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망망天意茫茫
폭죽은 큰 소리로 터지는 대신 허공에 파란 불덩이 하나를 쏘아 올렸다.
땡땡땡.
불덩이가 쏘아지고 몇 호흡 뒤에 성곽 네 모퉁이의 누각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구후영과 금의위의 실랑이질을 구경하던 병사들이 급히 순찰 노선으로 복귀했다.
한바탕 소란과 함께 횃불을 밝게 밝힌 군사들이 성곽 위에 나타나 일 장 간격으로 서서 인간 장막을 만들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동사영과 서사영이 각각 삼천의 병력을 내 성곽 밖에서 자금성을 물샐틈없이 감쌌다.
내곽은 교대 없이 모든 병력이 구령을 외치며 순찰하고, 외궁은 동창과 서창이 나타나서 이 잡듯 누비고, 내궁은 금의위가 철통같이 수비하고.
반의반 각도 안 된 사이에 자금성이 철옹성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오?"
어안이 벙벙해 지켜보던 구후영이 함 소기한테 질문했다.
"침입자가 있음을 알리는 경종입니다. 일이 커졌으니 사람을 보내 공 태감께 알리겠습니다."
"그러시오."
함 소기의 눈짓을 받은 금의위 무사 두 명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저들은 왜 여기에 온 거요?"
"저도 조금밖에 못 엿들었는데, 황궁 안에서 서창 사람이 죽은 것 같습니다."
그때, 주황색 관복을 입은 얼굴이 넓적한 사내가 경공을 펼쳐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형님."
"관등성명!"
사내의 호통에 강 소기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서창 소속 금의위 소기 강창휘가 보고합니다. 영창을 지키던 금의위 열여섯 명이 죽었고, 흉수로 의심되는 자들이 문화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자칭 태의라는 작자가 수색을 방해합니다."
강창휘의 말을 들은 사내가 구후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대가 폐하의 치료를 담당한 태의인가?"
"그렇소."
"난 서창 지휘첨사指揮僉士 강성휘요. 경종이 울렸으니 여긴 이제부터 내 소관이오. 자, 어서 수색하지 않고 뭐 해?"
강성휘의 지시에 뺨에 붉은 자국 하나씩 새긴 서창 금의위들이 기세등등해 문화전 대문으로 몰려갔다.
"멈춰."
구후영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실렸다.
"어디서 감히 정사품한테 큰소리야!"
아까 당한 수모 때문인지 강창휘의 목소리엔 필요 이상으로 힘이 실렸다.
"멍청한 놈. 불쌍해서 살려주려 했더니. 그럼 그냥 수색하시오."
말을 마친 구후영이 뒷짐을 지고 뒤로 물러섰다.
그에 서창 금의위들이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강성휘의 눈치를 살폈다. 그간 금의위에 몸담으면서 갈고 닦은 감이 뭔지 모를 위험을 감지한 것이었다.
"무슨 얘기요?"
강성휘와 강창휘는 배다른 형제로 나이가 여섯 살 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는 정사품이고 하나는 종칠품인 걸 보면, 최소 능력 면에선 강창휘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인간임이 분명하다.
"폐하를 치료하는 데 쓰는 침을 비롯한 의구醫具들이 전부 안에 있소. 그러니 마음껏 수색하시고, 기회를 봐서 의구에 장난도 좀 치시오. 그래야 폐하의 치료에 차질이 생길 게 아니오."
찰싹.
아까 구후영이 때린 곳을 또 맞은 강창휘는 아픔과 서글픔이 교차하며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멍청한 새끼."
동생에게 욕설을 퍼부은 강성휘가 구후영을 향해 포권했다.
"첫 대면에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참으로 부끄럽소. 태의의 은혜는 꼭 기억해서 언제든 갚겠소."
"하하하."
구후영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웃었다. 그런데 사방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지 멀리 나가지 않고 계속 근처에서 메아리쳤다.
'어마어마한 고수구나.'
감히 깊이를 측정하기도 힘든 경지에 강성휘가 얼굴을 굳혔다.
"서창 소속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거요."
