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화성개蘭花盛開
난초는 조용한 골짜기에 홀로 생겨 보는 사람이 없다고 꽃을 안 피우지 아니하고, 꽃이 안 아름답지 아니하고, 향이 없지 아니한다.
그런 면에서 당면한 홍엽산장은 난초와 꽤 닮았다. 강산이 십수 번 변해도 꿋꿋이 같은 모습을 유지했고, 똑같이 질박하고 조용하다.
질박한 장원은 삐뚤빼뚤한 길마저 눈에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뻗은 난초의 잎처럼 나름의 정취가 있었다.
물론, 그러한 정취를 구후영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장선을 따라 밖으로 뛰쳐나갔던 구후영은 얼마 안 지나 장선의 종적을 잃고 거미줄같이 잔혹한 길들 사이에 외로이 던져졌다.
'되는 일이 없구나.'
흉수가 자룡의 행방을 알지도 모른다는 미미한 가능성을 무시하기 힘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뛰쳐나온 건데, 아무 성과도 없어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친위대 중 한 명이 미약한 숨소리가 있었던 거 같은데.'
사내가 귀에 내공을 집중하고도 못 들은 숨소리를 구후영은 그저 귀로 들었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구후영은 장선의 종적을 놓친 게 자기 사정만 살펴 죽어가는 사람을 무시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한때 성현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강박적인 바름을 버리려고 마음먹었던 구후영이지만, 풍불지와 정학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성현의 말씀에 무조건 따르고 어떤 상황에도 무작정 바르게 행동하려는 건 아니고,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사람을 돕고 이롭게 살려는 마음이다.
'풍 대협이 착하게 살면 언젠간 보답이 온다고 했지. 날 위해서가 아니라 자룡을 위해서 덕을 쌓는다고 생각하자.'
마음을 수습한 구후영이 의사당으로 돌아가 숨이 끊어지지 않은 친위대의 사내를 치료하기로 했는데, 망할 놈의 길이 애먹였다.
'이리도 큰 장원에 왜 사람이 없지?'
수많은 강호인이 몰려오면 어떤 사고가 날지 몰라 대부인이 하인과 하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덕분에 커다란 산장이 텅 비다시피 했다.
'고함이라도 칠까?'
구후영은 막막한 나머지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부를 생각까지 떠올렸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구후영은 은밀하게 움직여 발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했다.
'친위대?'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복식은 분명히 장선의 친위대였다. 아까 구후영이 장선 뒤를 따라 뛰쳐나올 때만 해도 여덟 친위대 모두 독에 당해 쓰러졌다.
그런데 지금 시커먼 얼굴에 친위대의 복식을 한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비틀 달리고 있었다.
'무언가 있다.'
달리는 사내가 독에 당해 위태로워 보였으나 구후영은 나서지 않고 기척을 죽인 채 은밀하게 뒤를 따랐다. 사내 딴에는 빨리 달린다고 했지만, 독 때문에 내공 없이 그저 달리는 속도도 나지 않았기에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사내는 홍엽산장의 지리를 잘 아는 듯 복잡한 길을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여기가 목적지인가?'
주변이 탁 뚫린 별채에 도착한 사내가 담장을 넘으려다가 실패하고 문을 두드렸다. 구후영은 이십 장 정도 거리에 숨어서 눈과 귀에 감각을 집중했다.
"뭐냐? 왜 여기로 온 거야!"
낮은 목소리지만, 화가 꾹꾹 담겨있었다.
"해약이 말을 안 듣습니다. 사숙."
친위대 사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들어와."
친위대 사내가 안으로 들어가고 바로 문이 닫혔다. 구후영은 급해 하지 않고 계속 기다렸다. 사내를 안에 들인 자는 뒤를 밟은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느라 문가에서 한참이나 서 있다가 비로소 안으로 들어갔다.
구후영은 뛰어난 청력 덕분에 그 사실을 알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이다.'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구후영은 바로 경공을 펼쳐 별채로 달려갔다.
구후영의 경공은 사부인 임초현이 아니라 두전한테서 배웠다. 눈썰미가 좋은 데다가 대담하기까지 해 비싼 약초를 쉽게 캐는 바람에 점점 사냥보다는 약초 채집의 비중이 늘었으나, 두전의 부친은 사냥꾼이었고 두전도 사냥꾼으로 시작했다.
