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풍탑운乘風搭雲
강호의 중론에 따르면 경공의 최고 경지는 공중을 달리는 허공답보虛空踏步다.
물 위를 달리는 등평도수登萍渡水나 풀잎만 밟고 빠르게 달리는 초상비艸上飛는 이미 경공 고수들이 선보인 바 있지만, 허공답보는 장삼풍이나 천마도 못 해낸 일이다. 경공에 심취한 무인들이 허공답보를 평생의 화두로 삼고 어떻게든 이뤄내려고 절치부심했으나, 현재까지 어떠한 실마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허공답보에 가장 가까운 무공은 무엇일까?
머리가 보이면 꼬리를 감추고, 꼬리를 드러내면 머리가 사라지니, 구름에 숨은 용 아니겠는가.
다름 아닌 곤륜파의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이다. 실전한 지 수백 년이 되어 어떤 경공인지 입으로만 전해질 뿐, 아무도 그 실체를 확인한 적 없는 전설의 무공이다.
방금까지만.
구후영은 호흡이 어려운 상황에도 태극권을 펼쳐 황상엽의 두 주먹을 흘렸다. 그러나 내공도 없고 숨도 부족하여 결국엔 뒤로 밀려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결국 속았구나.'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자책이 추락하는 구후영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숨이 돌아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십이경맥에 미약하게나마 내공이 흘렀다. 위급한 상황이 오자 텅 빈 단전에 갑자기 내공이 차오르기 시작한 덕분이다.
'침착하자.'
구후영은 죽음이 코앞인 위기의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정신을 고도로 집중한 채 등의 천공교검을 뽑아 휘둘렀다. 잘 휘두른 천공교검이 절벽에 박혔고, 정확한 제어 덕분에 가장 깊이 박힌 시점에 휘두름이 멈췄다.
퍼석.
안타깝게도 검이 박힌 암석이 부서지면서 추락은 계속되었다. 구후영은 낙심하지 않고 다시 천공교검을 휘둘렀다.
퍼석. 퍼석. 퍼석.
추락을 멈추는 덴 거듭 실패했지만, 끈질긴 시도로 추락 속도를 늦춘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왔다.'
골짜기 밑에서 위로 부는 바람이 옷자락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구후영은 와기를 타고 그간 수없이 상상하던 경공을 펼쳤다.
추락하던 구후영의 몸이 허공에 둥실 멈췄다. 십이경맥으로 빠르게 방사한 내공이 천천히 돌아오면서 구후영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덕분이다.
구후영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경공요결에 적힌 대로 내공을 움직였다. 팔다리는 물론 고개도 까딱하지 않았는데 누가 줄로 묶어서 당기기라도 한 듯 구후영의 몸이 절벽 쪽으로 휙 이동했다.
절벽 가까이 간 구후영은 암석에 천공교검을 자루 가까이 깊이 박았다. 거의 동시에 십이경맥을 흐르던 내공이 멈췄다.
'올라가는 건 위험하다.'
비록 내공이 돌아오긴 했으나 양이 얼마 안 된다. 게다가 상대는 높은 위치에 있고 절벽을 타는 구후영은 회피가 어렵다.
'내려가는 것도 위험하다.'
길의 경고문도 그렇고, 황상엽 역시 협곡에 독초와 독충이 득실거린다고 했다. 표지판의 경고문에 황상엽이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당연히 내려가는 것도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때, 단전에 미약하게나마 생겼던 내공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안전을 확보하고 내공부터 회복해야 한다.'
마음을 정한 구후영은 고개를 최대한 돌리면서 지형을 살폈다. 그러다가 몇 장 밑에서 절벽에 자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시간이 별로 없다.'
황상엽이 구후영의 주검을 못 찾으면 절벽을 수색할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다른 화산 제자들까지 합류하면 내공을 회복했다고 쳐도 목숨을 부지하기가 쉽지 않다.
'낙화문의 최종 오의도 꾸며낸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괜한 미련 갖지 말고 빨리 내공을 회복하여 여길 벗어난다.'
마음을 굳게 다진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이용해 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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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무슨 짓인가?"
황상엽은 고개를 내밀어 절벽 밑으로 추락한 구후영의 최후를 감상하려 했다. 그런데 목덜미에 소름이 돋게 하는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사형."