심호흡을 한 구후영이 강성휘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강호에 나에 관한 믿기 어려운 소문이 많은데, 대부분 사실이오. 그러니 '은혜'를 갚기 전에 꼭 심사숙고하시오."
#
강성휘가 떠나고 얼마 안 지나 공현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태의, 어찌 된 일이오?"
"폐하의 치료를 위해 의구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서창이 갑자기 들이닥쳐 수색하겠다고 했소. 폐하를 치료하는 태의임을 밝히고 수색은 안 된다고 했는데 강제로 침입하려 해서 내가 손을 썼소."
"함 소기. 누구 짓인가?"
공현의 질문에 함 소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강창휘입니다."
"유근이 올린 대학사의 자식이었나?"
"맞습니다. 칼을 뽑아 휘두르려고 해서 태의가 부득이하게 손을 썼는데, 놈이 갑자기 청신호를 올렸습니다."
"이 일은 내가 황후 마마와 태자 전하께 고해 해결할 테니, 태의는 편한 마음으로 폐하의 치료를 준비하시오. 그리고 추가로 호위 사십 명을 더 보내겠소."
"태감의 호의는 고마우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소. 아무리 깊은 잠이 들어도 누군가 침입하면 바로 깰 수 있소."
그에 공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동창에 얘기해 문화전 근처의 순찰을 강화하라 하겠소. 함 소기, 네 임무는 태의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는 일로 폐하를 치료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태를 막는 것이다. 내 뜻을 알아들었느냐?"
"목숨 걸고 모든 일을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앞날이 밝은 인재야."
서창과 동창에 치이는 금의위에서도 찬밥 신세여서 의원의 호위라는 궂은일을 맡았던 함 소기는 뜻밖의 횡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제가 실수했습니다."
빠르든 늦든 경종을 울리는 건 필연인데, 구후영은 자신이 과격한 대처를 보인 바람에 일이 이토록 커졌다고 여겼다.
"공자 탓이 아닙니다. 경종인지 뭔지 하는 걸 몰랐던 게 패착입니다."
자책하는 구후영을 단아가 위로했다. 경종만 울리지 않았다면 구후영이 시선을 제대로 끌어준 덕분에 단아와 사내는 지금쯤 남훈전에서 문을 찾아내 황궁서고로 진입했을지도 모른다.
"소녀가 바로 탈출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단아가 황궁서고로 들어갈 생각을 버리고 바로 탈출했다면 일이 이토록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내가 있어 성곽을 넘을 때 분명히 들키겠지만, 지금처럼 자금성에 갇혀 꼼짝달싹 못 하는 것보단 훨씬 나은 결과다.
"그나저나, 여기서도 구후 공자와 만났네요."
단아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려고 화제를 전환했다.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무심결에 대꾸한 구후영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단아 역시 눈동자가 왼쪽으로 굴러가는 게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근데 단 소저는 왜 황궁에 왔고, 저분은 누굽니까?"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구후영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
"배월교의 우호법입니다. 칠살문의 술수에 당한 상처가 잘 낫지 않아 순천부의 용한 의원을 찾아왔는데, 약 한 달 전에 여기 잡혀 왔습니다."
우호법은 구후영보다 먼저 황궁에 입성한 자금성 '선배'였다.
"무슨 이유입니까?"
비록 구후영이 자금성의 사정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외궁이라고 쳐도 황궁에 죄인을 가두는 건 상식이 아님을 확실히 안다.
더구나 우호법은 누가 봐도 엄청난 고초를 겪은 얼굴이었다. 그건 황궁 안에서 잔혹한 고문이 이뤄졌다는 뜻인데, 이 역시 황실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다.
"개인적인 원한입니다. 강호에 있으면 피할 수 없는 일이죠."
단아가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자 구후영도 더 캐묻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겠죠?"
황제를 치료하는 데 쓰는 의구를 점검한다는 이유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지만, 날이 바뀌어 구후영이 건청궁에 갔을 때 동창이든 서창이든 금의위든 반드시 문화전을 샅샅이 뒤집을 것이다.
"제가 일부러 소란을 일으켜 시선을 끌까요?"
