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최강 최악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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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선
작품등록일 :
2022.02.14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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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0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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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20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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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우스 엑스 마키나(2)

DUMMY

따뜻하게 데워진 물에 몸을 담근 한아름은 나른해지는 감각을 즐기고 있었다.

불과 하룻밤 만에 또다시 주변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은 삼 일 밤낮을 울면서 보내도 모자라지만, 한아름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했다.


‘태아를 신으로 만드는 일은 성공한 것 같아. 아까 아주머니에게 느껴지는 희미한 신력. 분명 사방신님과 같은 종류의 신력이었어. 아마도 수호신님이라 불리는 존재의 가호를 받았겠지. 하지만 평범한 인간의 혼이 마을 전체의 믿음을 십 년 동안이나 견뎌냈을 리 없어. 게다가 승천? 어떻게 천계에 대한 정보를 이런 시골 사람들이 알았지? 심지어 완전히 잘못 알고 있잖아. 이건 마치···.’


슬픔을 외면하기 위해 상념에 빠진 한아름은 욕조 물의 온기에 못 이겨 머리를 젖혔다.


‘힘들다. 내가 너무 큰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처음 보는 사람까지 구원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잖아. 가이아의 신력이 대단한 거지 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데.’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 지칭한 한아름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의 얼굴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구원. 20년 전까지 평범한 삶을 살다가 전 인류의 구십···몇 프로였더라? 아무튼 멸망한 세계에 떨어진 평범한 사람이 구원자 행세하고 다니다니. 심지어 최강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뻔뻔함. 그 사람을 떠올리면 자신의 고민은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무 틈을 벌려 창문을 만든 한아름은 햇살을 얼굴에 담았다.


“아저씨도 참 이상한 사람이야.”

“가이아의 신력을 가진 인간보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누군데?”


사람을 희롱하는 매혹적인 목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열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잔망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욕조에 걸터앉았다. 새하얀 아홉 개의 꼬리를 살랑거리는 여성을 본 한아름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한테도 소개시켜줄래?”

“하아, 머리는 감게 해주지.”


한아름이 욕조 밖으로 나오자 나뭇가지들이 한아름의 몸을 닦아주고 머리를 수건으로 감쌌다. 나뭇가지들이 대령한 새 옷을 걸쳐 입은 한아름은 구미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겉모습만 보고 만만하게 싸움을 거셨다면 도망가도 쫓지 않을게요.”

“대단한 자신감이네. 믿는 구석이라도 있니?”

“당연하죠. 그쪽이야말로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할 거예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진 구미호는 요괴 중에서도 최상급에 위치한 요괴.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심지어 20년 동안 마을 사람들의 공포를 먹어 신력을 키운 구미호는 사방신과도 일대일로 붙어볼 만한 경지에 다다른 역대 최고의 상태였다.

그러나 구미호는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쪽의 상대는 최강이니까요.”


자신이 생포하려는 인간이 다름 아닌 가이아의 대행자라는 사실을.

요정의 집 같던 나무가 내뿜는 흉흉한 살기에 구미호는 처음의 여유를 거두었다.


“기대되네. 약속을 어기고 서두른 보람이 있어.”


[요물(妖物): 여우 구슬]


***


쿠당탕!

의자를 넘어뜨리면서 일어난 나를 신유신은 한심하단 듯이 쳐다보았다.


“내가 잘못 들었나?”

“제대로 들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너희 수호신은 오늘 승천하는 게 아니었어? 뭔지는 몰라도 승천까지 할 정도면 꽤 강한 신이란 뜻 아니야? 아까 지나오면서 보니까 그렇게 강한 요괴는 없는 것 같던데?”

“사방신의 대행자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모르나? 승천은 불가능하다. 강림의 날에 천계와 명계는 이쪽과 단절됐다. 덕분에 천계와 명계에 관련된 신은 거의 넘어오지 못했고, 설령 넘어오더라도 힘을 거의 못 쓰는 상태가 됐지. 애초에 수호신님은 승천할 경지까지 오르지도 못했다.”

“그럼 왜 수호신을 승천시킨다고 한 거야?”

“쯧.”


계속되는 나의 질문에 신유신은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던졌다. 사람을 하찮게 보는 태도와 경멸의 눈빛을 서슴지 않고 보이는 그의 태도는 마치 고위 정치인이나 대기업 회장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시시콜콜한 뒷사정까지 네게 말할 이유는 없다. 궁금증이라면 오히려 내 쪽이 훨씬 많지. 너 정도의 실력자라면 대구를 둘러싼 요괴를 해치우는 건 문제도 아닐 터. 길게 대화할 시간은 없다. 요괴를 죽여라.”


신유신은 아예 눈을 돌리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죽기 전에도 빈말로도 사교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한 학기에 최소 한번은 싸움 때문에 교무실로 불려갔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불같은 성질 때문에 경찰서를 몇 번 들락거렸다.

그래도 이쪽 세계에 오고 나서는 많이 참았다. 아줌마가 도망칠 때도 참았고, 아저씨들이 억지로 집에 들어오려고 했을 때도 참았고, 신유신의 나를 깔보는 태도와 자식을 무슨 닭 한 마리 넘기듯 넘겨주겠다는 태도에도 참고 넘어갔다.

