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차오착三差五錯
견고하던 성문이 열리고 강산이 짓밟히누나.
철혈 남아여, 더운 피 뿌려서 오욕을 씻자꾸나.
철혈방은 송나라 때 원나라 기병에 맞서 양양을 지키던 수비군의 후손들이 모여 만든 방파다. 처음에는 사람만 많고 무공은 별로였지만, 이들의 의기에 감동한 고수들이 하나둘 몸담으면서 점점 강세를 이뤘다.
근래 무당이 갑자기 궐기하며 더는 호북의 패주로 불리지 않지만, 그 위세는 여전히 대단하다.
방도가 수천 명인 철혈방은 크게 삼당오단으로 나뉘는데, 삼당이 위에 있고 오단이 아래에 있다. 삼당은 또 각각 네 개의 대를 두고 대주는 오단의 단주와 비슷한 지위다.
철혈방의 삼당 중 하나인 철추당의 네 대주면 웬만한 지방 문파는 하루 사이에 지울 수 있는 전력이다.
그런 이들이 양양에서 거의 이천 리 떨어진 태원부에 나타났고, 일지봉 아래서 수상한 행색으로 기웃거렸다.
"저놈 맞는 거 같은데?"
사람과 그림을 대조하던 천 대주가 말했다.
"검이 없는 거 빼면 똑같아."
성격이 급한 무 대주가 소년을 덮쳤다. 낙화문이 처음 듣는 문파여도 대제자면 한가락 하겠다 싶었는데, 상대는 별다른 저항도 없이 그대로 잡혔다.
무 대주는 발버둥 치는 소년의 입을 천으로 틀어막아 비명 지르는 걸 방지했다. 그러곤 바로 옆구리에 끼고 미리 봐둔 인적 드문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너, 구후영 맞지?"
성격이 급한 무 대주가 주변을 다 살피기도 전에 천을 뽑고 소년을 신문했다.
"아닌데요."
소년은 난데없는 봉변에 정신이 혼미했다. 그래서 상대가 묻는 말에 생각도 않고 성실히 대답했다.
"너 구후영 맞잖아. 다 알고 왔으니까 얌전히 불어."
"저 자룡인데요. 구후영은 누구예요?"
자룡의 이름은 구후일歐侯溢인데, 구후영은 철없는 동생에게 진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원래는 이름을 찾은 기쁨에 본인이 구후영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동생한테도 이름을 바로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보름 근신하는 동안에 마음이 바뀌었다. 철부지로 알았던 사부의 진면목을 발견했고, 문파의 사정이 꽤 복잡하다는 것도 느꼈다. 강호가 멀리 있는 게 아님을 깨달은 구후영은 신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신들을 버린 게 아닌지 의심도 들어서,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내고 자초지종을 밝히거나 동생이 철이 들어 어른스러워지면 그때서야 알려주기로 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자룡은 구후영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사내새끼 맞아?"
천 대주가 기막히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해 발언을 자제하는 후 대주도 같은 마음이었다.
무공이 약한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사내놈이 기개가 없는 건 절대 못 봐주는 게 철혈방의 성정이다.
"맞는데요. 바지 벗어 보여드릴까요?"
그제야 네 대주는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덩치는 어른이지만, 말투나 표정은 절대 어른이 아니었다.
"너 누구냐?"
"자룡이라니깐요. 아저씨들 바보예요? 아까부터 말했는데."
"아저씨?"
네 대주 모두 덩치가 크고 수염이 많아서 나이 들어 보인다. 그렇기에 호칭에 유달리 민감했다.
"우리 다 서른 안 됐어."
무 대주가 항변했다.
"난 열두 살인데."
그제야 넷 모두 자신들이 사람을 잘못 잡았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너 혹시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
천 대주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오문이 준 그림을 자룡에게 보여줬다.
"어, 형. 우리 형 이름 유저인데요. 구후영 아니에요."
자룡은 자신을 납치한 것처럼 형도 납치해서 어떻게 할까 봐 걱정되어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그런데 극력히 부인하는 모습이 네 대주에겐 오히려 긍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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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엽전 줄 테니까 이 종이를 저기 산 중턱에 있는 곳에 가서 유저라는 사람한테 전해. 알았지?"
네 대주는 자룡을 묶어두고 낙화문에 가서 구후영을 잡아 오려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용호표국의 표행을 돕는 여러 문파 사람들이 낙화문에 모였다.
