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기공先天氣功
최대로 따져 이천 년이 넘은 무림의 기나긴 역사에서 대종사로 불린 사람은 겨우 셋이다.
첫 번째는 달마로, 소림에 역근경易筋經과 세수경洗髓經을 전해 칠십이절기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서역인인데다가 역근경과 세수경을 직접 창안한 게 아니어서 인정하지 않는 자도 적잖이 있었다.
드물게 이 자리에 달마 대신 법여를 넣는 사람도 있는데, 대부분 무인이 칠십이 개나 되는 절기를 법여 혼자서 만들었을 리 없으니 자파의 위상을 높이려고 소림이 꾸며낸 이야기가 분명하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세 번째는 장삼풍으로, 이유극강의 화두를 잡고 기초부터 상승까지 이르는 일련의 무공을 체계적으로 만든 데다가 무당이란 문파를 소림에 버금가게 키웠다. 강호에 칭송이 자자하며 근대의 인물인 덕분에 대부분이 무학의 대종사로 인정한다.
두 번째는 왕중양인데, 달마와 비슷한 논란이 있다.
종남에 전해지는 무공 대부분은 왕중양의 일곱 제자인 전진칠자全眞七子가 창안한 것이고, 왕중양은 고수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강호에 확실한 발자취를 남긴 적 없다.
기억에 남을 만한 대결이 없는 건 달마도 마찬가지지만, 역근경과 세수경은 소림의 역대 고승들이 입 모아 찬양한 무공인 데 반해 왕중양은 둘과 비견하는 무공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강호인들이 모른다고 왕중양이 무학의 대종사가 아닌 건 아니다. 비록 혼자서만 익혀낸 탓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왕중양은 선천기공을 창안해 후대에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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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도인이 불쑥 질문했다.
"구후 소협은 천강구절의 제자요?"
노도인은 원경의 환속 여부가 진짜 궁금했던 게 아니라 백팔나한진을 통해 천마를 언급하고, 구후영이 천마의 제자라는 소문이 진짜인지 확인하고픈 마음이었다.
"헛소문이오."
구후영은 고민도 하지 않고 단칼에 부정했다.
"그것참 이상하군. 현재 구후 장문의 모습은 기록에 적힌 왕중양 조사 그리고 내 눈으로 직접 본 천강구절과 너무 비슷하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소?"
흥미로운 화제에 옥무영이 눈을 반짝였다.
"도가에선 오기조원五氣朝元과 삼화취정三花聚頂의 두 경지를 매우 높이 평가하오."
이 두 경지는 무공의 강함과 필연적인 연계가 없다.
오기조원은 육신의 오행이 조화하는 경지로, 이를 이루면 크고 작은 병이 몸에 침범하지 못하고 쉽게 지치지 않는다.
삼화취정은 십이경맥은 물론 기경팔맥까지 막힘없어야 이룰 수 있는 경진데, 이는 탯줄을 자르기 전의 태아와 같은 상태다. 육신의 수련만으론 어렵고 태식胎息을 깨달아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왕중양 조사께서 선천기공을 수련해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이루기 전에 구후 장주와 비슷한 상태였소."
"그러니까 내 사제가 선천공을 수련한 상태란 말이오?"
옥무영의 말에 노도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런데 선천기공은 왕중양 조사를 뺀 아무도 익혀내지 못했고, 현재 수련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소. 그래서 당연히 천강구절의 제자라고 생각한 거요. 소림에서 천강구절의 명호를 얻기 직전에 저런 모습을 하고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이루려고 여길 찾아온 적이 있소."
노도인의 말을 듣던 구후영은 문득 공청석유가 떠올랐다.
'공청석유가 대단한 영약이라고만 들었지 구체적인 효용은 몰랐는데, 어쩌면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이루게 도와주는 용도가 아닐까.'
구후영의 추측이 맞는다면 공청석유의 기운을 흡수하고도 내공이 별로 늘지 않은 것과 체력을 비롯해 신체 기능 대부분이 강화된 걸 해석할 수 있다.
구후영은 갑갑하던 속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다음 단계엔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이뤄야 한단 말이구나.'
