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byss : 추락한 자들의 세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소다킹
작품등록일 :
2022.04.05 17:26
최근연재일 :
2023.02.26 12:33
연재수 :
179 회
조회수 :
8,356
추천수 :
77
글자수 :
955,741

작성
22.08.29 23:17
조회
25
추천
0
글자
13쪽

79화 루시아(3)

DUMMY

아토메스 국왕은 크리스탐 백작을 만나면서 오랜 지병을 떨쳐내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정치를 포함해 다른 종족들과의 대외정책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루시아 공주의 결혼식 이후부터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지기 시작하더니 병을 이기지 못하고 아들 테스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세네리엘의 곁으로 떠나갔다.


굳센 딸인 루시아는 아버지의 죽음에도 흔들리거나 울지 않았다. 대신들을 비롯해 특히나 남편인 크리스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루시아마저 약해진다면 아직 어린 남동생 테스 국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배우자인 크리스탐이 아버지처럼 사자 같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늑대처럼 강인한 남자이길 바랬으나 겉모습만 늑대 같은 내면에는 야비한 여우가 숨어 있다는 걸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알게 되었다.


크리스탐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내던 아토메스 국왕은 그들의 감시가 잠깐 느슨해진 틈을 타 힘겹게 펜을 잡고 짧은 메시지가 담긴 편지를 썼고 게일은 그 편지를 로건을 통해 루시아 공주에게 몰래 전달했다.


편지엔 백작이 왕국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하니 북쪽이나 동쪽으로 가라고 쓰여 있었다. 크리스탐은 왕이 약해진 틈을 타 충신들을 하나둘 제거해 나갔고 악명높은 길드들을 자신의 수하로 포섭해 힘을 늘려갔다.


대표적으로 모험가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꼽히지만, 성격이 난폭해 평판이 좋지 않은 가일랜드의 길드를 받아들이면서 그를 사령관으로 임명해 왕의 병사들을 강등시켜 변방으로 보냈고 자신의 수하들을 왕궁에 배치했다.


그의 이런 위협적인 행동에 반기를 든 건 북쪽 가시성채 하틴 게일과 동쪽 힘의 성채 피틴 로산이었다.


- - - - -


3일 동안 이어진 성대한 장례식이 내일이면 끝이 났다. 잠도 자지 못하고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켰던 루시아는 그리웠던 자신의 방에 들어와 문을 닫고 숨을 몰아쉬었다.


폭신하고 아늑한 침대가 팔을 벌려 뛰어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아주 잠깐만 포근히 안아줄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굽이 높은 흰색구두와 드레스를 벗자 긴장되어 있었던 몸이 풀리며 노곤해짐을 느꼈고 마지막으로 숨통을 조여오던 코르셋을 벗어던지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가려져 있었던 뽀얀 속살을 드러내놓고 잠깐 근육이 풀리는 걸 즐기며 노곤해져 오는 몸을 일으켜 침대 밑에 숨겨 두었던 암살자 직업 복장을 꺼내 입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페릴던의 음식은 짜고 비린 음식이 많아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해 살이 빠졌는지 예전엔 하나의 피부처럼 딱 달라붙었었던 가죽옷들 사이에 공간이 생겨 헐렁했고 통 움직이질 못해서 그런지 배만 조금 나온 것 말고는 옷을 입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루시아는 장비를 챙겨 경비병들 몰래 유유히 왕궁을 벗어나 미담 선술집 지하를 통해 성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숨을 고르며 잠시 멈췄다. 속에서 피맛이 올라왔다.


걸쭉해진 침을 뱉어내고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는 멀리 불이 켜진 산장을 올려다보았다.


데일러스와 달콤한 속삭임을 나누고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들만의 아지트였다.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하루만 지나도 억새처럼 무성하게 자라나는 그의 수염은 따끔거리기는 했지만, 그의 입술이 얼굴에 닿을 때면 간지러울 때도 있었고 수염을 뽑으며 그를 괴롭히던 순간과 그의 손등에 성난 듯 튀어나왔던 핏줄을 루시아는 참 좋아했다.


머리로는 붙잡지 않아 준 그를 미워했지만, 아직 가슴속 어딘가에선 오지 않는 그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루시아에겐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따분할 정도로 길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작과의 결혼을 충분히 미룰 수도 있었지만, 루시아는 그의 진실된 사랑을 시험하고 싶었다.


크기는 얼마나 큰지 깊이는 또 얼마나 깊은지. 루시아는 그가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었다. 아니 그에 앞서 산장을 나서자마자 그가 뒤따라 나올 거로 생각했다.


그래서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아주 천천히 왕궁으로 그가 따라잡을 수 있게끔 걸었었다.


사색에 잠겨 헤어나오지 못해 하마터면 산장으로 걸음을 옮길 뻔했다. 물론 그러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의 하수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이동해야 했다. 크리스탐은 바보가 아니었다.