나는 최강의 구원자니까.

그런데 이 늙은이는 기어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내가 담배 끄고 얘기하자고 했을 텐데?


“싫어.”

“뭐라고?”


입에 문 담배를 빼앗아 부러뜨리자 당황한 신유신이 물었다. 신유신의 거만한 태도가 망가지자 나는 조소를 짓고서 말을 이었다.


“내가 뭐하러 요괴를 죽여? 네 수호신도 대충 적당히 강해 보이는데 내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거든. 그리고 나는 이미 같이 다니는 애 하나 관리하기도 벅차요. 당신네들이 그렇게 믿는 수호신님을 데리고 다닐 여유는 없다 이말이야.”

“어린놈이 자기가 알고 있는 얕은 지식이 세상의 이치인 것마냥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내세울 거라곤 비참한 세월의 흔적밖에 없는 노인네의 한탄은 끝인가?”


쿠구구구구!!!

땅이 흔들리는 소리에 집 안에 있던 모두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최근에 들어본 익숙한 소리. 땅에서 솟아오른 나무뿌리와 줄기가 뒤엉켜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아름이만이 벌일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 집이잖아?”

“젠장, 교활한 자식. 눈치채고 있었나? 얼른 가라! 가이아의 대행자가 위험하다!”

“걱정 마셔. 아름이는 올림포스만 아니면 나만큼 강해.”

“헛소리하지 마라! 가이아가 아니라 창조신 주의 대행자라도 구미호는 못 이겨!”


나는 콧방귀를 끼고 신유신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수호 나무 사이를 헤쳐나오며 모습을 드러낸 한 짐승을 보고선 그럴 수 없었다.

아홉 개의 꼬리를 흔드는 흰 여우가 아름이를 물고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름아?”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군. 구미호의 여우 구슬은 사람의 넋을 빼 온다. 요괴와 상성인 수호신의 권능을 가지지 않는 이상 누구도 구미호의 요술을 벗어나지 못해. 그렇지만 이상하군. 녀석도 너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이런 과감한 행동을 감행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아름아!”


[권능: 주작비상(朱雀飛上)]


신유신의 말을 끝까지 들을 시간은 없었다. 주작의 날개를 펼친 나는 전력으로 여우를 쫓아 날아갔다.

구원이 날아간 자리에 남은 신유신은 혀를 차며 자신의 딸에게 물었다.


“사방신의 대행자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정신머리를 가진 놈이야. 신수하. 정말 저 녀석이 구미호를 죽일 수 있긴 한 거겠지.”

“올림포스의 대행자들을 전부 쓰러뜨렸댔어. 구미호는 상대도 안 될 거야.”

“믿을 곳이라고는 사방신의 대행자밖에 없어. 가이아의 신력을 담아낼 혼이 구미호에게 넘어가면 우린 필멸이다.”


얼마 전 구미호와의 거래는 그야말로 불공정 협정이었다. 거래는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 마음만 먹으면 구미호가 모두를 죽이더라도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그때 신수하가 데려온 또 한 명이 구원. 사방신의 권능을 부리는 인간이었다. 요괴와 수호신은 극명한 상하관계. 여우 구슬조차 수호신이 보호하는 자의 넋을 빼지는 못한다. 구미호가 어떤 잔재주를 부리더라도 사방신의 권능을 사용하는 대행자를 이기진 못할 것이다.

신유신이 생각에 잠겨 담배를 들자 신수하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너야말로 약속 지켜. 요괴만 쫓아내면 수호를 자유롭게 해줘.”

“약속은 지킨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라. 수호신님을 마을 밖으로 내보내고 싶은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


콰직! 콰광!

사방에서 목책이 무너지는 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렸다. 수호신이 생긴 이후 십 년 동안 제대로 된 공포를 먹지 못해 굶주린 요괴들이 구미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지체없이 습격을 감행한 것이다.

오랜 시간 요괴의 습격을 받고 살아온 주민들은 각자 손에 농기구를 들고 신유신의 집에 달려왔다.


“시장님! 요괴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어서 대피해야 합니다!”

“수호신님! 살려주세요!”

“아니! 이참에 이놈의 요괴들 씨를 말려주세요!”

“진정하십시오. 모두 같이 기도 올립시다.”


신유신은 몸을 돌려 신수호를 마주 보았다.

인간의 감정은 어느 한쪽이 극으로 치달았을 때 그와 상반되는 감정도 동시에 달아오른다.

주민들의 감정은 요괴로 인한 불가항력인 죽음의 공포. 때문에 공포를 지워줄 신적인 존재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그 믿음은 독실했다.

그러나 수호가 받은 가장 순수한 믿음은 주민 중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는 누나 신수하도 아니었다.


“수호신님. 요괴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십시오.”


자신의 아버지 신유신. 아버지는 한 번도 자신에게 말을 낮춘 적이 없었다. 항상 자신을 신으로써 대했고, 그 외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딱 한 번, 수호는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몇 살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로 가던 수호는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었다. 그 당시 마주친 아버지의 눈에 비친 자신은 신이 아니었다.

