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공섭물隔空攝物
자백산은 이름이 무색하게 산 전체가 키 낮은 관목으로 뒤덮였다.
갈색 관목들이 빛을 받으면 자색으로 보이기도 하기에 '자'가 왜 붙었는지는 이해 가지만, 측백나무 한 그루 없어 '백'자가 붙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것 때문인가?"
그러나 거대한 지하 건물을 본 구후영은 그 이유를 대개 짐작할 수 있었다.
황궁서고보다 작으나 구조는 오히려 훨씬 복잡한 칠살문의 지하 건물은 온통 측백나무였다.
기둥부터 탁자와 의자까지 모두.
"형님, 여기요."
앳된 얼굴에 하얀 도복을 입은 소년이 구후영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소년의 곁에는 밖에서 안 보이던 자들이 전부 있었다.
"여기. 여기가 문서 모아둔 밀실이에요."
소년 도사는 모산파의 장문인 귀연歸然이었다. 몇 년 전 사부가 죽고 고작 열세 살의 나이에 환갑에 가까운 사형들을 제치고 모산파의 오십육 대 장문이 되었고 구후영과는 천산 귀검동에서 만났다.
동창의 음모로 귀검이 강호에 풀렸고, 한바탕 혈풍이 불었다.
소림은 봉문했고 무당은 태극혜검의 깨달음으로 바뀐 무공을 수련하느라 정신이 없고, 화산은 몰락했고 종남은 화산보다 더 처참했다.
물론, 종남의 알맹이는 청성으로 거듭났지만.
거기에 동창과 금의위가 부채질하고 하오문과 칠살문이 암중에서 수작질하여 강호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뒤숭숭한 시기에 장문이 된 귀연은 사형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풍애협에 가서 귀검동을 봉인하려 했고, 때마침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구후영과 만났다.
둘은 쇳물을 부어 열쇠 구멍을 아예 막아버린 것으로도 모자라서 여러 개 진법을 만들어 혼선을 줬다.
진법들이 가리려 한 곳들은 문을 여는 것과 전혀 무관하기에, 누군가가 귀검을 들고 귀검동을 찾아냈다고 해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인연으로 구후영이 무림수호맹을 만들기로 했을 때 제일 처음 귀연을 떠올렸고, 덕분에 귀연은 대부분 맹원들보다 '선배'였다.
"왜 안 들어가고?"
구후영의 말에 귀연이 고개를 저었다.
"안 들어간 게 아니라 못 들어간 거예요."
밀실 근처에는 수십 구의 주검이 널려있었는데, 대부분 현월궁 막내 궁주의 솜씨로 보였다.
"진법, 기관에 화약까지."
귀연이 겨우 떼어낸 문짝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아니었으면 문 열다가 한둘이 죽었을걸요."
문짝에는 의미 모를 기괴한 문양이 있었고, 기관의 일부로 보이는 가는 실이 있었고, 조금은 조잡해 보이는 폭발물도 있었다.
"잘했어."
칭찬을 마친 구후영이 안을 들여다봤다.
귀연의 말대로 안은 진법과 기관으로 도배됐다.
"거의 속임수겠지?"
"그럼요. 저건 눈 가리는 수법이고, 진짜 진법과 기관은 숨겨져 있죠."
"해법은?"
"없어요."
귀연의 말에 구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연은 어린 만큼 경험은 부족하나, 경험 따위를 무시할 정도로 재능이 넘쳤다. 그런 귀연이 해법이 없다고 하면 진짜 없는 것이다.
"원래 여기에 기관이 있어요. 줄에 달린 갈고리를 통해 문서를 넣고 빼는 그저 그런 기관이죠. 그런데 문을 떼면서 선을 몇 개 자른 바람에 그 기관이 망가졌어요."
그에 청의방 방주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다 내 탓이오. 내가 성급하게 문을 열려고 한 바람에."
구후영은 청의방주를 향해 괜찮다고 한 다음, 귀연에게 질문했다.
"내가 허공답보로 들어가면?"
"기관이 발동하면서 화약에 불이 붙을 것이고, 사람은 무사해도 저 종이들은 다 타겠죠."
"맹주, 진짜 허공답보가 되는 거요?"