공주는 그에게 활용성 높은 무기인 걸 알았고 도망치려 할수록 쥐려고 했다. 그의 꼭두각시가 되기 전에 탈출해서 다행이었지만 완전히 안전해진 건 아니었기에 루시아는 산장 근처에 시간을 벌어줄 자신의 환영을 소환해 놓고 떠났다.


왕궁을 벗어난 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루시아의 몰골은 거의 좀비 수준이었다. 두 발로 가시성채까지 가려니 너무 먼 거리였다.


도망가던 중에 여러번 놈들에게 발각될뻔했던 터라 멈출 수 없었고 그래서 얼어붙은 계곡물을 깨 가며 얼굴을 씻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데일러스가 좋아했던 금발의 머리카락은 씻지 못해 이제는 잿빛으로 변해갔다.


얼굴과 손 등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추위에 힘없이 갈라지고 찢어져 피가 새어 나왔다. 숨을 몰아쉬려 입을 벌릴 때마다 이미 찢어졌었던 입술이 또 찢어져 피가 흘렀고 온몸이 동태처럼 꽁꽁 얼어붙어 굴러다니는 작은 돌만 밟아도 충격이 몇 배는 크게 작용해 바위를 걷어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루시아는 따뜻한 코코아 한잔에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아쉰베일을 넘어가자 추격대도 더는 쫓아 오지 않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 상태로 비박이라도 하면 그대로 얼어 죽을 터였다.


불을 피우거나 사냥을 할 힘이 더는 남지 않았다. 몸을 비틀거리고 바들바들 떨면서 다가오는 루시아를 본 경비병들은 달려 나와 만신창이가 된 루시아를 부축해주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세상에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필립! 위급환자야. 어서 사제님을 불러줘!”


간신히 경비병의 부축을 받으며 버텼던 루시아는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저 너머에서 사제의 음성과 경비병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눈조차 깜빡 일수 없었던 루시아는 그들의 목소리가 옅어지고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됐을 때 다시 희미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데일러스의 넓은 품에 안긴 것처럼 따뜻하고 포근함이 약해진 몸을 감싸주고 있었다. 루시아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데일러스...”


- - - - -


조약돌을 얹어 놓은 듯 무거워진 눈꺼풀을 겨우 움직여 눈을 떴다. 침조차 나오지 않아 바짝 말라버린 입안을 적시기 위해 옆에 놓인 물통을 집어 들고 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물을 쏟아 넣었다.


바삐 움직이는 시계 초침과 꿀꺽꿀꺽 물이 넘어가는 목 넘김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이곳은 어디인지 왜 이곳에 누워있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루시아는 욕구가 채워지자 더러운 자신의 머리 때문에 새카맣게 변해 지저분해진 베개를 반대로 돌려놓고 다시 쓰러졌다.


잠을 청하려는 그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소독약 냄새가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 틈새를 파고 들어왔다.


“공주님.”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호칭인가. 크리스탐 백작부인으로 통했던 끔찍한 날들이 지워지고 예전 철부지 공주의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궁금해진 루시아는 생각했다.


공주라고 불러 주는 것으로 봐서는 왕궁 아니면 가시 성채일 텐데. 물을 마시는 동안 실눈을 뜨고 있었지만, 방안 어디에서도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었다.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내려 눈만 빼꼼 내놓았다.


침대 앞에는 공손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 흰색 로브를 정리하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제가 있었다. 왼쪽 가슴 주머니에 게일 후작 가문을 상징하는 하얀 수선화 자수가 있었다.


안심한 루시아는 표정을 순하게 바꾸었다. 사제는 이불을 향해 손을 뻗어 살짝 붙잡고 내리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치료를 해드려도 될까요?”


“아... 응...”


사제는 말없이 치료에만 집중했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갈라진 피부에 새살이 돋아났고 상처는 깨끗해졌고 부드럽게 매만지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관심이 받고 싶었던 루시아는 묵언을 유지하고 있는 사제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가시 성채에 도착한 것 맞지?”


사제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마음 고생했던 것이 폭발하며 감정이 북받치며 울컥 올라왔다. 루시아는 치료 중인 사제를 와락 끌어안고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강한 모습을 보이려 아버지의 관 앞에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더는 참기 힘들었다. 맑게 웃고 있는 사제의 앞에서 다 털어내고 싶었다.


사제는 아이처럼 품에 안겨 우는 공주를 토닥여 주며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공주님? 후작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어서 치료받고 식사도 하셔야죠.”


루시아는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쳤고 그녀에게 상처를 내밀었다. 사제의 품은 따뜻했다. 날씬한 여사제였지만 대장부보다 더 든든하게 느껴졌다.


