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불혈인兵不血刃
인생득의수진환人生得意須盡歡
인생에 뜻을 이룰 땐 마음껏 즐겨야 할지니,
막사금준공대월莫使金樽空對月
텅 빈 술통이 외로이 달과 벗하게 하지 마시라.
천생아재필유용天生我材必有用
하늘이 나 같은 재목도 쓸모 있다고 여겨 내렸을 테니,
천금산진환복래千金散盡還復來
천금을 쓴다 한들 모두 다시 돌아오리라.
"날씨가 더럽게 맑네."
담청산이 투덜거렸다.
"낙화문이 뭐라고 트집을 잡으면 제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 테니, 형님께선 절대 나서지 마십시오."
장인호가 말했다.
'사람은 괜찮은데.'
담청산은 장인호를 보며 아쉬움이 들었다.
'그릇이 너무 작다.'
"인호야.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뭡니까?"
"난 용호표국의 표국주고 북방 표국 연합의 맹주기도 하다. 그런 내가 네 뒤에 숨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느냐."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다. 너도 다 날 생각해서 그런 건데. 그나저나, 일이 어쩌다 이렇게 꼬였을까."
담청산의 탄식에 장인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 내가 못난 탓이다.'
장인호와 구후영이 처음 만난 건 약 십 년 전이다.
그날, 임초현이 구후영을 데려와서 낙화문의 대제자로 삼겠다며 억지를 부렸고, 반대하는 사제들을 향해 검을 뽑기까지 했다.
그 기억 때문에 장인호는 구후영에게 커다란 경쟁심을 품었으나, 상대의 재능은 정말로 뛰어났다.
구후영은 고작 열두 살 때 이미 순수한 검술론 임초현의 다음 자리를 차지했다.
게다가 모르는 글자가 없고 의술도 뛰어나 모두가 칭찬이 자자했다.
'그냥 잘난 놈이 아니었는데, 내가 보는 눈이 없었지.'
만약 구후영이 홍엽산장의 핏줄임을 일찍 알았다면 장인호는 언감생심 질투할 생각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인호야. 네가 날 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일지봉에 가면 가만히 있어라. 사고도 치지 말고, 괜히 잘 보이려고 하지도 말아라. 그저 낙화문과 아무런 사이도 아닌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대화하는 사이, 둘은 어느새 일지봉 자락에 도착했다.
'이 길이 이렇게 짧았던가?'
예전에 목마하까지 가서 물을 길어올 땐 중턱까지 가는 길이 그리도 멀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그때 굳이 낙화문을 나오지 않았다면.'
용호표국의 사위가 된 건 후회되지 않는다. 아내는 애지중지 자란 바람에 제멋대로긴 하나, 장인호를 위하는 마음이 얕지 않았다.
게다가 담진웅의 절기인 용행호보권을 전수하였고, 담청산 역시 장인호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가르쳤다.
'그러면 훨씬 좋았을 것을.'
장인호는 용호표국의 식구가 되며 안계가 넓어진 덕분에 사부와 사숙들이 얼마나 미련한지 깨닫게 됐다.
'예전엔 유저가 미련하다고 비웃었는데.'
예전의 구후영은 맨날 성현의 말씀을 입에 달고 살며 손해 보는 걸 당연히 여겼다. 그런 구후영이 늘 우스웠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조금 힘들더라도 바르게 살았으면 지금 훨씬 즐거웠을 것 같았다.
"청첩을 보여주시겠소?"
중턱에 도착하자 등에 짧은 창 한 자루를 멘 사내가 둘을 맞이했다. 말투를 들어보니 산서 사람은 아니고, 호북이나 사천 쪽 사람으로 여겨졌다.
"용호표국 표국주 담청산과 표두 장인호요."
청첩을 확인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공을 실어 외쳤다.
"용호표국 표국주 담청산 일행 두 명이오."
'절정이다.'
담청산과 장인호가 동시에 몸을 흠칫 떨었다. 소림이나 무당에 가면 발에 챈다곤 하나, 산서에선 절정에 이른 무인을 만나기가 꽤 어려운 편이다.
"대문으로 가면 알아서 자리까지 안내할 거요."
"수고하시오."
담청산과 장인호는 짐짓 태연한 기색으로 대문으로 걸어갔다.
"용호표국에서 오신 귀빈 맞습니까?"
