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녕인熄事寧人
큰일은 작은 일로 만들고, 작은 일은 없던 일로 만들라.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된 자들이 선배들에게 가장 먼저 듣는 격언이다. 조정의 봉록을 받아먹는 자에게 일이란 건 하나 적은 게 하나 많은 것보다 백 배는 낫다.
양왕 역시 왕의 작위를 받은 자로서 이러한 도리를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노기충천하여 달려가던 모습과 달리, 양왕은 조용히 믿을 만한 심복을 불러 첩과 두 시녀를 몰래 가뒀다.
"난 순천부로 갈 생각이다."
양왕의 뜬금없는 말에 구후영은 머리가 멍해졌다.
"내가 여기서 길길이 날뛰어 봤자 해결되거나 해명되는 일은 없고, 오히려 철혈방을 비롯해 양양의 모든 권세나 힘 있는 자들이 피곤해진다. 홍엽산장도 예외가 아니겠지."
"순천부로 가면 다 해결됩니까?"
"이대로 순천부로 가면 아마 인질로 잡혀 평생 내가 태어나서 자란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겠지. 대신 목숨을 부지하고 가족과 날 따르는 자들의 평안을 보장할 수 있다."
양왕이 순천부로 가면 양왕부에 역모죄를 씌우는 게 의미 없다. 역모를 꾀한 주동자가 나 잡아 죽이라고 순천부에 제 발로 갈 리는 없으니, 괜히 음모를 꾸민 자들만 역풍을 맞는다.
"순천부에서 왕야를 양양으로 돌려보내면요?"
"그럼 길에서 죽어야지. 어떻게든 나랑 가족을 다 죽여 없애겠다는 말인데, 나 하나 죽는 거로 끝내면 남아도 한참 남는 장사 아니냐."
멀다고 해도 황실의 핏줄이고 이젠 몇 명 안 남은 왕의 작위를 보유한 자다. 그런 자가 길에서 죽으면 당연히 큰 소동이 일고, 양왕의 가족은 무사할 가능성이 크다.
"작위를 반납하는 건 어떻습니까?"
구후영이 궁금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했다.
"오호. 그것도 좋겠다. 순천부에 가서 몇 년 지내다가 왕위를 반납한다고 하면 오히려 치사를 받으며 금의환향할 수 있겠구나."
껄껄 웃던 양왕이 정색하여 말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네게 하는지 알겠느냐?"
"저보고 일 크게 만들지 말라는 뜻 아닙니까?"
"잘 보았다. 식사녕인이란 말을 아느냐?"
"큰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알리지 않는 거로 백성들이 평안한 삶을 지내게 한다는 뜻으로 압니다."
"바로 그거다. 잡음이 안 나오게 철혈방 쪽도 잘 무마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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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해결되었습니까?"
구후영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단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후영은 안에 있었던 일을 단아에게 간략히 얘기했다.
"잘됐군요. 양왕이 시킨 대로 하면 철혈방에도 홍엽산장에도 좋은 일입니다."
"그럼 몰래 숨어서 화살을 쏘는 자를 그대로 두자는 말입니까?"
"암중 세력이 왜 갑자기 철혈방에 손을 썼을까요?"
구후영은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지만, 경솔하게 말하지 않았다.
"철혈방보단 양왕의 역모죄가 이번 음모의 주된 목적입니다."
"철혈방이 주목적이 아니라고요?"
천 명이 넘은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게 그저 수단의 일부였다고 하니 구후영은 가슴 깊은 곳이 끓어올랐다.
"생각해 보세요. 양양에서 양왕이 역모죄를 꾸몄다가 들켜서 음독자살했다는 소문이 돌면 어찌 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귀주와 광서는 지금도 명에 대한 반감이 강합니다. 누군가가 불을 지피고 부채질하면 확 타오를 가능성이 높겠죠? 그런데 북원이 침공합니다. 약탈 목적의 소규모 무리가 아니라 수만 심지어 수십만 규모로 말이죠."
"큰일이군요."
"백성은 단순합니다. 역모에 관한 소문이 흉흉한 가운데 북원의 침공 소식까지 들으면 '양왕이 역모를 꾸밀 만도 했네' 이러면서 역모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일을 키우고 싶은 누군가가 선동하기 딱 좋겠군요."
"거기에 철혈방 사람이 천 명 넘게 죽습니다. 그 가족과 친우를 합치면 십만은 된다죠? 철혈방 사람들을 죽게 만든 흉수는 당연히 조정으로 알려질 테니, 굳이 뭔가 이득으로 유혹하지 않아도 역모에 가담할 사람이 넘치겠죠?"
