으로 증명할 때다!”
연합군측의 목표는 바스코르디아 화신체의 확보. 때문에 원거리 공격만으로 압살시킬 수 있는 극명한 전력차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는 중이라 하겠다.
- 으득.
바스코르디아는 어느덧 그녀의 전방 100m 부근까지 침입한 연합군을 보며 분노의 붉은 안광을 번뜩였다.
“...이이이!!! 이 하루살이에 불과한 필멸자들 주제에!!!”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른 그녀는 적들을 향해 양팔을 뻗었다.
- 그그그그그그그......
“뭐, 뭐야...?”
“...지, 지진?”
땅의 진동은 병사들이 피 터지는 싸움을 바로 중지했을 만큼 강하고 위협적이었다.
“더러운 바퀴벌레들 같으니! 너희 모두 흙으로 돌아갈지어다!”
그녀가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끔 뒤짚어서 쫙 펼치자, 마치 거대한 아귀가 그 흉악한 주둥이를 쩍 벌리듯, 광활한 대지가 일제히 치솟았다.
- 드드드드드... 쩌저저저저적-! 촤아아아아-!
삽시간에 그 안에 쏘옥 갇혀버린 수십만 명의 병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실금해버렸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후방병력들 또한 비현실적인 천재지변에 아연실색했다.
“마법사! 마법사들아! 니들이 뭐라도 해봐!”
“젠장할! 아까부터 노력하고 있었다고! 근데 우리가 뭘 해도 안 먹히는 거야!”
"그럼 더 열심히 해보라고!"
"......"
본디 무공과 마법의 발달과 필멸자들의 교만은 정비례 관계였다.
일정 경지에 오른 전투사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다시피 하고, 마법사들은 각종 원소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다 보니, 그들이 세월 속에 점차 강해질수록 신에 대한 경외감이 덩달아 얄팍해지는 것이었다.
심지어 각 지역이나 나라에서 손꼽히는 세도가들은 유독 더 심했다. 숭어가 뛰니까 망둥이도 뛴다고, 자신들이 지닌 막대한 부와 권력으로 대단한 마법사와 전투사를 쉽게쉽게 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들이 신에 가까운 존재인 것처럼 착각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다 대개는 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힘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인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한없이 겸손해지곤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 대부분은 죽을 자리를 앞둔 때였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말이다.
"아, 안 돼! 난 아직 죽고 싶지 않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나는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토록 욕심을 부렸던가..."
한편 바스코르디아는 필멸자들의 절망과 좌절을 바라보며 통쾌해했다.
“오호호호! 하찮은 필멸자들아, 두려워 떨어라! 스스로 재촉한 멸망을 겸허이 받아들여... 아?!”
신벌을 신나게 내리던 바스코르디아가 살짝 당황했다. 분명 그녀의 뜻을 받들어 도로 푹 꺼져야 할 돔 형태의 땅덩어리가 끙끙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뭐, 뭐지?"
곧바로 원인분석을 통하여 모종의 방해꾼을 찾아낸 그녀가 일갈했다.
“정령왕! 네 이 노옴!!!”
{......}
“똥오줌 못 가리는 갓난 꼬맹이 주제에! 감히 나와 맞서겠다는 것이냐?!!!”
{......}
2대 정령왕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용서하십쇼, 여신님.’ 내지는 ‘죄송합니다. 이들은 이 행성을 지킬 귀중한 전력입니다.’라며 대꾸할 법도 하건만, 그는 그저 그녀의 실력행사를 저지하는 데에만 집중할 따름이었다.
“흥! 이놈이고, 저놈이고! 지 주제파악 못하는 게 요즘 유행이야, 뭐야? 참나, 얼탱이가 없네!”
단단히 뿔난 그녀가 양동이로 퍼붓듯 신력을 방출하기 시작하자, 그녀에게 맞서던 정령왕은 이제 무언가 말하고 싶어도 여력이 없는 상태가 됐다. 오죽하면 이면세계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소왕들마저 그를 보좌하기 위해 부리나케 뛰쳐나왔을 정도였다.