인간보다 후각과 청각은 물론이고 경각심도 수십 배 뛰어난 산짐승을 상대하던 두전이기에 딱히 배운 적이 없어도 경공이 출중했다.
덕분에 구후영의 몸놀림은 은밀했고 기척도 거의 없었다.
"사숙. 난 모든 진실을 글로 적어서 홍엽산장에 숨겼습니다. 날 해독하지 않으면 언젠간 당신의 비밀이 드러날 겁니다."
구후영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모든 진실에 자룡의 행방도 포함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거냐? 해독제도 독이어서 많이 먹으면 안 된다니까. 지금은 두 독이 네 몸에서 싸우고 있어서 힘든 거다. 조금만 견뎌라."
"당신이 시킨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서 내 목숨을 살리세요."
'설마.'
구후영은 그제야 중독된 사내가 암기를 뿌린 장본인일 가능성을 떠올렸다.
'암기에 힘이 없었던 게 독이 발작했기 때문인가?'
구후영은 방금까지 네 대주가 뭔가를 말하려고 해서 살인멸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여덟 친위대 모두 음식이나 기타 경로로 중독되었고, 독이 발작하여 남은 일곱이 무력화되자 안으로 암기를 던진 듯했다.
'사숙이라는 사내가 배후인 거 같고.'
"해독에 시간이 걸릴 뿐이라니까."
"내가 멍청이로 보입니까?"
친위대 사내가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추궁했다.
"아까 나를 불러내서 암기 두 개를 달라고 했죠? 혹시 구후영을 죽이고 그걸 구후영의 방에 흘렸습니까?"
"하하."
사숙으로 불린 사내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멍청이가 아니라면서 왜 널 죽여야 할 이유를 자꾸 알려주는 거야?"
"말했잖습니까. 내가 아는 바를 모두 글로 적어서 숨겼다고. 난 당신의 배후가 누군지도 아는데, 날 해독하고 한 몫 단단히 줘서 멀리 보낼 건지 아니면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을 무릅쓸 건지 빨리 정하십시오."
"지금 칼자루를 잡은 게 누군지 모르겠느냐?"
"뭔가 크게 오판하고 계시는군요. 진짜 구후영이 나타났습니다."
친위대 사내의 말에 사숙으로 불린 사내가 멈칫했다.
"진짜 구후영?"
"게다가 동생도 있다고 합니다. 구후가의 핏줄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 생겨났습니다."
"아까 무당에서 왔다고 말하고 의사당에 들어간 둘 중 하나가 진짜란 말이구나. 그자를 죽여 없애고, 그자의 동생까지 죽여 없애면 그만이다. 네가 남긴 증거야 홍엽산장에 불을 지르면 재가 되어 사라질 거고."
"크큭."
친위대 사내가 신음인지 웃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진짜 구후영의 동생을 철추당의 네 대주가 납치해 숨겼습니다. 네 대주가 구후가의 핏줄을 어디에 숨겼는지 내가 아는데, 이래도 날 안 살릴 겁니까?"
'어떡하지?'
중독된 사내가 자룡의 행방을 안다는 말에 구후영은 머리가 복잡했다. 그러다 청빈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 괜히 꾸물거리다가 후회하지 말자.'
마음을 정한 구후영은 몸을 훌쩍 날려 담장을 넘은 후,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흥!"
미처 구후영이 안의 상황을 다 살피기도 전에 하인 차림을 한 사내가 암기를 던졌다.
구후영은 창문을 부수기 전에 뽑은 천공교검을 휘둘러 암기를 쳐냈다. 급한 마음에 생각도 없이 펼친 난화검법의 초식이 십수 개 암기를 모조리 막아냈다.
"의원이요. 묵혈장과 적혈장을 해독한 적 있소. 저자를 제압하고 바로 치료하겠소."
구후영은 묵혈장에 맞은 염소수염을 해독한 적 있고, 본인이 적혈장에 맞았으나 살아났다. 염소수염은 그저 당장 안 죽게 증상을 완화한 거고 자신의 적혈장은 어떻게 해독했는지도 모르나, 굳이 모든 진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놈이 진짜인가? 어깨가 아비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하인 차림의 사내가 짐짓 중얼거렸다.
"저자는 금검당 부당주 육비나타요. 독과 암기를 다루니 조심하시오."