"내가 잘못 보지 않았으면, 방금 낙화문의 장문을 공격한 것 같은데."
"사형. 제 말을 들어보세요."
전중광은 구후영과 대결할 때 흑 장로의 출수로 억지로 눌렀던 내상이 다시 도졌다. 그래선지 두꺼운 솜옷을 입었음에도 안색이 파리했다.
"잘 생각하고 말해라. 내가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넌 모르잖아."
전중광의 차가운 목소리에 황상엽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디까지 보고 들었을까?'
"머리 굴리는 소리 여기까지 들린다."
전중광의 재촉에 황상엽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구후 장문에게 장문검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비급이 있는 방의 문을 열어야 하니깐요. 그런데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제압해 힘으로 뺏으려 했는데, 상대의 실력이 녹록지 않아 그만 실수했습니다."
황상엽의 변명에 전중광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추산공은 어떻게 해석할 건데?"
무공은 그저 무기를 잘 휘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다. 무기를 휘두를 때 적절히 내공을 움직여야 비로소 최대치의 위력을 뽑아낼 수 있다.
그렇기에 검종은 기종에게 초식을 숨길 수 없었다.
반면, 기종은 검종에게 내공심법을 숨겼다. 특히 화산의 자랑인 자하신공은 장문인만 배울 수 있다는 명목을 붙여 검종에게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그 탓에 검종의 숫자가 훨씬 많으나 입지는 점점 기종 쪽으로 기우는 상황이 발생했다. 검종이 십수 년 동안이나 풍애협에 들어가려고 애썼고, 준비가 덜 됐음에도 모험한 이유다.
"추산공이 왜요?"
"초식이야 눈으로 보고 배울 순 있지. 그러나 운기 방식은 기종에서 우리한테 가르친 적이 없을 텐데? 게다가 낙화문 장문이 화산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지기라도 하면 우리 검종이 더는 설 자리가 사라진다는 걸 모를 리도 없고."
'잘못 걸렸다.'
전중광이 구후영을 해코지한 걸 추궁하는 거라면 어떻게든 잘 무마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전중광이 문제 삼는 건, 검종의 제자인 황상엽이 추산공을 꽤 높은 수준으로 익힌 사실이다.
"네가 기종의 간세구나."
황상엽의 표정에서 진실을 알아차린 전중광이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뽑았다.
"사형. 살려주세요."
황상엽은 구후영을 최대한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검을 두고 나왔다. 그게 아니어도 둘의 실력 차이는 황상엽에게 검을 백 자루 줘도 모자랄 정도로 크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황상엽은 아예 저항을 포기하고 무릎부터 꿇었다.
"목숨만 살려주시면 제가 간세임을 시인하고 증인이 되겠습니다."
"폐혈침閉穴針이다. 단중혈에 꽂아라."
황상엽은 전중광이 던진 폐혈침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받았다.
"사형. 사형이 직접 점혈하는 건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폐혈침을 쓰면 몸이 망가집니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기운인 내공과 달리, 폐혈침은 은에 철을 섞어 만든 쇠붙이다. 그런 물건이 오랜 기간 박히면 당연히 혈도가 망가진다.
단중혈은 임맥에 속하며 족태음과 족소음, 수태양과 수소양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달리 상기해上氣海라고도 불리는 단전에 버금가는 중요한 혈도여서 망가지면 더는 무인 행세를 하기 힘들다.
"그럼 돌아서라."
황상엽은 전중광에 대한 두려움이 큰지 무릎을 꿇은 채 고분고분 뒤로 돌았다. 전중광은 검을 왼손으로 옮긴 다음 등을 보인 황상엽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사형. 제 사부한테도 잘 말씀해서 목숨만 부지하게 해주십시오."
황상엽이 흐느끼며 사정했다. 그에 마음이 불편해진 전중광은 걸음을 빨리했다. 마음이 더 약해지기 전에 마무리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형. 제발. 제발 도와준다고 해주세요."
전중광은 이를 살짝 악문 채 황상엽의 양쪽 견정혈을 짚었다. 견정혈이 짚이면 양팔에 힘이 안 들어가 싸울 수 없다.