피고용인의 입장에서 고용주인 용호표국에 폐를 끼치기 무엇해서 같은 처지인 낙화문에 신세를 진 것이다.
이 문파들 역시 낙화문과 같은 마음이어서 잘생긴 소년 한 명씩 꼭 끼고 왔고, 담 표국주의 외동 손녀의 마음을 뺏는 데 실패하더라도 자신들의 실력을 여감 없이 보여 두 표국이 맺어진 후에도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고수들이 총출동했다.
비록 철혈방의 네 대주 눈에 차는 고수는 없지만, 괜한 분란을 만들기 싫어 마을의 아이한테 엽전을 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놈을 죽이는 건 죽이는 건데. 자룡이란 아이는 어떻게 할까? 우리 얼굴도 봤는데."
엽전을 받은 아이가 종이를 들고 신나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무 대주가 말했다.
"아는 것도 없는데 그냥 살려두면 안 될까?"
천 대주가 말했다.
"죽여야 해. 뭔가 들은 말이 있을지도 몰라."
추 대주가 말했다. 넷 중 말수가 가장 적고 마음도 제일 독한 사람이다.
"일단 동생으로 위협해서 아는 걸 다 털어놓게 만든 다음, 어디까지 아는지 확인하고 그때 결정하자."
후 대주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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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를 도와 여러 문파에서 온 사람들을 접대하던 구후영은 산자락 마을의 아는 아이한테서 서신을 전해 받았다.
청빈은 글을 잘 모르고, 원경은 글을 아나 서신을 보낼 위인이 아니다. 구후영은 왕제상이 보낸 서신이라고 생각돼서 몰래 숨어 내용을 확인했다.
의형제를 맺은 건 물릴 생각이 없으나 최대한 비밀로 하고픈 구후영이었다.
'네 동생을 우리가 데리고 있으니 혼자만 알고 있다가 자정에 이곳으로 와라.'
필체가 삐뚤삐뚤하고 틀린 글자도 두 개나 보였으나 획에 깃든 힘이 예사롭지 않았다. 붓글씨라는 게 힘이 세다고 글자에 힘이 실리는 게 아니다. 필체를 보면 특별히 서예를 익힌 적도 없는 듯하니 무공 경지가 꽤 높은 자의 소행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모용세가인가?'
현월궁이라면 굳이 이럴 필요가 없다. 일개 호위인 야효만 해도 사부 못지않은 실력으로 보였다. 게다가 현월궁이 낙화문과 구후영을 경계해 이런 하찮은 수작을 부릴 것 같지 않았다.
모용세가 역시 낙화문이 눈에 안 차겠지만, 구린 구석이 있으니 이런 짓을 벌인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
이번에 돌아오면서 겪은 일 빼면 원한을 산 적이 한 번도 없기에 구후영은 다른 가능성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사부한테 얘기해도 소용없다. 빈손으로 가서 임기응변하자. 내 목숨을 내주고 동생만 구해도 남는 장사다.'
자칫 낙화문 전체가 도륙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일의 발단인 자신의 목숨 하나로 끝내는 게 오히려 이득으로 느껴졌다.
서신의 글자 부분을 찢어 태우고 지도 부분만 챙긴 구후영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손님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머리 한편에선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와 자신은 어떻게 대처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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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 만물이 정적에 잠긴 시각. 구후영은 옷을 두껍게 입고 몰래 산을 내렸다.
쌀쌀하긴 해도 그리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구후영은 칼을 조금이라도 얕게 맞으려고 일부러 두꺼운 옷을 챙겨 입었다.
자신 혹은 동생이 상처를 입으면 치료할 목적으로 침통과 직접 만든 고약도 챙겼다. 물론, 여차하면 굵은 대침을 암기로 쓸 생각도 있었다.
'잘한 일인가?'
방에 동생이 납치되어 구하러 간다는 쪽지를 남겼다. 그게 잘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마음이 조금 찝찝했다.
'맞다. 지도.'
산자락에 이른 구후영은 잡념을 억지로 떨친 후 품에서 지도를 꺼내 미약한 달빛을 빌어 확인했다. 잘 그린 지도는 아니지만, 헷갈릴 수 없게 확실히 그려서 구후영은 바로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
'저긴가?'