악마.

하나뿐인 아들에게 지독한 증오를 가진 아버지는 자신을 아들이 아닌 신으로 보기를 택한 것이다.

수호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것은 어떤 신앙적 이유도 아닌,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람의 감정이 어린 소년의 심장을 죄였기 때문일 것이다.


“네. 아버지.”


수호는 심장에서 빼낸 한 손 검을 치켜들었다.

세상의 빛보다 사람의 신앙을 먼저 본 수호의 신력이 하늘로 뻗어나갔다.


[신이 된 인간 신수호의 권능이 대구를 감쌉니다!]


***


둔갑을 해제한 구미호는 숲을 가로질러 전력으로 도망쳤다.

신유신의 뒤통수를 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녀에겐 두 가지 오산이 있었다.

첫 번째 오산은 가이아의 신력이 한아름의 혼을 지키고 있다는 것. 넋을 빼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정작 취하려던 한아름의 혼은 건드리지도 못했다.


“빠르긴 빠르네. 벗어나긴 힘들겠어.”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죽던가! 아니면 당장 아름이를 놓고 꺼지던가!”


두 번째 오산은 이 남자. 사방신의 신력을 내뿜고 있는 흉흉한 기운의 남자가 한아름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우 구슬까지 꺼내 싸운다면 무승부까지야 어찌저찌 가능하겠지만, 한아름의 넋을 빼올 때 여우 구슬의 신력을 예상 이상으로 소모한 지금 더 이상 신력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구미호가 구태여 싸울 필요는 없었다.


“아니지. 너를 묶어두고 이 아이의 혼을 취한다는 선택지도 있잖아?”

“할 수 있으면 해봐!”

“네가 해보라고 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네 마리의 요괴가 지금 막 당도했기 때문이었다.


[여우 년. 이놈 때문에 우릴 불렀나?]


육중한 몸무게로 남자를 짓누른 혼돈이 물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잖아.”

“닥쳐라! 너야말로 무슨 짓이냐! 평양과 서울에 그런 괴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반인반수 형태의 괴수 도철이 구미호에게 소리쳤다. 확실히 이들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구미호와 최소 동급의 신력을 가진 사흉수의 신체는 만신창이가 돼있었다.


“그럼 가이아의 혼을 공짜로 먹으려고 했어? 욕심이 심하네.”

“괘, 괘, 괘, 괜찮아. 나는 오랜만에 사, 사, 사, 사람을 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시, 시, 시, 신나.”


오랫동안 굶은 것도 모자라 평양과 서울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궁기는 평소보다 말을 훨씬 더듬으면서 침을 질질 흘렀다.


“뭣하면 너도 죽이고 가이아의 혼은 우리가 먹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라.”

“알았으니까 저 인간 좀 잘 부탁해. 나는 이 아이의 혼을 빼내느라 바쁘거든.”


송곳니 사이로 하얀 김을 내뿜는 도올이 특유의 거만한 자세로 구미호를 깔봤다.

지금은 개개인의 힘이 자신보다 약한 상태면서 고개를 뻣뻣이 든 사흉수의 태도에 구미호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든 타이밍 좋게 왔으니 구미호는 사흉수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주고 숲을 빠져나갔다.


“너흰 뭐야? 꺼져! 너희와 놀고 있을 시간 따위 없어!”

“웃기는 인간이군! 고작 대행자 주제에 감히 우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시끄러워! 잔챙이는 잔챙이끼리 놀고 있어!”


구미호는 남자와 사흉수의 싸움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당연히 남자가 찢겨 죽일 테고, 기껏해야 사흉수 한둘이 죽는 변수가 있을 테니까. 그 사이에 자신이 한아름의 혼을 빼먹어 승천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벌어지는 광경에 구미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현현(顯現): 사방신]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사방신이, 인간의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작가의말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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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랑받는 수호신(1) 22.05.20 32 0 15쪽
14 기적의 끈(4) 22.05.18 52 1 17쪽
13 기적의 끈(3) 22.05.15 28 1 14쪽
12 기적의 끈(2) 22.05.13 40 1 13쪽
11 기적의 끈(1) 22.05.08 34 1 12쪽
10 최악의 구원자(3) 22.05.05 32 0 16쪽
9 최악의 구원자(2) 22.04.16 38 0 14쪽
8 최악의 구원자(1) 22.02.24 34 0 13쪽
7 데우스 엑스 마키나(3) 22.02.23 35 0 12쪽
» 데우스 엑스 마키나(2) 22.02.20 44 0 14쪽
5 데우스 엑스 마키나(1) 22.02.17 53 0 16쪽
4 자칭 최강 최악 구원자(4) 22.02.15 45 0 14쪽
3 자칭 최강 최악 구원자(3) 22.02.14 48 0 12쪽
2 자칭 최강 최악 구원자(2) 22.02.14 59 0 12쪽
1 자칭 최강 최악 구원자(1) 22.02.14 151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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