"그럼 은마단을 벌하는 거로 이번 일은 마무리해야겠네요."
"은마단 단주는 아마 알아서 자수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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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의 예상은 정확했다.
마 단주는 채 날이 저물기도 전에 아이 둘을 등에 하나 업고 품에 하나 안은 채 홍엽산장을 찾았다.
"아는 걸 다 털어놓을 테니, 제발 두 아이만 살려주십시오."
피곤한 얼굴로 곤히 자는 두 아이를 편한 자리에 눕힌 마 단주가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다른 자들은?"
"지금 은마단의 장원에서 결사 항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아이만큼은 어떻게든 살리려고 몸을 뺐습니다.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이 두 아이는 제 핏줄이 아닙니다. 멍청한 이놈을 따르는 수하의 핏줄로,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아이들입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구후영이 장선에게 질문했다.
"악 대협은 뭔가 아는 눈치였는데."
악불형은 구후영과 만나자마자 절대 천산에 가지 말 것을 당부하고, 급히 알아볼 일이 있다며 훗날을 기약하고 떠났다.
"두 아이는 장 당주께서 제자로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선이 엉뚱한 소리를 하자 단아가 끼어들었다. 그에 마 단주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걸 보면 똑똑한 분인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소."
그 모습을 본 구후영이 한탄했다.
"무슨 말이냐?"
혼자 말귀를 못 알아들은 장선이 질문했다.
"장 숙부는 은마단의 음모로 제자 다섯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넓은 아량으로 은마단의 아이 둘을 제자로 받았습니다."
구후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이는 이번 사태를 은마단 소속한테만 죄를 묻고 가족이나 친우를 비롯한 사람은 용서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잘된 일이 아니냐?"
"그만큼 은마단 소속은 철저하고 가혹한 최후를 맞이해야겠죠. 죽어서도 욕먹는 건 당연하고, 아마 대부분이 땅에 묻히지도 못할지 모릅니다."
"끝까지 파지 않기로 한 거냐?"
"양왕을 역모죄에 엮어 천하에 대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고, 수십 년 전부터 은마단을 통해 철혈방을 와해하려 한 세력이죠. 정체를 알면 용서치 않겠으나, 굳이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사람의 명운을 걸고 맞설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난 이대로 분이 안 풀릴 것 같구나."
"할머니가 왜 서신의 내용을 혼자 알고 계셨을까요? 분명히 위험 요소가 있었을 텐데도 우리한테 비밀로 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간은 동생을 찾느라 후순위에 두고 깊이 생각지 않았는데, 오늘에야 그 마음을 알겠습니다."
구후영의 해석에도 장선은 속이 안 풀리는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장 숙부께선 두 아이를 제자로 받는 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키는 대로 하마. 대신, 복수할 기회가 생기면 나도 꼭 부른다고 약속해라."
"당연히 그래야죠."
"천고의 죄인 마근은 구후 장주와 장 대협의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마 단주가 단단한 바닥에 이마를 쾅쾅 찧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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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남은 재마저 바람에 쓸려가서 아무것도 안 남은 구궁산장의 집터.
나무 기둥에 마근을 비롯한 은마당의 생존자 십수 명이 산채로 꼭꼭 묶여 있었다.
캭, 퉤!
비수로 살점 한 점 잘라낸 자가 가래침을 뱉고 물러났다. 그러자 다음 사내가 바로 득달같이 달려와서 칼로 살점을 저며냈다.
홍엽산장의 두 장주를 해치고 철혈방의 천이 넘은 형제를 죽이려 했던 은마단은 능지凌遲(살점을 얇게 저며 천천히 죽이는)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형벌을 가하는 철혈방 사내들이 전문가가 아니어서 손 쓴 자가 아직 백 명도 안 되었는데 벌써 세 명이나 숨이 끊어졌다.
"방주. 이번 일은 이렇게 마무리한다고 쳐도, 남은 위기는 어쩔 거요?"
동엽과 마근이 가담해서 꾸민 음모는 분쇄됐지만, 철혈대회의 안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철혈방은 여전히 도마 위에 놓여 있다.
"가능한 방안을 찾았고, 가능한지 확인하려고 정보를 구하는 중이오."
"제발 그리되었으면 좋겠소."
한숨도 못 잤는지 눈 밑이 거뭇거뭇한 공형선이 말했다. 물론, 왕경초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편액은 이미 태웠고."
