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체된 정체성 (5)
* * * * *
“끅... 이거... 뭐야...?”
바스코르디아는 가위에 눌린 사람이 잠에서 깼을 때처럼 대단히 불쾌한 가운데 의식을 회복했다.
“콜록, 콜록! 오웩! 뭐 이딴 그지 같은 공간이... 우웁!”
그녀는 헛구역질을 몇 번 반복하고 나서야 이 영역이 어떤 곳인지 추론할 정신적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녀에게 말을 걸어온 존재 덕분에 애써 더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깼나?”
”그, 그대는 누구... 으앜-! 마, 마귀 새끼닷-!”
“......”
바스코르디아는 손가락질 당한 루카스가 ‘후우~’하고 숨을 크게 한 번 내쉬며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에도 연신 허우적거리며 생난리를 피웠다.
“어서 도망... 어? 뭐, 뭐야?! 이거!”
그녀의 영체가 화신체 속에 봉인되다시피 갇힌 일도 그렇지만, 힘의 발현과 운용 자체에 제약이 걸려버린 기현상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신력이 왜 쥐꼬리만큼만 움직여?!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진정해라.”
그녀의 머릿속으로 서너 개의 가능성이 떠올랐으나, 자신의 눈앞에 고위마족이 있는 이상 가장 유력한 가설은 하나였다.
”여기는... 설마... 마계?”
“......”
”심지어 내 화신체에 뭔 ㅈ랄을 한 거야?! 이 육신을 벗어 던질 수가 없잖아! 아니, 이 자식들이 선 씨게 넘네! 내가 아무리 고까워도 그렇지, 어떻게 마귀 새끼한테 날 팔아먹을 수가 있는 건데!!!”
다른 방향으로 골 아파진 루카스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그녀를 제니티아 영역 안으로 납치해온 목적은, 어디까지나 조용한 가운데 평화적인 협상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흥분 가라앉혀라. 일단 네가 틀렸다. 여긴 마계가 아니다.”
“지, 진짜?”
”그렇다. 한때 마계에 속했던 곳이라 그 영향이 어느 정도 남아있을 뿐. 실제 마계에 비하면 여긴 낙원인 편이다.”
“......뻥치시네!”
그녀는 호락호락한 성격이 아니었다.
“와~, 필멸자의 탈을 뒤집어 쓰고 있어서 깜박 속을 뻔 했네! 난 안 속는다, 이 마귀 새끼야!”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이 영역의 주인이며 출입권한 또한 내게 있다. 내가 원한다면 좀 전에 머물던 곳과 연결되는 틈을 생성할 수도 있지. 그것도 즉시 말이다.”
루카스는 ‘마족이 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역은 마계가 아니다.’란 논리를 펼쳤고, 바스코르디아 또한 그것에 동의했다.
“그, 그래? 조, 좋아! 그럼 어디 증명해봐! 그게 사실이면 네 말을 믿겠어!”
“알았다. 그럼 바로 보여주 ...음?”
“......왜? 뭐, 뭘 봐?”
시간오차 방지를 위해 바늘구멍보다 작게 줄여놨던 차원의 틈을 크게 키우려던 루카스는, 바로 옆에서 신력을 최대로 모으고 있던 바스코르디아의 속셈을 알아채고서 멈칫했다.
“과연... 나름 좋은 임기응변이었다. 이거 내가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뻔 했군.”
“악! 이거 놔! 더러운 손 당장 치워! 으윽! 야잇! 크흣! 하읏!”
그는 그녀를 단단히 제압한 후에 다시금 증명절차를 밟았다.
- 위이잉~.
갑자기 성문만큼 커진 차원의 틈 너머로 뿌옇게 변한 세상과 주소걸이 보였다. 협상결과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대기중이던 그는 문득 루카스가 보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엇? 벌써 끝나셨소이까? 허허허, 과연 루카스 경의 수완은 알아줘야겠소이다!”
“아니다. 잠깐 증명을 조금 한 거다. 진짜 거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루카스는 무척 덤덤한 반면, 그의 품 안에서 죽어라 버둥거리는 바스코르디아는 전혀 아니었다.