궁금증이 도진 청의방주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진정한 허공답보는 아니고, 편법일 뿐이오. 허공에서 약 열두 걸음 정도 걸을 수 있소. 방향 전환은 아직 안 되고."
흑철이 자신의 흑포를 이용해 운룡대구식을 외형이나마 구현했던 걸 참조하여 구후영도 허공답보를 해냈다.
그러나 흑철의 것이 운룡대구식과 전혀 무관한 꼼수였던 것처럼, 구후영의 것 역시 진정한 허공답보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즉, 지금의 가짜 허공답보를 백 년 수련해도 진정한 허공답보를 익혀낼 수 없다.
"아쉽군."
개방의 무공은 전부 실전됐다.
죽개방이 타구봉법의 외형을 삼 할 정도 전승하고 있으나 초식을 비슷하게 베낀 것밖에 안 되었고, 청의방이 유룡신법遊龍身法의 구결을 이어가고 있으나 아무도 익혀내지 못했다.
유룡신법은 운룡대구식 다음으로 허공답보에 근접한 경공으로, 청의방주는 혹시 허공답보의 깨달음을 알면 지금은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를 구결들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잠깐 기대를 품었었는데 구후영의 대답에 더없이 실망했다.
"혹시 암기로 문서를 묶은 끈들을 자를 수 있소?"
잠깐 고민한 구후영이 현월궁 궁주한테 질문했다.
"조금 어렵긴 하지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하나 끊어주시오."
구후영의 부탁에 막내 궁주가 비수의 날을 닮은 암기 하나를 꺼내서 실로 묶은 다음, 신중하게 던졌다.
삭.
깔끔한 절삭음과 함께 문서들을 한데 묶은 끈이 끊어졌고, 암기는 실을 당김에 따라갔던 경로 그대로 돌아오며 진법이나 기관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
문서는 종이 묶음이다. 그러나 그저 종이를 묶은 게 아니라 가죽으로 된 표지가 있었다.
문제는 책등 쪽은 단단하여 꽤 넓은 대신 모서리 쪽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끈이 끊어지자 네모반듯하지 못한 책자들이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떨어지려 했다.
그때.
구후영의 몸에서 강한 바람에 흘러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책을 콱 잡았다.
"격공섭물!"
청의방주가 경악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귀연이나 막내 궁주처럼 무림수호맹 초기부터 구후영과 함께 해온 사람들은 몇 번 봤던 모습이지만, 가입한 지 일 년이 안 되는 청의방주로선 처음 보는 광경인 탓이었다.
"이것도 진짜는 아니요."
쇄악곡에서 정학의 두 사형이 문을 여닫았던 것처럼, 진짜 격공섭물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기운을 손가락처럼 쓴 것뿐이었다.
단, 진짜 격공섭물이 아니라서 쉽게 해낸 건 또 아니었다.
"잠깐 쉬고 계속하지."
#
뭐든 자주 하면 늘기 마련이다.
아미나 곤륜에 비견할 만한 오랜 세력인 칠살문인지라 문서의 양이 어마어마했지만, 경험이 쌓이고 요령이 생기면서 구후영의 속도도 빨라진 덕분에 하루가 안 걸려 모든 문서를 밖으로 꺼냈다.
거기에 뒤늦게 지원을 온 현월궁과 낙화문 제자들이 가세한 덕분에 그저 널린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종이들도 전부 밖으로 옮길 수 있었다.
"형님, 여기!"
글을 아는 사람들은 문서를 읽으면서 중요도에 따라 분류했다.
내용이 이해되면 중요도 하.
문장이 말이 되는 듯 안 되는 듯하면 중요도 중.
아예 문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중요도 상.
하는 마차에 실어 구후영 편에 선 하오문에 맡겨 분석하게 하고, 중은 현월궁이 맡아 해독하고, 상은 어차피 암호문을 풀 수 없기에 음산의 현월궁 궁전에 갖다 보관한다.
그렇게 대부분 사람이 문서 분류에 힘쓸 때, 가만히 앉아 못 있는 귀연과 글 모르는 몇몇이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구후영을 불렀다.
"중요한 거야?"
구후영이 문서에서 눈을 안 뗀 채 말했다.