- 콰과과과과...
{...크흡!}
“호호호! 그런다고 날 막을 수 있을 거 같느냐?! 꼬마야, 네 분수를 알아라!”
한껏 비웃어준 바스코르디아는 이전보다 많은 신력을 흩뿌렸다. 이로 인해 조악한 화신체에 엄청난 부하가 걸리며 신체 곳곳이 찢어지듯 균열이 생겨났지만, 그녀는 그것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내게 맞서면 어찌되는지 본보기로 삼아주겠어! 이런 허접한 화신체 따윈 과감하게 바숴 버리고 또 생성하면 그만이야!’
그러던 그때. 그녀의 뒷머리를 짜릿하게 자극해오는 기운을 감지했다.
“흥! 어림 없닷!”
- 캉~!
빠른 대응으로 기습을 보란듯이 막아낸 그녀였지만, 공격자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너, 넌... 아드퍼...드로스?”
“허허헛! 그 분의 계약자 주소걸이, 대지의 여신께 인사 드리옵니다!”
- 으득!
“아드퍼드로스! 너 마저!!!”
필멸자들의 군세가 해변가 모래알 같이 널려있다 한들 그녀에겐 별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정령왕을 앞세운 행성의 의지와, 징계 받아 마땅한 수준으로 창조된 아드퍼드로스의 화신체의 동맹은 분명 껄끄러운 조합이었다.
물론 그녀가 화신체란 껍데기를 잠시 벗어 던지면 한 방 정리도 가능했으나, 그랬다간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오그나드와 떨거지 천신들이 그녀가 하위차원의 균형을 어그러뜨린 중죄를 저질렀다며 상급신에게 꼰지를 것이 분명했다.
‘내 성질 박박 긁었던 일조차 계획의 일부였어! 오그나드, 이 자식!’
잘 설계된 함정에 된통 걸린 바스코르디아가 드디어 화를 주체 못하고 폭발했다.
“으으으... 이 잡것들아! 끼야아아아아아!!!”
그녀의 발작증세가 일정수준을 넘어가자, 아드퍼드로스가 그녀와의 거리를 살짝 벌린 주소걸의 의식을 슬쩍 밀어내고서 대화를 시도했다.
“이쯤에서 그만하자, 바스코르디아. 인정해, 네가 졌어.”
“웃기지마! 난 아직 안 끝났어!”
“너도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잖아. 아무리 중급신이라도 급조한 화신체 따위로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는 걸. 봐봐, 벌써 그 화신체에 붕괴조짐이 곳곳에 일어났잖아. 거기서 더 무리하면 네 영체가 밖으로 삐져나와 노출될 거라고! 너 진짜로 우리한테 약점 잡히고 싶어?”
“...이익!”
그녀가 처음부터 제대로 된 화신체를 사용한다면 패배는 어림도 없었을 터. 허나 그것을 위해선 현 행성 기준으로 최소 3년 이상 공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맹점이었다. 그리고 그 여유기간이라면 저들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루고도 남았다.
“우리 잘난 중급신께선 넓은 아량으로 양보 좀 해줘라. 응?”
“아주 웃기셔! 감히 누구더러 이래라저래라 강요질이야!”
앉은 자리가 높아진 그녀는 일개 하급신들에게 굽힐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이 한때 허물없이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이라도 말이다.
”흥! 너희야말로 이딴 화신체이기에 내가 미련 없이 폭사시킬 수 있다곤 생각 안 해봤니? 응급상황에 자폭 때리고서 철수하는 건 규율위반 아니다?”
궁지에 몰린 그녀에게도 꼬장이라는 비장의 수단이 존재했다.
”호호호호! 어디 니들이 감당할 수 있겠어? 나야 여기 모인 필멸자들을 싹 죽이는 걸로 만족해버리면 그만이거든?!”
“바스코르디아 너어는 진짜...”
쉽게 풀이하자면 천신들이 어렵사리 마련한 주 병력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것으로써 화풀이 삼겠단 의미였다.
“...야, 꼭 그렇게까지 지저분하게 해야겠냐?”