태극혜검 덕분에 숲속의 오솔길을 벗어나 광활한 평야로 진출한 구후영이고, 시야가 확 트인 덕분에 목적지를 명확히 인지하기도 했지만, 정작 방향만 알고 뭘 위해 달려야 하는지 몰라서 막막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노도인 덕분에 다음 단계를 확인하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무당에 왔을 때 천강구절이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이미 이룬 후라던데, 종남의 선천기공을 익힌 거요?"
옥무영이 무당에서 얻어들은 기억을 떠올리며 노도인에게 질문했다.
"아니오. 금나라와 요나라 황실 혈통이 전진교 장교 자리를 차지하면서 전승이 끊긴 지 오래오."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을 어떻게 이루는지 알려줄 선천기공의 전승이 끊겼다는 말에 구후영은 아쉬움이 드는 동시에 오기가 치밀었다.
'방법을 모르면 또 어때.'
왕중양은 도교 경전을 공부하다가 깨달음을 얻어 선천기공과 칠성진을 만들었다. 장삼풍은 비록 화룡진인이란 사부가 있으나, 본인 역량으로 완전히 다른 무공을 창안했다.
구후영은 감히 두 대종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엄두는 안 나지만, 오기조원과 삼화취정의 경지를 이루는 것에 관해 큰 우려는 없었다.
아무래도 황궁부터 소림까지 세상과 강호의 갖은 풍파를 겪은 덕에 원체 단단하던 마음이 한결 견고해진 느낌이었다.
'알고 했건 모르고 했건 직전까지 왔잖아.'
게다가 구후영은 막연한 자신감이 아니었다. 확신까진 아니지만, 자신이 왜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상태다.
'오기조원은 황제 덕분이고.'
황궁에서 치료할 때 구후영은 황제의 기운을 자기 몸에서 돌린 다음 돌려주는 방식을 취했다. 사실 경맥을 따라 운기하는 것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걸 떠올리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시도였지만, 공청석유로 체질이 개선된 덕분인지 구후영의 운기 재능이 불세출이어선지, 보란 듯이 성공했고 구후영을 오기조원의 문턱까지 데려왔다.
'삼화취정은 백팔나한진 덕분이겠지.'
백팔나한진을 상대하며 구후영은 용천혈로도 모자라 머리의 혈도까지 동원해 자기 몸에 들어온 기운을 밖으로 내보냈다.
인간은 입으로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기관도 따로 있다. 호흡 역시 코와 입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기운을 이러한 기관들이 아닌 혈도로 내보내며 태식의 반을 이뤘다. 남은 건 호흡이나 음식 섭취가 아닌 방식으로 기운을 몸에 끌어들이는 건데, 백팔나한진을 상대하고 나서 잠시나마 그러한 일을 겪었었다.
방법은 모르지만, 열심히 수련하다 보면 분명히 길이 보일 거라고 구후영은 자신했다.
'그러나 삼화취정과 오기조원을 이뤄도 강호는 못 이기겠지.'
소림의 일을 겪기 전까지만 해도 구후영은 희망찬 나날을 보냈다. 유근을 죽여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복수만 하면 단아와 혼인하고 강호에서 한 발 떨어져 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생각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었는지 처절히 느꼈다.
'누가 왔다.'
자신만의 생각에 푹 빠져있던 구후영은 기척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반 호흡 늦게 옥무영도 고개를 돌렸고, 원경은 두 호흡 정도 늦었다.
정작 싸우면 금강인을 얻은 원경이 제일 강할 텐데, 경지는 오히려 구후영이 가장 높았다.
"하하. 대단하군."
종남 무인은 경공에 무척이나 자신 있었는데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기척을 들키자 감탄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구후 장문, 오랜만이오."
객청에 들어선 무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셋을 빠르게 훑곤 구후영을 향해 포권했다.
"반갑소. 백옥봉에서 뵐 때보다 풍채가 나아진 것 같소."
구후영도 당시 종남을 대표해 자신을 편들었던 사내를 기억해내고 반갑게 인사했다.
"구후 장문은 그때도 대단했는데 지금은 괄목상대해야 할 지경이요."
구후영과 덕담을 주고받은 사내가 노도인을 향해 말했다.