구후영이 등 뒤 사내의 말에 잠깐 주의가 분산된 틈에.
슉!
육비나타가 다시 암기를 뿌렸다.
"흡!"
천공교검이 아름다운 난꽃을 허공에 피웠다. 아까의 두 배는 됨직한 서른 개 넘은 암기가 천공교검과 접촉한 후 하나같이 목적지를 바꿨다.
"강우야. 부모와 사부를 걸고 맹세컨대, 날 도와 이자를 처리하면 널 해독하고 은자 천 냥을 주겠다. 네가 먼저 나한테 칼을 겨누지 않는 한 절대 널 해코지하지 않겠다."
'흔들리지 말자.'
당하는 입장인 구후영으로선 무조건 등 뒤의 사내를 믿어야 한다. 그저 암기도 아니고 극독을 바른 암기를 상대하는데 주의력을 조금이라도 분산할 수 없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내가 먼저 공격할 테니 넌 확실한 기회를 잡아 저자의 등으로 암기를 던져라."
말을 마친 육비나타가 거의 백 개에 가까운 암기를 던졌다.
'믿는다.'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빠르게 휘둘러 검벽을 쳤다.
구멍이 숭숭 난 검벽이 우선 절반 정도의 암기를 걸러냈다. 구멍으로 빠진 암기는 이어지는 변초에 또 절반 정도가 사방으로 튕겼다.
'된다.'
난화검법은 유인, 유도, 공격의 세 절차가 있다.
처음에 친 검벽이 유인이고, 구멍으로 유인되면 변초로 유도한다. 상대가 유도한 대로 움직이면 그러는 사이에 생긴 틈을 확실하게 공격하는 게 마지막 절차다.
구후영은 검벽으로 암기를 절반 걸러내고, 변초로 또 절반 걸러냈다. 남은 암기는 마지막 공격으로 모두 걸러낼 자신이 있었다.
그때, 등 뒤의 사내가 구후영을 향해 암기를 던졌다.
지은 죄가 너무 커서 홍엽산장의 자비를 바라는 것보단 육비나타의 맹세를 믿는 편이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하!"
위기의 순간, 구후영이 크게 웃었다. 갑자기 터진 웃음에 별채가 흔들리며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의사당에선 갑자기 감정이 치밀어 진심을 드러내는 웃음이었고, 지금은 자신의 미련한 판단 때문에 곤경에 처한 것에 대한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둘 다 마음이 움직이며 웃음소리에 내공이 실린 건데, 당장은 생사의 관두여서 아까보다 훨씬 위력이 강했다.
'한다.'
의념이 움직이자 단전의 기운이 호호탕탕하게 십이경맥을 흘렀다.
이미 펼친 초식이 채 끝나지 않았고, 여력을 남기지 않아 더 변화할 여지가 없는 게 상식인데, 막대한 내공과 간절한 마음으로 새로운 힘을 얻은 구후영이 난화검법의 세 초식을 한꺼번에 펼쳤다.
"허!"
전후좌우 어디에도 없는 데가 없는 천공교검은 흡사 난초의 검엽劍葉(검처럼 뾰족한 잎)과 같고, 천공교검에 둘러싸인 구후영은 한 떨기 난화 같고, 검에 맞아 사방으로 튕긴 암기는 난초의 꽃술 같다.
육비나타는 마치 눈앞에 커다란 난화가 피어 향기를 뿌리는 것 같은 착각에 대치 중임도 잊고 감탄을 뱉었다.
"내가 상대할 만한 분이 아니군. 홍엽산장이 번창하겠어."
말을 마친 육비나타가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깊은숨을 십수 번 몰아 쉬어 명정에 가까운 상태에서 빠져나온 구후영은 황급히 몸을 돌려 친위대 사내를 확인했다.
원래부터 중독으로 위태롭던 목숨이었는데, 검에 튕긴 암기에 당해 그새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건 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구후영은 등에서 침통을 꺼내 굵은 대침 세 개를 사내 머리에 꽂았다.
"헛."
심장이 멈추고 숨도 멈췄던 사내 입에서 바람 소리가 샜다.
- 작가의말
??? : 구후영 님, 밸런스 게임 시작합니다.
전성기의 천마와 혼자 싸우기 vs 미궁에서 혼자 탈출하기
구후영 : 아무래도 천마가 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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