“ㅈ랄! 방귀 뀐 놈이 성깔부리고 앉았네! 잘 생각해! 방해하고 있는 건 너희야! 빌어먹게 타락한 내 신도들에게 내가 천벌을 내리려는데, 그걸 엄하게 딴지 거는 군상들이 바로 너네들이라고!”
“하아... 좀 봐줘라.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면 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어요. 내가 꼭 최악의 카드까지 동원해야겠냐?”
“흥! ㅈ랄뿡이다!”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색을 표하는 아드퍼드로스를 깔깔 비웃어줬다.
“뭐? 최악의 카드? 참나~, 니랑 나랑 아직도 같은 급인 줄 아는 거야? 완전 미쳤지? 정신 나갔지? 니들은 내 신격이 한 단계 상승한 일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힘들어? 호호호, 재밌네, 재밌어! 나랑 관계된 일만 아니었으면 하급신이 뭔 짓거릴 꾸몄는지 구경하고 싶었을 정도야!”
“......”
“뭐가 됐든 간에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갖다 대기만 해봐! 곧장 화신체를 자폭시킬 거야! 나 지금 농담 아냐, 이 대륙 자체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거라고! 알아 들어?!”
“후우우.......”
”호호호, 이야~, 그렇게 되면 침략 당할 땅덩어리도 확 줄어들어서 너희도 편해지겠다, 그치?“
“...분명히 장담컨대 그렇게 일 벌이는 순간, 너 진짜 크게 후회한다.”
그녀는 아드퍼드로스의 경고에도 기고만장했다.
“푸핫! 내가 왜?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정녕 이프리티아 님까지 휘말리게 할 작정이라면, 지금 니 뜻대로 해보시던가?”
“?!”
“저어기~ 보여? 저 끄트머리에 보이지? 내가 정말로 어렵게 모셔왔다. 말 꺼내기가 무섭게 의미 그대로 영멸 당할 뻔 했다고.”
“?”
그녀는 어깨를 으쓱한 아드퍼드로스의 시선이 머문 장소를 즉시 영안으로 훑었다.
“...아아!”
그곳에서 로비샤를 발견한 바스코르디아가 잠시 넋을 잃었다. 오랫동안 존경하고 따르던, 하지만 필멸자에 대한 시각차를 좁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부정행위를 윗줄에 고발해버려야 했던 상급 여신을 정확히 알아본 것이다.
비록 최고신들에게 신격을 대부분 차압 당해 존재력이 미약하고, 빛나던 외모까지 아주 못나게 변한 필멸자의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맑디 맑은 영혼만큼은 이프리티아의 그것이 틀림 없었다.
“...이 땅에서 고통 받고 계셨군요, 이프리티아 님.”
지금도 최고신들이 이프리티타에게 무거운 형벌을 선고하던, 그 경악스러운 순간이 선명한 그녀였다. 으레 가벼운 질타 수준의 훈방조치를 예상했었던 바스코르디아로서는 전혀 예상 못했던 결말이 아닐 수 없었었다.
그렇기에 이프리티아를 확인한 찰나, 오래토록 달고 살았던 그 마음의 돌덩어리가 수면 밖으로 왈칵 떠올랐다.
“흐흑, 죄송해요."
그녀는 방금 전까지 다른 천신들과 드잡이질을 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은 채, 그 형언할 수 없는 깊이의 감성에 푹 젖어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까지 심한 처벌을 받게 되실 줄은...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은, 전 진짜 상상도 못 했었단 말이에요... 아아, 이프리티아 님...”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의 이러한 빈틈은 어디까지나 아드퍼드로스의 착실한 설계였기 때문이었다.
“이때닷, 루카스!”
“흑흑... 뭐, 뭐가 이때라ㄴ...? 힉!”
순간의 방심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그녀가 무언가 께름칙한 기운을 인지했을 땐, 이미 거대한 그림자가 뒤편에서 덮쳐오는 중이었다.
- 쐐애애애애액-!
“이, 이, 비, 비겁ㅎ...”
- 퍼억-!
그렇게 바스코르디아가 의식을 잃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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