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번째 손님. 설화의 여신과 소시지
-드르륵.
"일어나세요. 사구메 님. 아침입니다."
"으응···."
거미줄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한쪽밖에 없는 날개였지만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다.
<우동게···커피···.>
"아침부터 커피는 속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구요?"
<그럼···카페 라테···.>
"커피용 우유는 다 떨어졌어요."
<그럼 더 잘래···.>
그대로 자리에 누우려는 여성을, 토끼귀 소녀가 붙잡았다.
"안 일어나시면 스승님께 또 깨져요!"
<너무해. 일주일 중에서 9일을 쉬고 싶단 말이야···.>
비몽사몽 한 상태인지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었다.
특이하게 그녀는 입을 열고 있지 않았다.
복화술이라도 쓰는 것처럼, 능숙하게 메시지 마법을 지속해서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아. 할 수 없네요. 이것만큼은 안 하려 했는데. 일어나시지 않으면 오늘 아침밥은 없습니다."
<반칙이야···.>
아침만큼은 어쩔 수 없었는지, 그녀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수건을 챙겨 들고 욕실로 향했다.
===
<썩을 정도로 시간은 넘친다고. 더 자게 해주는 것이 어때서 그러니.>
머리를 빗으면서 투덜거렸다.
능력 때문에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나는 모든 대화를 메시지 마법으로 해결했고, 그 결과 꽤 많은 마력을 낭비하게 되었다.
마력을 보충하기 위해 메시지 마법을 최대한 개량해서, 이젠 24시간 내내 메시지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안 그래도 비효율적인 메시지 마법 때문에, 기면증이라도 생긴 것인지 요즘은 온종일 피곤하다.
"누워서 숨만 쉬지 말고 일도 조금은 도와주세요."
<나, 의료술 못 해.>
"그러면 청소라도."
<다른 토끼들이 너무 많아. 인원 과다.>
"그러면 알아서 일해주세요."
<알았어···.>
적당한 옷을 걸치고 문을 나섰다.
불볕더위도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하는 여름의 끝이 눈앞에 있었다.
===
"자주 오시네요."
<꿈이니까 당연.>
몽환적이면서 이질적인 느낌으로 가득한 이곳은 꿈의 세계이다.
모든 것이 있는 듯하면서 또 없는 것 같았다.
연기가 서로 뭉치면서 어떤 형상을 만드는가 하면, 연기가 공중에서 흩어지면서 형상이 사라지기도 했다.
"악몽은 눈곱만큼도 꾸지 않으시면서 왜 자꾸 저를 찾으시죠?"
<이야기하고 싶은 게 또 생겼거든.>
꿈을 만들고 먹는 맥, 도레미 스위트가 무표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현실의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없어요."
<알아. 그러니까 너랑 대화하고 싶어.>
===
"뭔가를 도와주고 싶은데 도와줄 방법은 없다?"
<응.>
"겨우 그런 걸 가지고 뭐 그렇게 고민이에요."
뭔가 아주 큰 고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도레미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고민을 했다는 거 자체가 좋은 거에요. 심성은 성실하다는 뜻이 되니까."
<그, 그래?>
"무리하게 의료술을 쓰지 말고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자기에게 맞는 일 찾고, 찾으면 그 길로 계속 가면서 노력하면 되죠."
<뭐, 뭐야. 간단하잖아?>
"근데, 말이 간단하고 복잡하지 않을 뿐이지 절대 쉽지는 않답니다."
<윽.>
"시간은 넘친다고 했죠?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나중에는 다 맞춰지게 돼요. 당신은 인간처럼 단명하는 생물은 아니잖아요?"
<응. 힘낼게.>
===
"으응."
눈을 떠보니 정오다.
기면증 때문에 또 잠든 것 같다.
<흐암. 묘한 꿈이네. 생생한 느낌.>
도레미의 말대로 제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갔다 올 데가 있으니 갔다올게.>
"어디요? 졸음 쉼터? 아니면 공원 벤치?"