셋이 있는 한쪽엔 편액이 타고 남긴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연명장은 어찌할 생각이오? 내 생각은 태워 없애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와 공 당주는 밤새 허심탄회하게 대화했소. 그간 쌓인 원한을 일거에 해소한 건 아니지만, 세상이 달라졌고 우리도 달라져야 함은 통감했소."
"그럼, 사람을 부르시오."
곧, 은도당 편의 조 단주와 양 단주, 금검당 편인 이 단주와 고 단주가 부름을 받고 몰려왔다.
철추당은 다시 장선이 당주를 맡기로 했는데, 현재 홍엽산장에 있다.
"여러분이 철혈방을 생각하고 철혈방의 형제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진실하다고 믿고, 연명장은 태워 없애겠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품에서 연명장 두 개를 꺼내 펼쳐 보였다.
"허!"
자신들의 서명이 맞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사내들은, 갑자기 타오르는 연명장에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믿음의 기초는 의심이다. 끊임없는 의심과 경계로 믿음을 지켜내야 한다.'
구후영은 섣부른 믿음으로 일을 망치지 않기 위해 단아가 알려준 운기 방식으로 연명장을 태워 실력을 과시했다.
'약하고 멍청하지 않아도 방심하면 당하는 게 세상이다.'
위하에서 자신을 골탕 먹였던 뱃놈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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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은마단 사내들의 주검은 그대로 기둥에 묶은 채 짐승의 먹이로 던져주고 모두 구궁산을 떠났다.
철혈방 방도들은 양양을 떠나 각자 집으로 갔고, 공형선과 왕경초는 후속 조치를 상의하러 구후영을 따라 홍엽산장에 왔다. 네 단주는 수하들을 통솔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양 단주가 불쑥 찾아왔다.
"무슨 일이오?"
"이건 제 아내의 머리입니다."
양 단주가 들고 온 상자를 구후영 앞으로 쓱 내밀었다.
"확인하고 싶지 않소."
"단장초는 마 단주에게 먹이려고 준비한 겁니다. 얼마 전에 마 단주와 아내가 간통한 정황을 발견하고 구했습니다. 그 뒤에 더 큰 일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구후영은 그제야 은도당 쪽의 간세가 누구고, 그날 양 단주가 왜 그리 행동했는지 깨달았다.
"제가 술을 마시면 말이 많습니다. 그걸 알고 밖에선 늘 조심했는데, 마신 술이 성에 안 차서 집에 가면 아내와 단둘이 종종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원하는 게 뭐요?"
"이미 단주 직을 가장 믿을 만한 형제에게 넘겼습니다. 혹시 은도당 쪽에 간세가 있는지 의심해서 왕 당주와 제 형제들을 홀대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양 단주가 무릎을 꿇었다.
"백의종군하여 방주를 보필하겠습니다. 별 쓸모는 없는 놈이나, 방주의 등을 노리는 화살 하나 정도는 목숨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구후영은 잠깐 고민하고 질문했다.
"슬하에 자식은 없는 것이오?"
"딸 하나뿐인데 시집 보냈습니다."
"좋소. 양 단주를 내 개인 호위로 임명하겠소."
"방주의 은혜 각골난망입니다."
양 단주가 바닥에 엎드린 채 서글프게 흐느꼈다.
- 작가의말
유달은 한나라 한명제의 다섯째 아들인데, 19살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유달은 황제가 되자마자 대규모 사면령을 내려 죄인을 석방했고, 생활이 어려운 자들에게 식량을 발급합니다. 중죄를 범한 자의 삼족까지 죄를 묻던 관례를 없애고, 재해나 역병이 발생한 지역엔 조세를 면합니다.
공자의 19세손 공희가 한무제의 공과 과를 평가하는 걸 누군가가 엿듣고 일러바쳤는데, 유달은 비단 죄를 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희에게 국가도서관을 관리하는 관직을 맡깁니다.
출산을 장려하려고 임산부에게 쌀 삼 석을 주는 정책도 시행하는데, 대신들에게 사형을 내릴 중죄가 아니면 웬만해선 경하게 처벌하라고 합니다. 이때 식사녕인이란 말을 했는데, 법강을 세우기보단 편한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주력하려는 생각이었죠.
소설 사이트에서 표절에 관해 엄격하지 않은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법강을 세우기보단 어떻게든 생산자(위에선 임산부, 여기선 작가)를 늘려 더 많은 이익을 도모하는 게 나으니깐요.
유달은 식사녕인의 통치 방식으로 한나라의 부흥을 이끌었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식사녕인의 방식은 과연 득일까요 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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