혼자 슬픔을 삼키고 견뎌냈던 루시아는 누군가를 이렇게 끌어안고 기대 의지하는 게 이렇게 큰 힘이 되는 줄은 몰랐다. 모든 것을 치유 받고 용서받고 또 일어설 힘을 얻은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은 어색했다.


“비밀로 해줘...”


사제는 눈을 크게 뜨고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운 것 말이야...”


“물론이죠. 언제든지 힘드시면 제게 오세요.”


눈물 콧물을 쏙 빼놓고 나니 사제의 말대로 허기가 몰려왔다. 게일은 예를 갖춰 루시아 공주를 극진히 모셨다. 그녀의 앞에는 궁에서나 먹을 법한 진귀한 요리들로 가득했다.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다양한 요리가 있었지만 그중 루시아의 눈과 코를 자극한 건 괴수어찜이었다. 살집이 많고 육류처럼 쫄깃한 식감과 한입 베어 물 때마다 쏟아져나오는 육즙은 일품이었다.


괴수어를 잡으려면 신체 일부분을 놈에게 내줘야 할 정도로 굉장히 사나운 어종이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속도도 빠르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어부들을 피하기보다는 먹잇감으로 인식해 배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어부들은 되도록 그들을 피해 최대한 연안에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았다. 이 때문에 괴수어는 가격도 비쌌고 귀해서 귀족들도 맛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맛있게 드십시오. 공주님.”


굶주린 한 마리의 맹수처럼 게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음식을 향해 달려들었다. 공주의 최면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훈제오리의 다리를 맨손으로 붙잡고 한 입 크게 물어뜯었다. 게일과 그의 부인 다이아나는 멍하니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는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민망하지 않고 식사할 수 있도록 아무런 말 없이 최대한 그녀와 속도를 맞춰주었다.


맛있는 건 마지막에 먹는 공주의 식성을 알고 있었던 게일은 괴수어 찜에 손도 대지 않았다. 맛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만 인내하며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의 젓가락이 찜으로 향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과감하게 살점이 가장 풍부한 중앙 부분을 잡고 크게 떼어내 접시에 올렸다. 게일도 젓가락을 고쳐잡고 찜을 향해 젓가락을 시작했다.


정교하게 최대한 많은 살점을 가져왔다. 괴수어의 살점이 찢어지며 담백하고 조금은 매콤한 향이 식당 전체로 번져 나갔고 냄새에 자극을 받은 다이아나와 루시아는 동시에 헛구역질을 했다.


“우욱!”


두 여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게일은 찜을 입으로 가져가다 젓가락을 놓쳤다. 슬픈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살점을 바라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아... 내 찜...”


식당 문이 벌컥 열리고 경비병이 빠르게 다가와 게일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후작님. 현상 수배범이 후작님을 뵙겠다고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The abyss : 추락한 자들의 세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시즌1 종료. 23.03.01 22 0 -
179 179화 지도자(3) 23.02.26 15 0 17쪽
178 178화 지도자(2) 23.02.24 18 0 12쪽
177 177화 지도자(1) 23.02.21 22 0 12쪽
176 176화 반격(2) 23.02.20 22 0 10쪽
175 175화 반격(1) 23.02.19 21 0 11쪽
174 174화 기습(6) 23.02.17 24 0 12쪽
173 173화 기습(5) 23.02.14 22 0 11쪽
172 172화 기습(4) 23.02.13 21 0 11쪽
171 171화 전쟁의 서막(2) 23.02.12 21 0 11쪽
170 170화 전쟁의 서막(1) 23.02.10 23 0 11쪽
169 169화 기습(3) 23.02.07 25 0 12쪽
168 168화 기습(2) 23.02.06 22 0 11쪽
167 167화 기습(1) 23.02.06 22 0 11쪽
166 166화 연합(10) 23.02.04 22 0 12쪽
165 165화 연합(9) 23.01.31 22 0 11쪽
164 164화 연합(8) 23.01.30 38 0 12쪽
163 163화 연합(7) 23.01.29 23 0 11쪽
162 162화 연합(6) 23.01.27 23 0 11쪽
161 161화 연합(5) 23.01.24 28 0 10쪽
160 160화 연합(4) 23.01.23 28 0 12쪽
159 159화 연합(3) 23.01.22 30 0 12쪽
158 158화 대모 모구라 23.01.21 28 0 12쪽
157 157화 연합(2) 23.01.17 31 0 10쪽
156 156화 연합(1) 23.01.16 31 0 12쪽
155 155화 류미(1) 23.01.16 30 0 12쪽
154 154화 스피제리(3) 23.01.13 31 0 11쪽
153 153화 스피제리(2) 23.01.11 33 0 11쪽
152 152화 스피제리(1) 23.01.09 33 0 11쪽
151 151화 크리스탐 23.01.09 30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