대문 앞에서 열 살 정도의 아이가 둘을 맞이했다.
"그래."
"절 따르시지요."
'많이도 왔구나.'
아이를 따라 연무장의 문턱을 넘으니 이미 육십 명은 되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시종으로 보이는 자는 손님보다 더 많았다.
'시종만 해도 백 명이 넘는구나. 왕가장의 시종이 고작 삼십 명 정도인데, 어디서 사람을 구했지?'
용호표국도 큰 잔치를 벌일 때 여기저기서 시종으로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게 늘 걱정이다. 그런데 이제 두각을 드러낸 지 일 년 정도밖에 안 되는 낙화문이 무슨 수완으로 이리도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가 담청산은 너무나 궁금했다.
그때.
"오랜만이오. 별래무양하셨소."
수수한 푸른 화복華服을 입은 구후영이 다가와 둘에게 인사했다.
"구후 장문의 생신을 축하하오. 주변이 태평하고 하는 일마다 순조롭길 바라오."
"고맙소. 담 표국주도 사업이 번창하시오."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구후영은 다른 사람과 인사하러 떠났다.
"손님, 마저 자리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형님의 말이 저런 뜻이었구나.'
장인호는 낙화문과 아무 사이도 아닌 척하라던 담청산의 당부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는데, 구후영의 모습을 보니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상석이 꽤 비었구나.'
감회가 깊은 장인호와 달리, 담청산은 주변을 살피느라 바빴다.
'오늘은 또 어떤 자들이 올까?'
공형선과 연무쌍, 소림 방장의 사제라는 젊은 스님, 신검 풍불지. 거기에 지난해 십이월에 낙화문을 찾았던 신창.
'기왕 이렇게 된 거 고수 구경이나 실컷 했으면 좋겠다.'
아이가 안내한 자리에 앉으니 술과 간단한 마른안주가 있었다. 담청산과 장인호는 술과 안주로 심심한 입을 달래며 손님들의 면면을 살폈다.
대부분 아는 얼굴이었다.
그때.
"낙화문 장문의 생신연에 와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오."
비단옷을 입은 임초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손님들이 잡담을 멈추고 임초현을 주시했다.
"구후 장문은 곧 옷을 갈아입고 나올 거요. 그전에 먼저 이 자리를 빌려 용호표국의 담 표국주께 감사를 표하고 싶소."
이름을 불린 담청산은 영문도 모른 채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다들 아시겠지만, 낙화문의 장문이 이번에 황제 폐하를 치료하여 큰 공을 세웠고, 폐하께서 낙화문의 공을 치하하여 저리 편액을 내리셨소."
연무장 북쪽의 건물엔 전화낙 춘수류의 문구를 새긴 커다란 석조 편액이 걸려 있었다.
"우리도 최근에 알았는데, 폐하의 치료에 낙화문 장문을 추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게 용호표국이었소."
임초현의 말에 손님들이 크게 술렁였다.
"그 과정에 꽤 큰 돈을 썼다고 들었소. 오늘 이 자리에서 용호표국의 노고에 감사하며, 낙화문을 위해 쓴 돈을 우선 보상하겠소."
말을 마친 임초현이 눈짓하자 시종 둘이 나무 상자를 옮겨 담청산 앞에 놨다.
"열어보시오."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담청산도 어쩔 수 없이 뚜껑을 열었다.
"은자 천 냥이오."
상자 안엔 전표 말고 오십 냥짜리 은원보가 스무 개 들었다.
"이후 용호표국의 일이 곧 낙화문의 일이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입을 여시오."
'잘됐구나.'
장인호는 낙화문과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용호표국이 손해를 본 게 모두 자기 탓 같았는데, 이리도 극적으로 화해하니 속으로 너무 기뻤다.
'좃됐구나.'
단순한 장인호와 달리, 담청산은 커다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진퇴양난이다.'
멍청한 자들은 장인호처럼 그저 용호표국이 낙화문을 도왔다고 여긴다.
여기서 문제는, 용호표국이 낙화문에 잘 보이기 위해 은자 천 냥이나 써가며 애를 쓴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대로는 그간 담진웅이 힘들게 만들고 유지한 산서 연합이 단숨에 낙화문 밑으로 들어가게 생겼다.
똑똑한 자들은 당연히 용호표국의 진정한 용의가 구후영을 해치려는 것임을 알 테니, 자연스럽게 용호표국과 거리를 둔다.