“아드퍼드로스! 이 개잡놈의 시끼야-! 니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너 딱 기다려! 마귀랑 결탁한 일까지 전부 꼰질러서 싸그리 다 마계로 추방시켜 버릴 테얏-!”
희번뜩인 그녀의 눈빛과 세찬 고성에 흠칫 놀란 주소걸은, 자신도 모르게 몇 발짝 뒷걸음질 쳤다.
“허허허, 우리 천신들께서 잘 좀 부탁한다 하시는구려. 그러면 이쪽은 이쪽대로 가림막을 계속 유지해야겠소이다.”
“알았다.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지.”
“안 된다, 이것들아! 나 살려어-! 안 돼에-! 닫지마-!”
탈출이 좌절된 바스코르디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나쁜... 빌어먹을... 연놈들... 흐흐흑...”
“이제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았겠지?”
마지못한 그녀는 사태부터 정확하게 파악하기로 했다.
”...알았으니까 꿍꿍이인지 다 털어놔봐. 날 그지 같은 이곳에 감금시킨 속셈이 대체 뭐야?”
이에 루카스는 협상에 앞서 입만 열면 욕설 반, 울음 반인 그녀의 태도부터 바로 잡기로 했다.
“음, 우선 말부터 조심해줬으면 좋겠군. 날 마귀새끼라 부르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이 영역을 모욕하는 건 조금 견디기 어렵다.”
“흥, 뭐래? 여긴 마계의 일부분이었었다며? 변소를 암만 깨끗하게 쓸고 닦아봤자, 그게 변소지 뭔...”
“네 말대로라면 이까짓 변소 때문에 내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꼴이라서 그렇다.”
“으, 응?”
“이곳은 내 어머니가 날 위해... 본인의 목숨과 맞바꿔 만들어내신 독립영역이다. 그것으로 설명은 충분하리라 본다.”
“....어... 음... 그으... 미안...”
혼란이 가중된 바스코르디아는 합죽이가 되어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몹시 두려워졌다.
‘이 마귀의 정체가 대체 뭐야? 오늘 처음 보는 듣보잡 마족인데...’
최고신들이 작정하고 온갖 제약을 걸어가며 조성한 마계 영역에서 일정부분을 떼어내는 일은 그녀의 상식 선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수준이 비록 저택 규모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더군다나 마족이 자식을 위해 영멸을 선택했단 사례는 그녀가 신으로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많은 가정들이 교차하기도 했다.
‘분명 말포장만 그런 거고, 실상은 저 마귀의 아비 되는 자가 어미의 죽음을 강제시킨 거겠지. 고위마족을 희생양으로 삼으면 가능성이 아주 없진 않 ...헉?! 가만! 그런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마족을 제멋대로 조리할 수 있는 건 오직...’
그녀는 본인이 내린 결론이 정답인지를 확인코자, 계속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루카스에게 물었다.
“혹시... 너, 너 님은... 대악마의 직계자...이세요?”
“아아, 정신 사나워서 통성명을 깜박했군. 나는 루카스, 루치펠 님의 직계자다.”
“뜨억!”
그녀가 가정할 수 있는 거물 중의 거물이자, 대악마들의 머리 꼭대기에 군림하는 존재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그녀의 심정은 한 단어로 축약됐다.
‘망했다!’
그녀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처지였으면 하급신들이 단체로 불경한 작당모의를 했네 어쨌네 하며 진상조사를 세차게 부르짖었을 터이나, 루카스의 힘을 코앞에서 가늠하는 지금은 그럴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무, 무슨 놈의 존재력이 최고신을 능가해? 으으... 내가 본체로 이 놈에게 들이박아도 끕살 당하고 말 거야!’
그녀는 루카스가 자신을 산 채로 붙잡아 두고도 여유만만인 이유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젠장, 젠장! 화신체를 벗어 던지고 이 놈이랑 맞짱 뜰 방법을 찾는다고 능사가 아니야! 이 자식은 다른 차원에 현현한 내 존재를 다른 신들이 알아채기도 전에 날 공중분해 시켜버릴 만큼 강력하다고!’