"일어나."
견정혈을 짚은 전중광이 검을 검집에 넣으며 황상엽에게 명령했다.
그때.
무릎 꿇은 자세에서 일어서던 황상엽이 갑자기 뒷구르기를 했다. 뜻밖의 전개에 깜짝 놀란 전중광은 급히 검집에 넣던 검을 다시 뽑았다.
그러나.
가랑이로 빠져서 전중광의 뒤로 간 황상엽이 재빨리 몸을 일으켜 머리를 전중광의 등에 받았다. 얼핏 보기엔 고양이를 무는 궁한 쥐의 발악 같았지만, 황상엽의 정수리는 정확히 전중광의 명문혈에 꽂혔다.
추산공 중에서도 너무 볼품이 없다고 익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두고산頭叩山이었다.
"죽어!"
두고산으로 명문혈을 타격한 황상엽은 바로 몸을 허공에 날려 양발로 전중광의 등을 연신 걷어찼다.
이는 원앙박산鴛鴦拍山이란 다소 괴이한 이름의 연환퇴로, 실패하면 오히려 본인이 위험에 처하기에 부득이한 경우나 확실한 승기를 잡았을 때나 선보이는 구명 초식이었다.
"야비한 놈!"
황상엽의 반격을 미처 예상치 못한 전중광은 한 마디 욕설만 뱉은 채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잠시 후,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골짜기에 울렸다. 황상엽은 견정혈의 점혈을 풀기 위해 바닥에 누워 비루하게 펄떡이면서도 득의의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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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이 갑자기 멈추자 전중광은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그런 전중광의 눈에 들어온 건 입술 앞에 손가락을 세운 구후영이었다.
전중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자 구후영은 천공교검을 휘둘러 발 디딘 나무의 가장 큰 줄기를 잘랐다.
잘린 줄기가 추락하여 바닥에 떨어지며 쿵 소리를 냈다. 고요한 탓인지 메아리가 크게 울렸다.
"위의 대화는 다 들었소."
구후영의 말에 전중광의 눈이 커졌다. 굳이 속삭인 건 아니지만, 다 듣게 고래고래 외친 것도 아니다. 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여기서 위의 대화를 듣는 건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믿음이 있는 사이는 아니지만, 서로 못 믿을 것도 없잖소?"
구후영의 말에 전중광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구원받았는데 내가 구후 장문을 의심하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하오."
"풍애협에 낙화문의 무공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오?"
"사실 여부는 모르지만, 열쇠가 필요한 문을 발견한 건 진실이오. 그 문을 여는 열쇠가 장문검이라고 추측했었는데, 어제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소."
"무슨 말이오?"
"당신이 보여준 장문검은 너무 컸소. 그 장문검이 진짜라면 열쇠는 따로 있소."
구후영은 가슴을 더듬어 장문검을 꺼냈다. 애써 화려한 검집으로 초라한 모습을 가렸건만, 결국 황상엽의 견파산에 당해 검집째로 동강 나 있었다.
"이 정도 크기면 어떻소?"
검집을 비롯한 부스러기가 떨어지자 손가락 두 개 넓이에 길이가 반 척이 조금 안 되고 손잡이 없이 날만 있는 단검 모양의 물건이 보였다.
"검장검劍藏劍?"
장문검은 검 안에 숨긴 검이었다.
"쉿!"
전중광이 놀라 외치자 구후영이 황급히 제지했다.
"제안이 뭐요?"
덕분에 정신을 차린 전중광이 소리를 낮춰 질문했다.
"아무래도 그 방의 문을 열지 않으면 화산 검종이 날 가만두지 않을 것 같소."
전중광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얼굴을 붉히며 가까스로 멈췄다.
"그렇다고 장문검을 화산 검종에 넘길 생각도 없소."
비록 뿌리는 같지만, 화산은 화산이고 낙화문은 낙화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황상엽이 뭘 하기 전에 나와 전 대협이 방문을 열고 비급을 꺼내는 건 어떻소? 비급은 화산 검종의 소유로 하고, 난 그저 일독만 원하오."
- 작가의말
구후영 : 국정원 파일 원본은 낙화산당이 갖고, 나한텐 복사본만 주면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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