용호표국의 마음 씀씀이가 악독한 건 둘째 치고, 실질적으로 낙화문과 용호표국이 물과 불처럼 어울리기 힘든 사이가 됐음을 아는 게 크다.
'아니라고 하면 비웃음까지 당하겠지.'
빠르게 고민을 마친 담청산이 짐짓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간 표국 연합의 일로 바빠서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소. 낙화문의 태상장문이 없는 소릴 하진 않았을 테니 이 은자는 일단 받고, 돌아가서 조부께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알아보고 돌려드리든지 하겠소."
"담 표국주는 낙화문을 도운 게 용호표국이 아닌 산서 연합의 뜻이었단 거요?"
'저자도 만만치 않은데 내가 방심했구나.'
그제야 담청산은 너무 구후영만 염두에 둔 바람에 임초현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오."
"용호표국의 뜻이든 표국 연합의 뜻이든 산서 연합의 뜻이든 어떻소. 낙화문이 용호표국의 도움 덕분에 크게 도약했다는 게 중요하지."
그때, 환복을 끝낸 구후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로의 손님들은 조금 늦는 것 같으니 이만 연회를 시작하겠소."
내공이 실린 구후영의 목소리가 연무장 구석구석에 울렸다.
"술과 음식을 올려라."
구후영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수십 명의 시종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기존의 술과 안주를 치우고 새 술과 술잔 그리고 풍성한 음식을 운반했다.
그러나 손님들은 구후영의 모습을 구경하느라 술과 음식이 오르는지 마는지 관심이 없었다.
'저게 소문으로만 듣던 망포인가?'
붉은 비단으로 만든 망포를 입은 구후영은 무표정하게 있어도 절로 위엄이 배어 나왔다. 정식 관리가 아니어서 옥대玉帶를 차지 않았는데, 덕분에 거추장스러운 망포를 입고도 단단하고 날렵한 느낌이 살아 있었다.
'일부러 대화를 끊으려고 지금 등장한 거겠지?'
담청산은 차라리 용호표국이 한 거라고 솔직히 인정하는 게 나았다. 이젠 용호표국뿐이 아니라 표국 연합과 산서 연합까지 연루되었다.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사람을 궁지에 모는구나.'
담청산이 자신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는 사이, 시종들이 음식을 다 올렸다.
그에 구후영이 내공을 실어 말했다.
"첫 잔은 내가 따를 테니, 다들 잔을 앞으로 미시오."
손님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킨 대로 했다.
"한 분씩 일일이 따르고 싶으나 술 생각이 간절하여 실례하겠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앞에 놓인 커다란 술독을 손바닥을 툭 쳤다.
"허!"
한 줄기 술이 독에서 나와 상 위에 놓인 잔 안에 쏙 들어갔다. 살짝 찰랑이며 술이 조금 밖으로 흘렀으나, 그걸 탓할 정신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
구후영이 손을 바꿔 한 번 더 때리자 이번엔 두 줄기 술이 허공을 날아 두 개의 잔 안에 안착했다.
"허!"
다음은 세 줄기 술이 세 개의 잔에 정확히 들어갔다.
탁. 탁. 탁.
구후영이 독을 때릴 때마다 술이 한 줄기씩 늘었다.
"아!"
일곱 줄기에서 더 늘지 않자 손님들이 아쉬운 얼굴로 탄식을 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수십 개 잔에 모두 술이 가득 찼다.
"자, 이만 연회를 시작하겠소. 귀한 걸음을 한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주인 된 몸으로 먼저 마셔서 경의를 표하겠소."
말을 마친 구후영이 양손을 술독에 대자 한 줄기 술이 솟구쳐 입으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붉은 구름을 몸에 휘감은 용이 지상의 물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작년엔 검룡이었는데 올해는 주룡酒龍이구나."
임초현이 껄껄거렸다.
- 작가의말
병불혈인 - 병사의 칼에 피 하나 안 묻히고 이기다.
무혈입성과 같은 말입니다. 단, 무혈입성은 점령의 의미가 강하고, 병불혈인은 이겼다는 의미가 강해서 이번 편은 병불혈인이 어울립니다.
오늘의 백미는 당연히 ‘천생아재필유용’입니다. 하늘이 소년과 청년을 끝내 아재로 만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고 쓸모가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 아재임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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