맛간의 기다림에 지친 루카스는 그녀의 복잡 다양한 잡념을 끊어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겠다, 바스코르디아. 나와 거래하자.”
“누, 누가 너, 너 따위랑 거, 거래를 해! 나, 나를! 뭐, 뭘로 보고! 흐, 흥! 이래봬도 나! 나 선계의 일원이야! 여신이라고, 여신!”
“현실을 직시해라, 바스코르디아. 선택과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대가 내 제안을 수용하고 자유를 얻던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영원무궁토록 이곳에 갇혀 살던가.”
“무,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하지도 마!”
“너의 영체는 화신체에 묶인 상태다. 그렇기에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시, 싫어! 안 돼에-!”
그녀에게 있어 루카스의 협박은, 천하를 호령하던 제왕이 단칸방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것 이상의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신격을 높이려고 내가 하위차원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해왔는데! 그래서 이제서야 간신히 중급신으로 승격했는데! 그런데 뭐? 그런 나더러 이따위 좁다란 쓰레기통에서 영원히 허우적대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지언정 그럴 순 없었다. 그동안 어렵사리 한땀 한땀 공들여 쌓아 올린 노력이 억울해서라도 그것만은 수용불가였다.
이후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의 마음은 ‘아주 무리한 조건만 아니라면 협상에 응하자.’는 쪽으로 기우는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네가 날 첩자로 부려먹으려거나 하는 건... 아니지?”
“물론이다. 그런 짓은 관리하기도 귀찮아서 지양하는 편이다. 그리고 나는 이 거래가 그대의 명성에도 썩 나쁘지 않다고 본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보장부터 제대로 해줘! 대악마 루치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네게 다른 꿍꿍이가 없다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치?”
“굳이 원한다면 해줄 수 있다. 그 대신 너도 너의 존재력을 걸고 맹세해야 할 거다.”
“으으... 마족은 원체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겁대가리 없이 자기가 모시는 대악마의 이름을 욕되게 하진 않으니까......”
그녀에게 잠시간의 선택장애가 왔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녀 마음에 쏙 드는 선택지가 깔쌈하게 짠~하고 생겨날 리는 없었다.
“...알았어. 내가 뭘 해주길 원해? 내가 이 행성에서 손떼는 거 말고도 더 있는 거지? 너에 대한 비밀유지는 기본옵션일 테고 말이야.”
“머리 회전이 빠르군. 과연 네 말 그대로다.”
”괜히 뜸 들이지 말고 싹 꺼내놔봐. 이왕 할 거 후딱 처리하게.”
“훗, 화끈해서 마음에 드는군. 공연히 힘 빼지 않아서 좋다.”
“징그럽게 처웃지말고 퍼뜩 말해줘! 나 여기 너무 싫어! 아니, 도대체 니네 마족들은 이런 데서 어떻게 사는 거야? 내가 영적생명체라서 이 정도지, 최하위차원의 필멸자였으면 여기에 발 딛는 순간 정신부터 미쳐 돌았다?”
그녀의 추론에 루카스가 고개를 모로 꼬았다.
“음, 아니던데? 무생물이 아닌 생명체는 발작만 조금 일으키다가 금새 죽어버렸다. 덕분에 잔존한 영혼들을 소각하느라 살짝 귀찮았...”
“...이미 해봤구나?”
“큼큼, 아무튼 개인적으로 필요한 실험이었다.”
제니티아의 영역을 나디아의 임시 피난처로 사용가능한지 알아보려 했었다란 속사정은 불필요한 사족이었으므로, 루카스는 이 내용을 적당히 생략했다.
“내 제안은 간단하다, 바스코르디아.”
“말해. 듣고 있어.”
“나는 네가 진짜 여신이 돼줬으면 한다.”
“응? ...뭔 ㄱ소리야? 나 지금도 엄연히 진짜 여신이거덩?!”
잠시후 보충설명을 시작한 루카스의 손엔, 1대 정령왕이 갈무리 되어 있는 봉인석 3개가 들려져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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