동창 금의위가 문화전 주변을 계속 맴돌아 이대로는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단아와 사내가 탈출하려면 누군가가 잠깐 이목을 끌어줘야 한다.
"그럴 필요 없다. 황궁서고에 숨으면 된다."
가만히 있던 신한천이 둘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황궁서고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만 사용하는 곳이다. 실제로는 황제와 황태자의 신임을 받는 환관만 들락거리지만."
황제가 책을 보려고 서고까지 가는 일은 없다.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당연히 환관을 시켜 가져오라고 하기에, 황궁서고를 실제로 출입하는 사람은 몇몇 환관이다.
지금처럼 황제가 쓰러진 마당엔 아예 출입자가 없다고 여겨도 된다.
"황궁에 서고가 몇 갭니까?"
단아가 질문했다.
"당연히 하나고, 봉천전 지하에 있다."
"어찌 황궁을 그리 잘 아십니까?"
"내가 옛날에 어의였는데 커다란 실수를 한 바람에 단전을 폐 당하고 쫓겨났다."
대화를 듣던 구후영은 봉천전이 어딘지 떠올랐다.
"봉천전이 바로 건청궁 코앞인데, 당연히 수비가 삼엄할 겁니다."
"거기 말고도 문이 더 있다."
"남훈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단아가 다시 질문했다.
"아니. 거긴 들은 적 없다."
신한천이 말하다 말고 기침을 세게 쿨럭였다. 구후영은 찻잔을 들어 내공으로 따뜻이 덥힌 뒤 신한천에게 건넸다.
"어르신부터 약 좀 쓰셔야겠습니다."
신한천은 따뜻한 차를 마셔 목과 가슴을 안정한 뒤 탄식을 뱉었다.
"약한 약은 도움이 안 되고, 독한 약을 쓰면 맑은 정신을 유지하지 못한다. 어떻게든 이대로 폐하가 완치하실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신한천의 목소리는 유감과 후회로 점철되었다.
"내가 예전에 단약에 관한 책자를 몰래 구해드리지만 않았어도 지금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신한천은 황제가 단약을 먹고 쓰러진 일에 나름의 죄책감을 느꼈다. 치료를 거부하지 않은 것도 목숨을 걸고 책임지려는 생각이었는데, 죄 없는 구후영이 연루되자 그저 목숨으로 사죄하려던 생각을 바꿔 어떻게든 구후영만큼은 보전하려 했다.
덕분에 신한천이 떠올린 임시방편을 듣고 구후영이 영감을 얻어 완치 가능한 치료법을 찾아냈고, 신한천의 도움으로 훨씬 안전하고 가능하게 변했다.
"이게 어쩌면 폐하를 치료하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겠구나. 황궁서고로 통하는 비밀 문이 마침 문화전에 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구후영과 단아가 반색하며 동시에 되물었다.
"그래. 하늘이 돕는 거지."
단아와 우호법을 숨겨준 게 들키면 구후영은 역적이 된다. 역적에게 황제의 치료를 맡길 순 없으니 다른 사람이 구후영의 역할을 대신해야 하는데, 현재 중원 천지에 침술과 기공 치료가 동시에 가능한 의원이 신한천이 알기론 없다.
있다고 쳐도 실력이 구후영과 비교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이대로 흐르면 구후영은 역적으로 몰리고 황제는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아 빠르든 늦든 죽는 게 기정사실인데, 황궁서고로 통하는 비밀 문이 마침 문화전에 있고, 신한천이 문의 위치와 여는 방법 모두 알고 있다.
신한천은 이를 황제를 구하라는 하늘의 계시라고 여겼다.
"문이 어딨습니까?"
차 한 모금 더 마신 신한천이 문의 위치와 여닫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덕분에 방의 분위기가 더없이 밝아졌다.
"숨기 전에 우호법부터 치료하는 게 어떻습니까? 외상을 보면 속도 크게 상했을 것 같습니다."
"괜찮소. 난 치료하지 않아도 되오."
왠지 익숙한 목소리에 구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소?"
"아니오. 절대 없소."
우호법이 단호한 말투로 부정했다.
- 작가의말
천의망망 - 하늘의 뜻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네요. 방심하다가 감기 걸리지 않게 다들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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