"여기 문이 있어요."
구후영은 읽던 문서를 놓고 귀연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감옥 같죠?"
비록 온갖 기관과 진법에 화약까지 해서 방비했다지만, 지하 밀실의 문도 측백나무로 짠 거였다.
그런데 귀연이 엉뚱한 곳에서 발견한 문은 딱 봐도 무겁고 단단한 철로 만들었다.
"진법이나 기관은?"
귀연이 머리를 저어 대답을 대신했다.
"혹시 철편이 튈지 모르니까 좀 떨어져 주시오."
구후영의 말에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하나같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 채 구후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담으려 애썼다.
흡!
크게 들이켠 숨을 꾹 멈춘 구후영이 검을 휘둘렀다.
일말의 변화도 없이 시원하게 휘둘러진 검이 철문을 깔끔하게 반으로 잘랐다.
푸하.
숨죽이고 지켜보던 자들이 하나같이 숨을 토해냈다.
지금은 무공에 대한 이해나 힘을 사용하는 수준의 차이가 커서 별 도움이 안 되지만, 이들의 경지가 자신의 재능 한계까지 갔을 때 크든 작든 뭔가 보탬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누구도 구후영의 일검에서 느낀 게 없다고 실망하진 않았다.
"자자. 안에 또 무슨 보물이 있을까요."
유독 무공에 관심이 전혀 없는 귀연만 신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서 문을 치우기를 재촉했다.
구후영은 손바닥에 문에 댄 다음 흠력을 발생해 철문을 그대로 당겼다.
텅!
분명히 뭔가 조치해둔 게 있었겠지만, 반으로 잘린 지금은 그저 구후영의 힘에 속절없이 뜯길 뿐이었다.
"내가 신호를 주면 들어와."
괜히 들뜬 귀연이 까불다가 다칠 것을 염려한 구후영이 신신당부했다. 전에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던 귀연이기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냄새가 고약하군.'
문을 얼마나 정성들여 만들었는지 냄새마저 안 샜던 듯했다. 덕분에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안으로 발을 들인 구후영은 역한 냄새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뭔가 분명히 있겠지?'
칠살문은 자객 조직이다. 그것도 천 년이 넘을 거로 추정하는 오랜 비밀 조직이다.
아무리 조직에 멍청이들만 있다고 해도 천년의 세월이 퇴적되면 무시할 수 없다.
그간 상대해온 칠살문은 인간인가 싶은 정도로 합리적이고 절제적이며 효율적이었다.
그렇기에 이리도 공들여 지은 건물이 시시한 용도로 쓰일 일은 없을 것이다.
과연.
좁은 복도를 지나 눅눅한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 적지 않은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후영은 기척을 죽인 채 가만히 서서 청각에 귀를 기울였다.
기침 소리.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 뒤척이면서 짚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간간이 섞인 욕지거리.
구후영이 들은 온갖 소리 중엔 칠살문의 자객이나 감옥을 지키는 옥지기의 기척은 없는 듯했다.
그러나 신중히 처리하자는 생각에 구후영은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자신이 들은 기척들의 몰골을 일일이 확인했다.
현월궁에서 배운 은신술 덕분에 대놓고 걷는 데도 쇠사슬에 양쪽 발목을 묶인 죄수들은 구후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형님?"
구후영은 그간 수많은 일을 겪은 덕분에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져도 태연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감옥 끝의 마지막 죄수를 확인하는 순간,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응?"
해진 도복을 입고 짚 더미 위에서 뒹굴뒹굴하던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깜짝 놀라서 입을 열긴 했으나 구후영이 은신술을 풀지 않은 탓에 사내의 감각을 미묘하게 비껴간 탓이었다.
"형님, 접니다."
뒤늦게야 기척을 푼 구후영을 발견한 사내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네가 여길 어떻게?"
그때, 곁의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구후영에게 말을 걸었다.
"구명지은에 대해 제대로 인사한 적 없었군. 그때 살려줘서 고맙소."
"누구신지?"
"나? 혈교룡이요. 홍엽산장에서 대협이 해독해주지 않았소."
그제야 구후영은 예전에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청빈이 혈교룡과 함께 악인들을 벌하고 다닌다던 그 말이.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