<나 노숙자는 아니거든···?!>
나를 도대체 뭐로 생각하는 거야?! 내 평판이 이 정도까지 떨어져 있을 줄은 몰랐는걸.
"길 가다가 주무시지 말고, 계산하다 주무시지 말고, 거리 음식 드시다가 주무시지 마세요. 그리고···."
<안 자! 안 잔다고!>
각성제 2인 복용량만큼 먹었으니 괜찮을 거란 말이야!
날 무시하지 마!
"네네."
<훌쩍.>
기분만 잔뜩 상한 채로 영원정을 나섰다.
진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진짜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평판이 떨어질 거야.
===
-툭툭.
홍마성의 도서관에 도착한 후, 책을 골라서 자리에 앉았다.
주로 어렵지 않은 책들로 골랐다.
고상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어려운 책을 고르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질릴 때까지 독서를 하다가 보면 뭔가 남는 게 있을 거야.'
한 권, 두 권. 다 읽은 책들이 옆에 쌓이기 시작했다.
===
'아냐. 아냐. 이걸로는 안돼.'
하루를 꼬박 독서에 보냈다.
책을 덮고 하늘을 봤을 때는 이미 새벽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어지간히 독서에 집중했나 보네."
고개를 돌려보니 도서관장 파츄리 널릿지가 서 있었다.
<무슨 일.>
"15시간이나 한 자리에 머무는 사람은 적은걸. 당신 같은 최초의 천족은 더더욱."
최초의 천족.
아주 멀고 먼 옛날 아인 소프 오울이라는 존재가 아주 긴 세월 동안 이어진 전쟁을 종식할 때 살아남은 존재들을 칭하는 말이다.
그래. 에이린과 카구야 공주 등등과 더불어 우리는 그때 살아남았다.
영원과 수유의 세월을 거쳐서.
"무슨 꿍꿍이를 가진 거지?"
<최초의 천족은 독서를 하면 안 돼?>
"글쎄. 불순한 의도는 아니길 바랄게."
우리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 때 죽어간 생명이 얼마나 될지는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니까.
<알았어. 긴 시간 동안 식사를 아예 안 해서 그런지 배가 고파졌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츄리의 소환수 악마들이 책을 도로 가져다 놓는 것을 보며 도서관을 나서려 했다.
"파츄리 님은 오늘 연구 성과를 내시느라 극도로 피곤하신 상태입니다. 하우스키퍼로서 대신 사과드립니다."
<괜찮아. 익숙해.>
사실 지금 배고파 죽을 것 같은 심정이라 빨리빨리 식당에 가고 싶었다.
"성 내에 연결된 식당이 열려있답니다. 원하시면 같이 가시겠습니까."
<뭐? 그럼 좋아. 거기로 가지.>
그러고 보니 오늘 달의 날이었구나.
이 날만큼은 다들 누구보다 근면해지는 날이다.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
"오호오."
식당에 가서 주문한 요리는 소시지 정식이었다.
각양각색의 소시지들이 자우어크라우트와 어우러져 시각적으로 좋은 점수를 매기게 하였다.
"소지지라, 좋은 선택이군요."
<여기서 좋지 않은 선택지는 없잖아.>
블랙 퍼스트 같은 요리를 주문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하우스키퍼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값싼 부위로도 이렇게 고급적인 맛을 내게 하는 게 좋은걸.>
본래 소시지는 인기가 없는 부위인 가축의 내장과 저급 육류를 내장에 채우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여러 재료의 사용과 향신료, 다양한 조리법 등으로 인해 점점 위상이 오른 요리라고 할 수 있겠다.
-톡!
바로 이 껍질을 씹을 때 터지는 느낌이 정말로 좋다.
뽀득한 느낌에 중독돼서 소시지를 찾게 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뽀득한 소리로 출발해서, 고급스러운 육류의 맛을 느낄 때는 잠깐이지만 쾌락을 느낀다.
안에 무슨 고기로 차있는가에 따라 맛이 다르겠지만, 기본은 돼지고기다.
"꽤 만족스러워 보이시는군요."
