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부. 진우정(陳友定) 처형
1368년 1월 21일(壬辰), 호미[胡美=호정서(胡廷瑞 ?~1384)]가 건녕(建寧)을 함락했다.
*건녕(建寧) : 복건성 남평시 서부의 산명시 서북부 소속 건녕현.
*호미(胡美)는 앞서 진우정에게 패해 죽은 호심(胡深 1313~1365)과는 다른 인물.
1월 29일, 탕화(湯和)가 연평부(延平府)를 함락했다. 참지정사 문수해아(文殊海牙) 등이 항복했다.
*연평부(延平府) : 남평시 중심 연평구.
탕화가 연평(延平)을 함락하고, 복건성(福建省)과 대만(타이완 섬)을 지켰던 평장정사 진우정(陳友定)을 격파한 뒤 그를 사로잡아 압송시킨 뒤 응천(남경)에서 처형했다.
복건(福建)이 평정되었다.
1368년 1월 29일, 등유(鄧愈)를 정수장군(征戍將軍)으로 삼아, 남양(南陽 : 호남성 남양시) 이북의 주군을 공략했다.
이 달에, 천하의 부주현관이 내조했다.
주원장이 유시했다.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어서, 백성들의 재물과 힘이 모두 곤궁하다, 통치의 핵심은 휴양(休養)하고 안식(安息)하는데 있는데, 다만 청렴한 자만이 자신은 검소하고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으니, 이런 자들을 권면하리라.”
진우정[陳友定 1329~1368 = 진유정(陳有定)]
진우정(陳友定), 일명 유정(有定)은 복청(福清) 사람으로, 정(汀=汀州 : 복건성 용암시 서북부 장정현)의 청류(清流 : 복건성 서부, 구룡계 유역, 三明市 서부 소속 청류현)로 옮겨 살았다. 대대로 농사일을 업으로 삼았다. 침착하고 용맹하여 협객들과 사귀는 것을 즐겼다. 향리들 모두가 두려워 복종했다. 진우정은 가난한 농민출신이지만 원말농민기의의 시기에 오히려 농민군과는 대립적인 측면을 고수했다.
지정 연간에 정주부판(汀州府判) 채공안(蔡公安)이 청류(清流)에서 도적을 토벌할 민병을 모았고 진우정이 그 모집에 응했다. 채공안이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기이하다 여겨 그곳의 모병을 맡기고 황토채순검(黃土砦巡檢)으로 삼았다. 여러 산채를 공격하여 평정하여 청류의 현윤(縣尹)을 내쫓았다.
1358년 진우량이 그 장수인 등극명(鄧克明) 등을 보내 정(汀州), 소(邵)를 빼앗고 삼관(杉關)을 약탈했다. 행성(行省)에서 진우정에게 정주로(汀州路) 총관(總管) 직을 주고 막게 했다. 황토(黄土)에서 싸워 크게 이겼고 등극명은 도망쳤다.
*황토(黄土) : 복건성 복주시 북동부 연백양(蓮白洋) 위의 황토강촌(黄土崗村).
다음해 1359년. 등극명이 다시 정주를 취하고 재빨리 건녕을 공격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장수 완자첩목아(完者帖木兒)가 진우정에게 격문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적을 잇따라 격파했다. 잃었던 군현을 모두 되찾았다. 행성에서 그 공이 제일이라고 상소를 올려 참지정사에 올랐다. 그의 이런 통치자를 위한 희생 덕분에 조정으로부터 복건행성평장(福建行省平章)에 임명되고 마침내 복건지역 8군의 토지를 점거하게 되었다. 이후에 진우정은 평장으로서 연평(延平 : 복건성 북단 남평시의 구)에 분성을 두었고 이때 복건(福建)의 8군 모두를 차지했다.
진우정은 농가의 자식으로 품삯 다섯 명과 함께 일어났으므로 글을 읽을 줄 몰랐다. 8군을 점령하고 8군에 웅거하기에 이르러 문학을 아는 명사들을 여러 번 초청했고 민현(閩縣)의 정정(鄭定), 여주(廬州)의 왕환(王翰) 무리를 막하에 두어 머무르게 했다. 문장과 역사를 대강 공부하여 5언시(다섯 글자의 짧은 시)를 익혔는데 모두 조리 있었다. 그렇게 위복이 치우치니 명령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처형하거나 귀양 보내는 일이 빈번하여 끊이지 않았다.
장주(漳州 : 복주시 남쪽 장주시)의 수장 나량(羅良)이 못마땅하게 여겨 글을 보내 책망했다.
“군현은 국가의 땅이오. 관직에 있는 자는 임금의 신하로서의 역할이 있소. 그리고 곳간이라는 것은 조정의 지방 기관이오. 지금 족하는 군현을 자기 집처럼 여기고 관료들을 노복처럼 부리며 곳간을 개인 재산처럼 쓰니, 말로는 나라는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대로 횡행하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족하께서는 곽자의가 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조맹덕이 되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진우정은 이 편지를 받아들고 반성은커녕 대노하여 병사를 보내 나량(羅良)을 죽였다.
그러나 진우정은 원 조정에 대해서는 마치 노복마냥 공손하여 매년 대도로 10만 여 석의 곡식을 바쳤다.
그리고 복청선위사(福清宣慰使) 진서손(陳瑞孫), 숭안령(崇安令) 공해(孔楷), 건양(建陽) 사람 첨한(詹翰)이 진우정을 따르지 않아 모두 죽었다.
진우정이 팔민(八閩 = 복건성)에 위세를 떨치고, 원나라는 말기에 이르러 일찍이 신하들이 절개를 잃었다.
이때 장사성이 절서에서 거병하고 방국진은 절동에서 거병하여 원나라를 따른다고 하였으나 대도로 조세를 보내지는 않았다. 진우정은 세수 수만 석을 보냈으나 바닷길이 멀어 도착하는 것은 열에 셋 넷이었다. 황제가 기뻐하여 포상을 내렸다.
주원장이 무주(婺州 : 강서성 중동부, 복건성과 접경)를 평정하여 진우정과 접경하게 되었다.
진우정이 처주(處州 : 절강성 여수)를 침공했다.
참정 호심(胡深)이 격퇴하고 도망치게 하여 마침내 포성(浦城)을 함락하고 송계(松溪 : 무주)를 점령하여 진우정의 장수 장자옥(張子玉)을 붙잡은 후, 주량조(朱亮祖)와 함께 건녕(복건성 산명시)을 진공하여 방책 두 곳을 격파했다.
진우정은 완덕유(阮德柔)를 보내 병사 4만으로 금강(錦江)에 주둔하여 후방을 포위하고 귀로를 막게 했고,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가 뇌정(賴政) 등에게 날랜 병사들로 공격토록 하니 완덕유가 뒤에서 협공했다.
십년 전, 처주를 지키던 석의말손의 책사였던 호심(胡深)이 주원장에 항복한 후 참정이 되었다가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붙잡혀 죽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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