지도를 보며 걷다 보니 불빛이 보였다. 구후영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조용조용 접근했다.
"누구냐!"
딴에는 조용히 움직인다고 했는데, 백 걸음도 더 떨어진 곳에서 들키고 말았다. 구후영은 몰래 접근한 적 없는 척 부스럭 소리를 짐짓 크게 내며 횃불을 밝힌 곳에 다가갔다.
"동생 찾으러 왔습니다."
횃불이 일곱 사내를 음울하게 비췄다.
두 명은 형제인지 얼굴과 체형이 닮았고,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이 보였다. 한 명은 등에 망태기를 멘 것이 약초꾼처럼 보였고, 남은 세 명은 저잣거리에서 흔히 보는 차림새였다.
"일이 끝나면 동생은 곱게 돌려준다고 말했을 텐데."
"그랬습니까?"
구후영은 아이가 오는 길에 종이 한 장을 흘린 게 아닌지 추측했다.
"전달이 제대로 안 된 모양이군. 일만 잘 끝나면 네 동생은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곱게 돌려보낸다."
"알겠습니다."
처음 보는 자들이니 원한 따위는 없다.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몰라도, 그것만 들어주면 동생은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솜씨 좀 보자. 이자를 치료해라."
형제로 보이는 사내 중 한 명이 등에 업은 사람을 내렸다.
"헙!"
자그마한 체형의 사람을 확인한 구후영은 비명을 지르려다 말았다.
구후영이 치료해야 할 사내는 다리 두 개가 무릎 아래로 없고 왼쪽 팔은 어깨 아래가 없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귀 두 개가 없고 코도 반쯤 베이었다. 입에서 푸르륵 소리가 연신 나는 걸 보니 혀도 잘린 듯했고, 눈도 한쪽이 실명됐다.
그 외에도 심한 고문을 당한 듯 흉터가 빼곡하여 몰골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구후영이 놀란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처참한 몰골의 사람은 다름 아닌 장방선생이었다.
'사부 이상의 고수에 독공도 쓰는 자가 어쩌다 이런 지경이.'
암기를 익힌 자는 같은 경지의 무인보다 반 수 높게 쳐주고, 독을 익힌 자는 같은 경지의 무인보다 한 수 높게 쳐준다.
구후영의 판단으론 낙화문이 열이 와도 장방선생 한 명을 어쩌기 힘들다. 그런 대단한 자가 이런 처참한 꼴로 모습을 드러내니 아무리 침착하기로 마음먹은 구후영이어도 안 놀라고 배기기 힘들었다.
"이 자의 목숨을 목적지까지 살려놓는 게 조건이다."
그제야 구후영은 이들이 자신의 의술이 필요해서 동생을 납치했음을 알아챘다. 상대가 원하는 게 돈 따위가 아니어서 마음이 한결 놓인 덕분에 침을 잡은 손이 무척이나 안정적이었다.
"듣던 것보다 솜씨가 훨씬 좋은데?"
"침을 찌를 때 힘이 균일해. 어린 나이에 수련을 시작했으면 고수가 됐을지도 몰라."
"무인 돼서 사람 죽이는 거보다 의원 돼서 사람 살리는 게 백번 낫지."
옷차림도 인상도 평범한 셋이 구후영의 치료를 이러쿵저러쿵 평가했다. 다행히 집중력이 좋은 구후영은 셋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장방선생의 치료에 전념했다.
"어떻소? 얼마나 더 살 것 같소?"
치료를 끝내고 땀을 훔치는 구후영에게 약초꾼 모습의 사내가 질문했다.
"손속에 사정을 너무 안 둬서."
구후영이 말끝을 흐리자 염소수염이 말했다.
"우리가 한 게 아니다. 우린 이 자를 구한 사람이다."
구후영은 그제야 확실히 대답했다.
"일단 염증 부위에 고약을 발랐고 침으로 통증을 일부 차단했습니다. 통증을 차단했으니 몸이 알아서 치유할 겁니다. 며칠 지켜봐야겠지만, 목숨 부지하는 데 문제없습니다."
일곱 사내의 얼굴이 기분 좋게 풀렸다.
- 작가의말
알 게 모르게 어긋나고 엇갈리다.
음차양착과 삼차오착의 뜻입니다. 지난 글에 깜빡 잊고 못 적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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