<당연한 소리를.>
마지막으로 삼킬 때 까지의 뽀득한 느낌이 있는데다가 육즙이 계속 느껴지는 걸 보니 정말이지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느끼한 맛조차 별로 없었고, 그마저도 자우어크라우트로 상쇄시킬 수 있었다.
<이따금 치즈가 박힌 소시지는 여기서만 맛볼 수 있어.>
원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렇군요. 만족스러운 식사였습니다."
<응. 음식 대접은 잊지 않을게.>
"별말씀을."
===
-쭈우욱.
차가운 커피를 마시자 머릿속이 짜릿해졌다.
만족스러운 식사도 해서 그런지 기분이 들뜬 상태였다.
"크."
기분이 좋아지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작문도 괜찮을 것 같았고, 마법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모두 내가 자신 있는 분야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취미에 그쳤지 본업이 될 수는 없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여러 생각이 교차하던 도중, 머릿속을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짧고, 간단하면서도,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는 무언가가.
-휙.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어.'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발걸음을 재촉해서 도착한 곳은 미술용품점이었다.
'시작해볼까.'
적당한 두께의 스케치용 종이와 도구를 골랐다.
그리고 딱 좋은 장소를 찾았다.
때마침 좋은 소재도 있었다.
===
<완벽.>
스케치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느새 적당한 풍경화가 완성되어 있었다.
스케치가 완성된 종이는 채색 표시만 옅게 하고 다른 종이를 꺼내, 다시 장소를 찾아 스케치했다.
그렇게 두세 장 정도 스케치를 하고 나서 편한 장소를 찾았다.
실외가 아닌 실내공간을 찾았다.
<이제 조금만 더···.>
채색용 도구는 물론 잉크펜이다.
완전한 검은색도 좋지만, 너무 단순한 색이라 100점을 주기엔 아깝다.
그래서 고른 것은 암청색 잉크다.
-스스스슥.
부드럽게 채색도 잘 된다.
예상한 대로다.
이 정도면 무난하게 좋은 작품이 되겠어.
-탁.
꽤 긴 시간이었지만 그림이 완성되었다.
<좋았어.>
나머지도 도전해보는 거다.
까짓 거 문제 있겠어?
===
"나쁘진 않네. 걸어둘 정도는 되겠어."
<그, 그래?>
눈이 높은 편인 에이린에게서도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이러면 나쁘지 않겠어.
"다음부터는 녹색으로 그려봐.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색이니."
<응. 참고할게.>
며칠이 지나자, 내 그림은 벽에 걸렸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 그림을 모두 보게 되었다.
물론 직접 그림에 대해 언급하는 이들은 없었다.
"뜬금없이 그림에 손대신 이유는 뭐에요?"
<뭐 어때. 취미도 여러 개. 바꿔가면서 하면 사는 게 즐겁지 않겠어?>
본업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어떻단 말인가.
취미 하나 선택하고, 그 취미로 계속 시간을 보내다가, 질리면 다른 취미를 찾아서 즐기면 되는 거 아닌가.
"네, 사구메 님께서 만족하신다면야 말릴 거는 없죠."
별 거 아닌 취미도 계속 하다 보면 계속 발전하고 다듬어지기 마련이다.
물론 중간마다 권태기가 올 수 있겠지만, 그것도 넘어서면 될 일이다.
급할 것은 없으니까, 여유롭게 즐기면 된다.
===
"진짜 인생을 즐겁게 보내고 계시네요."
<인생이란 거, 어렵지 않아. 이런 게 인생.>
한 곳에는 쌓여가는 책과 종이들, 한 곳에는 잉크와 먹물로 더러워지는 책상 덮개.
이런 상태에서도 작업 공간은 여유롭다.
-후릅.
밀크티를 마시며 또 다른 취미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기면증은 고치지 못했다.
"후아암."
그대로 펜을 잡은 채로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들리는 것은 담요를 덮어주는 우동게의 목소리였다.
"예전보다 근면해지셨지만 이래서야 수벌과 다를 게 없잖아요."
우동게, 너도 나중에는 내 마음을 이해해줄 때가 오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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