"사숙, 술 좀 꺼내시죠. 대화 한 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어깨 나란히 싸운 종남의 전우입니다. 하하."
사내의 말에 노도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중요한 일로 찾아왔는데 술 마시고 노닥거릴 시간이 어딨어."
그에 사내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나는 종남의 장로 막불손이라고 하오. 구후 장문 일행이면 범부는 아닐 텐데, 소개 부탁하오."
'재밌는 이름이군.'
불손不遜은 버릇없고 겸손하지 못함을 뜻하는데, 성이 막莫이어서 불손하지 말라는 좋은 뜻으로 바뀌었다.
"풍옥문 소문주 옥무영이오. 최근에 탈각脫殼했소."
"막 모가 옥 대협의 득공을 축하하오. 풍옥문의 옥 씨면 우리 종남과도 남남이 아니니 대단히 반갑소."
옥무영과도 인사를 마친 막불손이 원경한테 눈길을 줬다.
"환속승 원경이오."
막불손 역시 노도인처럼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대가 공유대사의 제자요?"
"맞소."
"공유대사께서 원적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진실이오?"
"세수歲數(나이)가 다해 원적하셨소."
원경의 말에 막불손이 애석한 얼굴로 탄식했다.
"세상에 부처 한 분이 줄었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타까움을 표시하던 막불손이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방금 환속승이라고 했소?"
원경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백팔나한진이야 상황에 따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십팔동인진은 어떻게 통과한 거요?"
원경이 대답을 망설이며 옥무영의 눈치를 봤다.
그에 옥무영이 고개를 끄덕여 솔직히 얘기하라고 신호를 줬다.
"소림의 칠십이절기 중 반 이상이 사라졌고, 남은 것 중에서 또 반 이상은 너무 고쳐서 본래 모습을 잃었소. 그러고 남은 열 개 조금 넘은 절기 중 하나를 끝까지 익히면 십팔동인진에서 길을 볼 수 있소."
"칠십이절기는 서로 연관성이 강해서 한두 개만 익혀선 끝을 보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맞는 얘기요. 현재 소림 기준 말고 내 사부의 기준으로 난 칠십이절기에서 일곱 개를 익혔소."
원경의 솔직한 대답에 노도인과 막불손은 물론, 구후영과 옥무영도 깜짝 놀랐다. 원경이 금강인을 얻었다는 얘기만 듣고 구체적으로 캐묻지 않았기에 둘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현재 소림 기준으론 스무 개가 넘겠군."
'칠십이'라는 숫자를 채우려고 소림이 하나의 무공을 여럿으로 쪼갠 걸 생각하면 막불손의 추측은 꽤 합리적이었다.
"아마 그럴 거요."
'현현자와 내공 대결을 벌이고도 멀쩡한 구후영. 육전신공을 익혀 탈각한 풍옥문 소문주. 칠십이절기를 다수 익히고 십팔동인진을 통과한 환속승.'
속으로 한참 저울질한 막불손이 속내를 완전히 감추고 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못난 모습을 보였군. 너무 놀라서 말을 잃었소."
"막 장로께서도 종남의 절기인 옥현신공玉玄神功을 대성한 듯한데 너무 겸손한 거 아니오?"
옥무영의 말에 막불손이 하하 웃었다.
"자랑하고 싶지만, 이름이 막불손이라."
막불손의 농에 노도인을 포함해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세 분이 여길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오?"
막불손이 사람 편하게 하는 얼굴로 질문했다.
"여기 원경 아우의 모친이 건강이 안 좋은데, 약재로 천산에 나는 칠 년근 설련이 필요하오. 그게 종남에 있다고 들어서 염치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소."
옥무영의 말을 들은 막불손이 노도인과 눈빛을 교환했다.
"어려운 부탁이군."
"가격은 넉넉히 쳐 드리겠소."
옥무영의 말에 막불손이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아꼈다.
- 작가의말
드라마 보면서 가끔 시원하게 얘기했으면 싶은데 모든 등장인물이 스무고개 하면서 오해를 키우는 장면에 복장이 터졌는데, 개연성이 부족하다기보단 연출이 어설펐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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